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잠시 의상 변경과 헤어 메이크업을 수정받는 시간 동안 다른 멤버들이 팬들과 시간을 보냈다. 이제 데뷔한 지 1년이 되어 간다고 팬들 앞에서 전처럼 긴장하지 않는 것이 기특했다. 세트장 설치가 끝나고 승빈과 지운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단정한 교복을 입고 나온 모습에 문스트럭 K는 환호했다. 처음 보는 하복 스타일링에 주변 클로버들도 오늘 스타일링이 레전드라며 감탄했다.
“하복 어때요?”
“잘 어울려~”
“저희 맨날 동복만 보여 드렸던 거 같은데!”
“맞아!”
“뭔가 여름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하복으로 준비했어요, 잘했죠?”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양쪽으로 살랑이며 물어보는데,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문스트럭 역시 딱 소리가 나게 이마를 치더니 옆에 있던 K에게 주접을 늘어놓았다.
“어떡해? 승빈이 강아지 아님? 나 지금 당장 무대 난입해서 잘했다고 머리 X나 쓰다듬어 주고 싶어…….”
호들갑을 떨며 온갖 수식어로 승빈을 앓는 문스트럭과 달리 K는 지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딱 한마디 했다.
“지운이 다리 이 메다임.”
주접 스타일도 정반대인 둘이다.
“네! 하복이 잘 어울리는 남자 두 분, 녹화 시작할게요~”
“저분도 나중에 예능 피디 하면 잘할 거 같지 않아? 너무 웃겨-”
산뜻한 기타 연주와 함께 [Goodbye My Youth]가 시작됐다. 첫 파트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던 승빈의 파트였다.
[내 청춘의 책을 펼치면
분명 첫 페이지에 담길
너의 이름을 쓰다 지워]
부드럽고 맑게 시작한 첫 파트에 모두 숨을 죽이고 무대에 집중했다.
[아마 너는 모를 테지
그래도 상관없어
너의 청춘을 동경했던
그 순간만으로도
내 모든 페이지는
아쉬움 없이 채워졌는걸]
문스트럭이 승빈의 노래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사 한 소절도 그냥 흘려 보내지 않기 때문이었다. 가사에 몰입하는 집중력이 마치 배우가 연기에 몰입하는 것 같았다. 그저 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노래 속에 들어가 3분 동안 짧은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무대마다 느낄 수 있었다.
[나조차도 몰랐던
내 모습이 언제나
네 앞에서는 부끄럼도 없이
자꾸만 튀어나왔지
숨길 수 없는 재채기처럼]
두 손으로 마이크를 쥔 지운이 두 눈을 감고 다음 파트를 이어 불렀다. K는 미동도 없이 지운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눈 깜빡이는 것도 잊은 듯 몰입하는 모습은 문스트럭도 낯설 정도였다.
[서툴기만 했던 나의 Youth
너는 내 청춘의 모든 것
너무 아쉽지만 이젠
웃으며 보내 줄게
Goodbye My Youth]
승빈이 옅게 웃으며 부르지만, 어딘가 아련함이 담긴 눈빛이었다. 정말 첫사랑을 보내는 영화 주인공을 보는 기분이었다. 기억 조작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팬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려는 승빈을 보며 문스트럭은 생각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있지도 않은 첫사랑이 떠오르는 건 왜지?’
둘 다 하얀 피부에 청순한 스타일링 때문에 한국인들이라면 환장할 첫사랑 이미지에 찰떡이었다. 분명, 이 무대가 공개되면 소소하게 인기몰이를 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중에 첫사랑 역할 해도 잘 어울릴 거 같아.’
이미 머릿속으로는 승빈이 국민 첫사랑이 되어 온갖 광고와 작품을 섭렵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
[진심으로 고마웠어
용기 내지 못해 말 못 했지만
떠올리기만 해도
웃을 수 있는 소중한
기억을 내 청춘에
남겨 줘서 고맙다고
Goodbye My Youth]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가사와 타이밍이 맞게 빛이 들어왔다. 승빈의 홍채는 유독 밝고 맑아서, 빛을 받으면 눈물이 맺힌 것 같은 착시 효과를 일으킬 때가 있는데, 지금이 딱 그 순간이었다. 미남이 가장 잘생겨 보일 때가 눈물을 보일 때라고 믿는 문스트럭에게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지운과 가사를 주고받는데 둘의 목소리도 잘 어울렸다. 승빈의 부드러운 음색과 지운의 유니크한 톤이 만나서 포근하면서도 청량한, 여름밤이 떠오르는 음색 합이었다.
