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254화 (254/346)

254화

“승빈아, 너 드라마 할 생각 없니?”

“…네?”

언제나처럼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마주친 건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스케줄 관리를 담당하는 팀장님, 보통은 매니저 형을 통해서 스케줄이 전달되는데, 다짜고짜 드라마라니?

“어제 회식을 갔는데 네 얘기가 나와서-”

“제 얘기가요?”

“어, 정재필 감독이라고 알려나?”

“네! 당연히 알죠! 유명하시잖아요.”

여기서 정 감독 이름이 나온다고? 소름이 돋을 뻔했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이번에 학원물 하나 하려나 본데, 출연진이 네 얘기를 했었나 봐. 너랑 그 MC 같이하는 사람인가?”

“김민영 선배님이요?”

“어, 맞아. 김민영. 그래서 너를 캐스팅할까 하던데, 너는 어때?”

“저는 당연히 너무 좋죠! 근데 제가 출연해도 괜찮을까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일부러 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어봤다.

“카메오 정도 분량이라던데, 뭐- 부담 없으면서도 기사 내기는 좋지. 정 감독 이름 딱 박아서-”

뜻밖의 행운이라더니. 정말 이름 그대로였다. 내가 어떻게 손쓰기도 전에 드라마 캐스팅이 굴러 들어오다니. 지난 고뇌의 시간이 무의미해지긴 했지만, 오히려 좋았다.

[대본 리딩 날 봬요, 선배님.]

가뿐한 마음으로 김민영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ㅇㅇ]

돌아온 건 역시 김민영다운 쿨한 답장.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행복한 마음으로 오전 내내 연습실에서 팬 미팅 무대를 준비하고, 바로 방송국으로 향했다. 컴백 주가 지났기에 이번 주는 대부분 생방송 스케줄이었다. 생방송이 시작되고 거의 마지막 순서로 무대를 마쳤다. 클로버들만 뽑는 사전 녹화가 아니었음에도 객석을 가득 채운 클로버들에 다들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어진 1위 발표.

“이번 주 1위의 주인공은 바로- 크리드! 축하드립니다!”

“우선 세상 가장 사랑하는 클로버! 이건 여러분과 함께 받는 거라고 생각해요. 클로버가 저희에게는 1위입니다.”

1위 소감을 마치고 앵콜을 시작하는데, 정말 거짓말 안 하고 객석의 90%가 클로버인 듯했다. 다들 예쁜 연두 빛깔의 응원봉을 들고 응원법을 하는데, 이게 지금 음악 방송 앵콜 무대인지 콘서트 무대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멤버들 한 명씩 수상 소감을 말하고 내 차례가 왔다.

“이번 앨범,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정말 클로버만 생각하고 준비했는데 이렇게 좋은 상 받을 수 있어서 너무 기쁩니다! 언제나 저희 위해서 애쓰는 거 다 알고 있어요, 앞으로도 초심 잃지 않고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크리드 되겠습니다. 그리고 앨범 준비에 도움 주신 모든 코어 회사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저희 믿어 주셔서 더 자신감 가질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멤버들! 너무 고생 많았어, 우리 앞으로도 지금처럼 쭉 파이팅 하자! 감사합니다!”

크리드로 지금껏 꽤 많은 1위를 했지만, 준비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던 만큼 더 기뻤다. 데뷔 후 가장 기억에 오래 남을 활동이었다.

* * *

드라마 리딩 장소에 도착하니 김민영이 먼저 와 있었다.

“선배님, 먼저 오셨네요?”

“당연하지. 네가 나보다 먼저 와야 했던 거 아닌가?”

“아이고, 죄송합니다~”

예전이라면 저 말에 긴장하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이제는 나를 놀리려고 하는 장난인 걸 안다. 그새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거든.

“용케 소속사를 이겼네?”

김민영도 트로피 엔터테인먼트와의 일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너스레를 떨며 답했다.

“선배님이 추천한 자리고, 정 감독님 작품인데 당연히 해야죠.”

