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녹화를 모두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여느 때와 같이 퇴근 준비를 하는데, 김민영이 나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 있어요?”
“뜬금없긴 한데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너, 연기할 생각 있어?”
“연기요? 갑자기요?”
“연기 배워 본 적 없어?”
“정식으로는요……?”
“내가 이런 말 잘 안 하는데, 너 연기에 소질 있어 보여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일단 김민영의 말대로 절대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연기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 놀라웠다. 내가 연기한 걸 본 적 있었나?
“기회가 온다면 도전해 보고 싶은 분야이긴 해요.”
“그럼 내가 너 추천해도 된다는 말이지?”
“무슨 추천…….”
“‘파아란’이라고 내가 이번에 새로 들어가는 드라마인데, 카메오로 괜찮은 친구 있으면 추천 좀 해 달라고 하는데 네가 하면… 잘할 거 같아서.”
‘파아란? 벌써 그게 나올 시기인가?’
하마터면 김민영에게 절이라도 할 뻔했다. 이런 일생일대의 기회를 물어다 주다니! ‘파아란’은 오랜 시간 가뭄이었던 한국 학원물에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었다. 하이틴 드라마의 정석으로 불리면서 지상파 최대 시청률을 기록했고, 출연진들은 그해 가장 유망주로 떠올랐다. 특히 유현재가 이 드라마에 서브 남주인공으로 나오면서 꾸준히 상승세던 인기가 정점을 찍었다.
게다가 정재필 감독의 작품이다. 이번 기회에 형과의 관계가 개선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생겼다. 아이돌 연기자에게 가지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 회귀 전의 내가 그랬듯이.
“비록 큰 역할은 아니지만, 생각 있으면 얘기해 두게.”
“역할의 크기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이런 좋은 기회 제안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그럼 일단 말해 둔다? 소속사에서도 오케이 해야 하겠지만.”
“네. 고마워요! 누나!”
“누나 소리를 다 하고, 징그럽다, 야-”
‘설득의 힘 미션창은 또 안 뜨려나…….’
“유현이 형, 만약에 제가 연기한다고 하면 어떨 거 같아요?”
“연기? 갑자기?”
“그냥 궁금해서요-”
“글쎄다- 최소 3년은 있다가 하지 않을까? 우리 소속사, 겸업에 예민하잖아.”
“아…….”
내 말빨만으로는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빨리 설득의 힘 미션이 뜨길 물 떠 놓고 빌어야지. 물론 안 되면 직접 부딪칠 각오는 되어 있다. 이걸 놓칠 수는 없지.
* * *
“역시 컴백은 컴백이다…….”
정연은 알림창을 확인하고 무의식적으로 감탄했다. 분명 컴백 첫 주인데 벌써 떡밥이 밀렸다. 하나 보고 나면 다른 콘텐츠가 떠 있고, 예능 하나 보고 오면 다른 예능 소식이 들려왔다. 게다가 자체 콘텐츠까지 멈추지 않고 나왔다.
[본인등장 나오네?]
[ㅁㅊㅋㅋㅋㅋㅋㅋㅋ나 지금 떡밥 먹다가 체할 거 같음]
[썸네일 ㅈㄴ귀엽네;;]
‘본인 등장’은 스타들이 각종 포털 사이트와 sns, 커뮤니티 등에 올라온 질문과 댓글을 직접 읽어 보고, 반응을 보여 주는 콘텐츠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란 콘텐츠는 다 물고 온 크리드가 역시 효자라며 흐뭇한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본 투 샤인! 본인 등장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크리드입니다!”
다양한 반응과 댓글에 성심성의껏 답변하고 반응하는 크리드 멤버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문승빈과 강도현은 과거 VM 연습생으로 인연이 있어서 구VM즈로 불린다…….”
-VM관련 언급은 알아서 지워주지;;
-구VM즈 진짜 오랜만에 듣넼ㅋㅋㅋㅋ
-둘 연습생 시절 썰도 듣고싶은데ㅠㅠㅠㅠ
“음, 저희가 멤버들 사이에서 불리는 조합명이 있거든요?”
“엥? 멤버들이 지어 준 조합도 있었나?”
-도현이랑 승빈이 조합이 더 있었어?
-최초공개인가봄;;
└본인등장 최고의 콘텐츠로 임명합니다.
“투닥즈요. 하도 투닥거려서…….”
“맞아요. 쟤네 엄~청 싸워요! 둘이 한마디를 안 져.”
[보통 누가 시비를 걸어요?]