[이제는 내 비밀 일기장에
몰래 적어 보는 이름
순간의 기억으로 나는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고마웠어 My Youth]
엔딩은 책상 위에 있던 메모지로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팬석을 향해 던지는 것으로 끝났다. 팬들은 종이비행기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기적적으로 아직 무대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해 멍때리고 있는 K의 가방 속으로 종이비행기가 들어갔다. 그녀의 가방 속으로 손이 몰렸지만, 문스트럭은 친구를 대신해서 가방을 사수했다. 사실 저게 승빈의 비행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조금 있었다. 물론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 문스트럭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빈의 비행기를 갖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야, 정신 차려 봐!”
“어? 어. 왜?”
“지금 네 가방으로 반포자이가 들어갔다고!”
“응?”
황급히 가방을 확인한 K는 돌연 눈물이 터졌다. 종이비행기를 노리려고 달려왔던 팬들도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하는 K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죄,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울지 마세요…….”
“지운이 최애세요? 안 가져갈게요, 울지 마세요-”
안절부절못하는 팬들과 오열하는 K에 문스트럭은 이를 꽉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앞으로 최소 10년은 우려먹을 놀림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저 친구가 종이비행기랑 히스토리가 많은 친구라…….’
사전 녹화가 모두 끝나고 퇴장하는 동안 멤버들이 준비한 역조공을 받자마자 함박웃음이 터져 나왔다. K는 여전히 울면서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나랑 같이 파티 가 줄래?]
선물의 정체는 바로 멤버들이 만든 프롬 파티 초대장이었다. 멤버들의 사진을 콜라주처럼 모아 둔 디자인은 키치하면서도 귀여웠다. 하이틴 콘셉에 찰떡인 프롬 초대장이었다. 멤버들이 멘트 하나하나 직접 쓴 건지 글씨체로 맞추는 것도 재미있었다.
“재봉이 진짜 악필이구나…….”
“승빈이랑 유현이는 완전 어른 글씨체인데?”
“윤빈이 글씨 큼지막한 거 봐-”
[이거 먹고 행운 가득한 하루 보내기!]
그리고 초대장과 함께 준 것은 클로버 그림이 그려진 쿠키와 바닐라라테였다. 요즘 인기가 많은 디저트 가게 쿠키를 고른 것도 센스 있었다. 큰 걸 준비 못 해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메뉴 선정 하나에도 신경을 쓴다는 것이 기특했다.
“그래도 애들이 이런 거 하나하나 신경 쓰는 거 너무 좋다.”
“그니까. 이게 필수는 아니지만 적어도 새벽부터 응원 오고, 컴백이라고 식사에 디저트까지 서포트 넣어 주는 팬들 생각하면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 줘야지-”
“하긴, 이번에 어떤 그룹 역조공 막 주다가 욕 엄청 먹었잖아.”
“거긴 진짜 너무 했었어-”
“맞다. 너, 가방 확인해 봐. 지운이 거 같긴 했는데 혹시 승빈이 거면…….”
“너, 그래서 막아 준 거지!”
“아, 일단 열어 봐-”
K의 가방 속 비행기는 차지운의 비행기였다. 편지로 만들어진 비행기였다. 편지 한 줄을 읽을 때마다 우는 K를 달래느라 문스트럭은 진땀을 뺐다.
“야, 그만 좀 울어-”
“지운이는 끕, 운명이야아, 평생 좋아할 거야으어앙…….”
“그래그래, 나랑 오래오래 크리드 해야지.”
“코어, 개XX야 흡, 크리드 정식 그룹 흑, 시키라고오…….”
여전히 K가 웃겼지만, 저 말에 잠시 울컥했다. 이렇게 느껴 본 적 없는 행복을 주는 그룹을 겨우 몇 년밖에 볼 수 없다니. 매 활동 너무 행복해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마주하는 기분은 언제나 불편하다.