“어떻게 설득했는데?”

“못 하면 은퇴할 거라 그랬죠,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써 보기도 전에 행운이 먼저 찾아왔지만.

피식 웃으며 대본을 확인하던 김민영이 무언가 떠올랐는지 말했다.

“맞다. 이번에 서브 남자 주인공이 너랑 같이 넥스트 레벨 나왔던 아이돌이더라?”

“그래요? 누구지?”

나는 마치 처음 들은 것처럼 행동했다. 유현재인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직 기사도 안 나간 내용이니까.

“응. 유현재라는데. 요즘 배우판에서 라이징이라고 하더라고?”

“배우 활동하는 건 알았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궁금했어. 그렇게 싸가지가 없다는데 얼마나 개차반일지. 너는 어땠어?”

선배님의 필터링 없는 발언이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김민영 씨 평판이랑 별반 다를 게 없을 거 같은데…….’

“저는 괜찮았어요. 걱정한 거에 비하면 나름 배울 점 있는 형이었어요.”

“넌 이게 문제야.”

“네?”

“너, 어디 가서 나 어떠냐고 물으면 그렇게 답할 거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동자만 굴리는 나를 보며 김민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그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 그것도 문제라고.”

“제 눈이 그래요?”

‘그야 아무것도 모른 척하고 있으니까…….’

“어. 네가 고양이야? 눈을 그렇게 뜨고……. 그것보다도 지금 최대한 장점 찾아서 말하려고 하는 거잖아.”

“그럼 안 돼요?”

“그러면 여기 사람들 다 얕잡아 봐.”

어쩜 저 생각조차 회귀 전 나와 비슷할까. 아무리 봐도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나 역시 회귀 전에는 굳이 평판이 나쁜 사람의 편을 들지 않았다. 평판 나쁜 사람과 엮여 봤자 좋을 것도 없고, 내 말 하나로 인식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 저한테 좋게 돌아오지 않겠어요?”

“…싱겁긴.”

“저도 마냥 무른 사람은 아니에요. 진짜로 좋은 면을 봤다면 그걸 더 강조하려는 거지, 안 그런 사람을 옹호할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전 누가 선배님에 대해 물어보면 망설임 없이 바로 멋진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어쭈, 얘 봐라?”

김민영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표정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아, 이걸 아직 얘기 못 했네. 이번에 조연 역할에도 아이돌이 캐스팅됐대. 그것도 오디션 통해서.”

“주연도 아니고 조연인데요? 신기하네…….”

“그치? 나도 의외라고 생각했어. 게다가 소속사도 대형이던데.”

“대형 소속사인데 조연을 오디션 보고 들어왔다… 대단하네요.”

“응. VM이래. 예전에 너 있던 소속사지?”

“네?”

VM에서 연기를 할 사람이라면, 오재성밖에 없다. 루카스는 애초에 연기에 뜻이 있는 멤버가 없었고, 포커즈의 다른 멤버들 역시 가수 연습생만 한 놈들이다. 내가 놀란 이유는, 원래 회귀 전에는 오재성이 출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아이돌보다는 배우에 야망이 있던 인간이야.’

이제 대형 소속사 아이돌로 회귀했으니 못다 한 연기의 한을 풀 생각인가 보다.

“마침 저기 오네.”

“안녕하세요, 오재성입니… 어?”

“둘이 아는 사이… 아, 넥스트 레벨 같이했구나.”

오재성 역시 내가 합류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반응이다. 잠시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곧장 표정을 싹 바꿨다.

“안녕하세요, 오재성입니다.”

“반가워요. 김민영입니다.”

“안녕하세요, 크리드 문승빈입니다.”

평범한 악수였지만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김민영도 짐짓 눈치챘는지 내 얼굴을 한 번 보다가 오재성을 향해 눈짓했다. 나는 멋쩍게 웃어넘겼다. 어색한 분위기를 깬 것은 유현재의 등장이었다.