“아, 당연히 승빈이가-”
“말할 것도 없이 강도현이죠-”
[두 분 말이 다른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둘이 서로 고르는거 왜이렇게 웃김ㅋㅋㅋㅋㅋㅋㅋㅋ
-잘생긴애들끼리 투닥거리는거 최고다…
-두분 뭔만한 합의 바랍니다
“참 나, 누구도 내가 먼저 시비 걸 거라고 생각 안 할걸?”
“하, 클로버가 승빈이의 실체를 알아야 하는데!”
[이래서 투닥즈라는 거죠?]
지운이 형이 해탈한 미소로 답했다.
“네…….”
“쟤네 둘 보면 가끔 재봉이보다도 동생인 거 같아요.”
“형, 그건 아니죠!”
“형, 그건 아니죠!”
유현이 형이라고 해도 이건 선 넘었다며 씩씩거리는 승빈이가 무섭기는커녕 귀엽기만 했다.
“와, 보셨죠? 둘이 똑같이 말하는 거?”
“서로 비슷하다고 하면 기겁하는데, 실은 영혼의 쌍둥이예요.”
“맞아요, 제가 봤을 때는 그냥 동족 혐오예요, 쟤네.”
“자, 다음으로 넘어갈까요? 승빈이가 지운이 낳았나요?”
“아, 미쳤다.”
“이거 크리드 멤버가 쓴 거 아닌가요? 정확하게 보셨는데요?”
질문이 모두의 취향을 저격한 건지, 둘만 빼고 나머지 멤버들이 자지러질 듯 웃었다. 특히, 선우는 하도 웃으며 옆을 치느라 옆에 앉은 도현의 어깨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와, 진짜 너무 웃어서 목 아프다.”
“저는 진짜 가끔 승빈이가 지운이 형 보호자인 거 같아요.”
“맞아, 분명 지운이 형도 엄청 성숙한데, 승빈이는 형을 무슨 유치원생 보듯이-”
“과보호 장난 아니라니까요?”
정연도 가끔 비하인드 영상을 볼 때마다 들던 생각이었다. 승빈이가 최애였기에 승빈이를 집중해서 보다 보면, 항상 그 시선의 끝에는 십중팔구 지운이가 있었다. 특히 조금이라도 위험한 액션을 하거나 격한 안무를 출 때는 그 정확도가 더 높아졌다. 멤버들의 표현이 정확했다. 무슨 물가에 내놓은 애 보듯이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당사자에게 해명을 좀 들어 볼까요, 승빈 씨?]
“아니, 과보호라뇨.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너 지난번에 지운이 형 리허설하다 한번 삐끗할 뻔했을 때 거의 뭐 달리기 선수처럼 달려갔잖아.”
“그건- 형이 예전에 다친 적이 있으니까 그랬지.”
“그러기에는 그전에 투마월 때부터도 그랬어.”
“맞아, 맞아.”
“사실 저도 좀 형한테 유별난 거 같기는 해요. 딱 형이랑 재봉이한테 그러는데, 둘이 좀 다른 느낌으로?”
[어떻게 다른가요?]
“음… 사실 재봉이도 서바이벌 때 크게 다칠 뻔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저랑 도현이가 재봉이를 구해 줬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재봉이는 진짜 부모의 마음으로 걱정하는 거고-”
“뭐예요, 형. 저 갑자기 감동 받게-”
-뭐야, 재봉이 왜 다칠뻔했지??ㅠㅠㅠㅠㅠ
-투마월 ㅅㅂ 진짜 가지가지했네
-승빈이랑 도현이가 구해줬다니..... 역시 한팀이 될 운명이었나봐ㅠㅠㅠㅠ
“그럼 지운이 형은?”
“형은 뭔가 잘 티를 안 내서 더 지켜보게 되는 거 같아요. 힘들거나 아파도 진짜 아무한테도 얘기를 안 하거든요.”
“와- 맞아. 지운이 형, 진짜 포커페이스 장난 아니야.”
-하....... 지운이 왜 이렇게 빨리 철들었냐ㅠㅠㅠㅠㅠ
-근데 나도 지운이가 제일 아픈 손가락임ㅠㅠㅠㅠ
-지운아 혼자 참지마ㅠㅠㅠㅠ
-승빈이가 진짜 세심하네ㅠㅠㅠㅠ
-문승빈 너도 티 좀 내라고ㅠㅠ
실시간 채팅창이 온통 눈물바다였다.
“아니, 근데 이건 승빈이도 마찬가지야.”
“맞아, 그런 점에서 또 둘이 비슷하지.”
“둘만 애틋할 수 없으니까 이제 우리가 더 쳐다보자.”
“그래, 그러자!”