“그래도 지운이 계속 좋아하면 되니까-”
자신 역시 크리드가 끝나도 승빈을 끝까지 응원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승빈이라면 가능할 거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 * *
컴백하면서 오랜만에 뮤직 쇼 MC 대기실을 찾았다. 리얼리티 촬영과 컴백 준비로 인해 거의 한 달 만에 다시 온 뮤직 쇼 현장이었다.
“나는 너 MC 그만둔 줄 알았다.”
먼저 도착해 있던 김민영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핀잔을 줬다.
“선배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사이에 많이 떴더라?”
“에이- 그래도 선배님만 하겠어요?”
“외국물 먹더니 더 능글맞아진 거 같은데?”
김민영의 투박한 말투도 오랜만에 들으니까 반가웠다. 말은 저렇게 해도 제이드 쇼 후기를 아주 장문으로 보내 줬다. 물론 매니저 형을 통해서였다. 그것마저도 공과 사가 철저한 김민영다웠다.
“지난번에 메시지 보내 주신 거 진짜 감동이었어요. 얼굴 보고 꼭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네요.”
“내가 아는 사람이 제이드 쇼 나오니까 신기하긴 하더라.”
“저도 아직 얼떨떨해요.”
“지금까지 얼떨떨한 건 문제 아니야?”
“문득 눈뜨면 다 꿈일 거 같은 느낌?”
“볼이라도 한번 꼬집어 주리?”
“…선배님은 정말 꼬집으실 거 같아요.”
저런 말을 하면서도 포커페이스라 대체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감도 안 잡혔다. 하지만 오랜만에 봐도 이렇게 편안할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긴 했다.
“오랜만에 한다고 실수하지 말아라.”
“안 그래도 저 대신 스페셜 MC 해 주신 분들이 너무 잘하셔서 긴장했잖아요.”
“자리 뺏길까 봐?”
“네. 다들 쟁쟁하시던데요?”
“…그래도 네가 제일 나아.”
“네?”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였지만 정확하게 들었다. 정확하게 듣고도 의심하게 만드는 내용이었지만 말이다.
“됐어, 얼른 연습이나 해라.”
의외인 모습도 잠시, 언제나처럼 프로다운 모습으로 대본 리딩을 마쳤다.
컴백 무대는 이미 사전 녹화를 마쳤기에 바로 MC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이번 주 뮤직 쇼 콘셉은 바로 테니스복. 상큼한 노란색 테니스복을 입고 머리에는 헤어밴드까지 했다. 헤메코까지 완료하고 나서 오랜만에 마주한 뮤직 쇼 스태프분들에게 미국에서 사 온 선물을 나눠 드렸다.
“뭐 이런 걸 다 사 왔어-”
“저 버리지 말아 달라는 뇌물이랄까요?”
“어머, 얘 능글맞아진 거 봐.”
“우리는 문 MC만 기다렸지-”
한 분 한 분 직접 적은 카드와 함께 직접 포장한 선물이었다. 정신없이 바빴지만, 오랜 공백을 기다려 준 분들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 표현이었다.
“정말요? 저 진짜 한국 오자마자 컴백할 줄 알았는데, 안 불러 주신 줄 알았잖아요.”
“뮤비 찍느라 미국 또 갔다며, 나왔다 안 나왔다 하면 더 그럴까 봐 그랬지.”
“진짜죠? 저 최장수 MC 기대해도 되는 거죠?”
“그럼, 승빈이 성인 되면 기념 회식도 해야지.”
1년 지나면 개편과 함께 칼같이 MC가 바뀌는 곳이기 때문에 저 말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어디 한번 최초의 연임 MC 노려 보자고.
“이번 주 컴백 스타, 크리드,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본 투 샤인! 안녕하세요, 크리드입니다!”
컴백 주마다 MC 겸 컴백 가수가 되는 것도 MC의 묘미 중 하나였다.
“이번 타이틀곡 ‘Ideal’ 곡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희 팀 곡 소개 담당이 승빈 씨잖아요-”
나는 곧장 능청스럽게 크리드의 문승빈으로 자아를 갈아 끼웠다.
“네~ 저희 타이틀 곡 Ideal은 하이틴 감성 가득한 콘셉과 경쾌한 멜로디가 돋보이는 팝 댄스 장르의 곡으로 너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의 이상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오~ 이제 다시 MC 승빈으로 돌아와 주세요!”
이거 진짜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 아니 바쁘다 바빠 문승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