“뭐야, 내가 넥스트 레벨 촬영장에 잘못 온 줄 알았네?”

“오랜만이에요, 형.”

“여주인공이 추천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게 너일 줄은 몰랐네.”

“저도 남주인공이 형인 줄은 몰랐는데.”

안 그래도 무섭게 생긴 사람이 정색을 하고 말하길래 살짝 움찔했지만, 금세 특유의 시원한 입매를 올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승빈 스쿨 빚, 여기서 갚아야겠네?”

“에이, 그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어요?”

“승빈… 스쿨?”

김민영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으로 나와 유현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오재성은 이 자리가 불편한 듯 몇 번 곁눈질하다가 아예 대본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 별건 아니고 제가 얘한테 갚을 게 있어서요.”

“완전 개차반은 아닌 거 같네요? 은혜 갚을 줄도 알고.”

둘 뒤로 호랑이와 사자가 보이는 듯했다. 생글생글 웃는데 한마디도 지지 않아서 절로 긴장감이 오갔다. 그럼에도 서로 흥미로워하는 게 느껴졌다. 그걸 어떻게 아냐면, 저 둘이 나 볼 때 딱 저 눈이거든.

뒤이어 다른 주조연 배우들과 작가, 감독이 들어왔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정 감독은 아이돌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쩌다가 주인공과 조연 그리고 카메오인 나까지, 온통 아이돌로 캐스팅한 거지?

“좋은 작품 만들어 봅시다.”

아니나 다를까, 안광이 없는 얼굴이었다. 짧은 인사를 끝으로 본격적인 대본 리딩이 시작됐다. 김민영과 유현재가 연기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니 낯설었다. 역시 본업을 할 때 사람이 달라 보이는 건가? 유현재는 가수가 본업이긴 하지만 곧 배우가 본업이 될 테니 틀린 말도 아니다.

나는 유현재의 친구 중 하나인 ‘태주’ 역할을 맡았다. 총 3편에 출연하는데, 분량을 다 합쳐도 10분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조금 특이했던 것은, 비중이 정말 적은 배역임에도 충분히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캐릭터라는 것이다.

보통 이런 작은 배역은 감초 역할을 위해 코믹하거나 가벼운 캐릭터인데, ‘태주’는 아니었다. 무뚝뚝한 서브 남자 주인공 ‘영훈’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고, 밝아 보이는 외면과 반대되는 불우한 가정 형편으로 전학을 간다는 서술 하나로 퇴장하는 캐릭터다. 회귀 전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잘 살린다면 더 큰 존재감을 줄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의 대본 리딩이었다. 회귀 전에는 익숙했던 장소지만, 회귀하고 벌써 1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났다. 배우들의 열정이 느껴지는 대본 리딩 현장에 들어오니 다시 숨어 있던 연기에 대한 열정의 불이 지펴지는 기분이었다.

[영훈, 전학가는 태주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잘 지내고. 연락 자주 할게.”

“…그래.”

그때 무슨 배짱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대사를 한마디 덧붙였다.

“아쉽다. 너 좋은 애니까 앞으로 더 좋은 친구들 사귈 수 있을 거야.”

저절로 목소리가 떨려왔다. 이미 눈가에 눈물도 고인 상태였다. 짧은 장면이었지만 영훈의 고민을 들어주고, 영훈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장면도 있었다. 서브 남주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한 태주가 뜻하지 않게 전학을 가게 된다면 분명 크게 아쉽고 슬퍼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영훈의 유일한 친구였다는 것으로 보아 태주는 공감 능력도 높고,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인사를 눈물 없이는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친구 해 줘서 고마웠다.”

유현재도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애드리브를 이어 갔다. 한동안 정적이 오갔다.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누가 보면 주연인 줄 알겠어요, 승빈 선배.”

오재성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거렸다. 김민영도 자리에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대본에 메모를 해서 보여 줬다.

[뭐 잘못 먹었어?]

“잠깐 카메라 꺼 주실래요?”

정 감독의 촬영 중단 요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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