-결론이 왜 그렇게 나는 건데ㅋㅋㅋㅋ
-하여간 도현이 진짜 귀여운거봨ㅋㅋㅋㅋ
-무거워질 뻔했는데 분위기 확 바꾸는거 넘 자연스러웠고~
이후로도 여러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따로 답변자를 정하지 않았음에도 모든 멤버가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의 정보를 수정하고 덧붙였다. 크리드의 끈끈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콘텐츠였다.
* * *
레디 활동 이후 오랜만에 마주하는 팬 사인회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다양한 팬분들이 찾아왔다. 프롬 킹 콘셉으로 할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프롬 퀸 왕관과 드레스를 입고 온 팬도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우는 팬이 있었다. 지운이 형의 팬인 거 같은데, 분명 지난번에도 종이비행기를 손에 쥐고 울었던 거 같은데, 오늘도 같은 모습이었다.
‘데자뷔인가……?’
“저 앞으로도 좋아해 줄 거라고 해 주셔서 감사해요…….”
팬에게 휴지를 건네면서 지운이 형의 눈시울도 붉어져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종이비행기와 관련된 특별한 인연이 있어 보였다.
“승빈아, 안녕~”
“어? 누나, 안녕하세요-”
이번에도 팬 사인회를 찾아 준 문스트럭이었다. 지난 활동에도 모두 출석했던 그녀였기 때문에 예상은 했지만, 오랜만에 만나서 더 반가웠다.
“지난주에 사전 녹화 하루밖에 못 가서 아쉬웠어-”
“이번 주에는 다 올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부적 하나 그려 드릴까요?”
“완전 고맙지!”
회귀 전에도 느꼈지만 나란 사람에 대해 궁금한 점도, 기대하는 점도 많은 사람이다. 매번 보면 더 궁금할 것도 없을 텐데 항상 새로운 질문을 하는 게 신기했다. 오늘은 또 어떤 걸 물어볼까 내가 더 궁금하기도 했다.
“오늘도 뭐 가지고 왔죠!”
“별거는 아니고… 이거!”
“이게 뭐예요?”
“심박수에 따라서 움직이는 귀!”
강아지 귀 같아 보였는데 머리 위에 써 보니 정말 빙글빙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이거 어떻게 멈춰요?”
“심박수가 일정해지면?”
빙글거리는 귀를 멈추려고 의식하자 더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민망함에 고개를 숙였다. 귀엽다는 팬들의 외침에 평정을 찾아 보려 했지만 움직이는 귀 때문에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누나한테 전 이제 완전 강아지죠?”
“미안… 근데 네가 어느 정도 강아지 같아야 내가 과몰입을 안 하지!”
“제 잘못이네요?”
“그렇게 되나?”
“앞으로는 고양이처럼 굴어야겠다.”
“승빈아, 누나는 사실 고양이파야. 그럼 더한 걸로 가져올 수도 있어-”
회귀 전부터 합치면 거의 5년을 알고 지내서 그런지 티키타카에도 어색함이 없었다.
“이번 활동 준비하느라 너무 고생 많았고! 이건 목에 좋은 건데 잘 챙겨 먹어-”
“고마워요! 이번 활동도 열심히 노래할게요. 계속 응원해 줘야 해요!”
“당연하지-”
사인을 먼저 하고 ‘To. 문스트럭’을 쓰려다가 마음이 바뀌었다. 사인을 하다 멈춘 내가 의아한지 문스트럭이 물었다.
“왜? 뭐, 문제 있나……?”
“근데 누나 이름이 뭐예요?”
“응?”
“생각해 보니까 맨날 문스트럭으로 사인했었는데, 오늘은 누나 이름으로 해 주고 싶어서요. 모든 활동마다 봤는데 아직 이름도 모르잖아.”
“아…….”
생각해 보니 회귀 전에도 ‘샤이닝문’이라는 이름으로만 사인을 받았다. 아이돌 활동이 끝나고 배우 활동하면서는 팬 사인회와 같이 직접 팬을 대면하는 기회가 적었다. 그래서 이름을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꼭 알고 싶었다. 모든 기억이 사라진 후에도 나의 팬이 되어 준 고마운 사람이니까.
“혜진이야, 박혜진.”
“혜진 누나… 됐다!”
“고, 고마워.”
“우리 이제 좀 더 친해졌다! 맞죠?”
“응, 고마워…….”
혜진의 고개가 점점 떨궈지더니 어깨가 들썩였다.
“왜 울어요~”
처음 보는 모습에 깜짝 놀랐지만, 지운이 형이 옆에서 휴지를 챙겨 줬다.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팬 매니저의 안내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윤빈 형이 시선을 끌어서 시간을 벌어 줬다.
“진짜 오래오래 좋아할게. 고마워.”
“제가 더 고맙죠, 다음에 또 봐요!”
오랫동안 가졌던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