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다들 황당함에 말을 잃었다. 유현이 형이 저렇게 표정 관리 안 되는 건 나도 처음 보는 광경이라 신기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어도 당장 핸드폰 꺼내서 찍었을 거다. 지금 이 공간을 가득 채운 정적이 깨질 기미가 안 보여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미국 현지 진출을 말씀하시는 거죠?”
“역시 승빈 군만 말이 좀 통하네.”
“…….”
말이 통해서 답을 한 게 아닐 텐데 말이다. 듣고 싶은 대로만 듣는 것도 저 정도면 능력이다 싶었다. 저래야 저런 위치에 올라가는 걸까, 아니면 저런 위치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다 저런 걸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수준의 난제였다.
“최대한 지원해 줄 테니까 빨리 앨범 만들어서 진출하자고.”
미국 진출? 좋다 이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우리의 위치는 아직 라이징이고, 한국에서도 크리드보다 더 잘나가는 아이돌이 여럿이었다. 더군다나 급하게 만들어서 될 앨범도 아니고 말이다.
‘미국 진출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나.’
귀국길에 그 엄청난 인파를 경험하고 간단히 찾아보니, 토스맨 사건으로 인해 씨넷 주가도 며칠간 폭등했다는 기사를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 여파가 큰 듯했다. 여기까지 직접 걸음하셔서 이런 개소리를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어쩐지 기사 타이틀이 다 씨넷 붙여서 나가더라.’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지금 씨넷이 아니라 코어 엔터테인먼트 소속이지만, 씨넷에서는 계속 씨넷 소속 크리드라고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주가 상승을 위한 일종의 언플이었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다 하려고 했는데, 이런 식이면 좀 곤란하지.
“저희도 미국 진출하면 좋죠.”
“그렇지? 역시 빠릿하다니까?”
“근데 지금은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이르긴 뭐가 일러? 반응 올 때 바로 진입해야지!”
“저희가 정말 운 좋게 예상치도 못한 관심을 받기는 했지만, 그건 아직 신기함이나 호기심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한 건 좋지만, 제이드 쇼까지 나갔는데 그건 지나친 겸손 아닌가?”
하, 좋게 좋게 설득하려고 했건만 역시 제대로 미국 병이 걸린 상태였다. 몇 년간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정말 지겹도록 마주했다. 아주 작은 기회를 보고 기적을 기대하는 사람들. 낙관적이라고 해야 할지 긍정적이라고 해야 할지.
물론 기회를 잡는 건 중요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관심에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됐다. 뱀파이어 스타일링이 잠깐 화제 됐다고 주구장창 스타일링에만 집착하던 YJ 엔터가 그랬고, 잠깐 비주얼로 관심받으니까 배우 하겠다고 설치던 오재성은 또 어땠는가.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 끝나는 게 연예계였다.
“하지만 본부장님, 에잇비트 혹시 기억하십니까?”
다른 그룹의 이름을 거론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강수에는 강수가 필요했다.
“에잇비트?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나?”
참고로 에잇비트는 이 본부장이 씨넷으로 이직하기 전 소속사에서 담당했던 그룹이었다. 넥스트 레벨 때 본부장 설득하려고, 그에 대해 모든 걸 조사했었는데 그걸 여기서 써먹을 줄이야.
“제가 정말 좋아하는 그룹이었습니다. 특유의 청량한 음악이 최고였죠.”
“그랬지, 내가 얼마나 노래 가져오느라 힘들었는데.”
“맞아요. 저도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본부장님이 신의 귀로 유명하셨다고-”
“큼, 큼. 유명하긴 했지 내가-”
사실이었다. 지금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 본부장은 왕년에 마이더스의 손으로 유명했던 사람이었다, 발로 뛰면서 좋은 곡들을 가져오기로 유명한. 지금은 뭐,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지, 망령이 든 건지 모르겠다만.
“청량함으로 대중성까지 잡았던 그룹이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그룹 활동을 그만두셨고요.”
“…….”
“저는 에잇비트가 ‘Destiny’가 아닌 그다음 앨범으로 미국 진출을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왜냐면 미국 진출한 앨범이 제 최애였기 때문이죠. 만약 그걸 한국에서 냈다면 분명 대상도 충분히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그 노래도 본부장님이 고르신 거 맞으시죠?”
“그건 그렇지만-”
“역시 그랬을 거 같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앨범은 다 본부장님 작품이더라고요.”
본부장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지금 얘가 자기를 칭찬하는 건지 까는 건지, 애매하게 헷갈리겠지. 정확하게 내가 노린 그대로였다. 무조건적인 칭찬은 오히려 의심과 반발심만 키울 뿐이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추가, 바로 보상으로 받은 ‘설득의 힘’이었다.
‘설득의 힘 발현.’
“에잇비트의 미국 진출은 사실 실패가 아니라, 시기가 아쉬웠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전략은 완벽했습니다. 노래도 좋았고, 현지화도 완벽했죠. 문제는 외국의 대중이었습니다. 한국 아이돌에 대한 흥미로 관심을 가졌던 그들이었기에, 오히려 현지화된 노래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거죠. 팝적인 거라면 자국 가수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오만함도 일부 있었을 거고요.”
“그니까! 노래 좋았는데 걔네가 이상한 거라니까?”
설득의 힘 덕분일지는 몰라도 본부장의 반응이 한결 더 유해졌다. 예스, 거의 다 왔다.
“그래서 저는 미국 진출을 조금만 미뤘으면 합니다.”
“미루자고?”
“네. 이미 외국에서는 크리드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굳이 우리가 거기 맞출 필요가 없죠. 저희는 저희가 가려던 길을 그대로 가면 됩니다.”
“그 길이 뭔데?”
“퀄리티 좋은 앨범과 콘셉이요. 안 그래도 준비해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거 오늘 말씀드리겠습니다. 오 디렉터님, 혹시 제가 보낸 파일 가지고 계시죠?”
다행히 오늘 회의를 위해 미리 오 디렉터에게 보내 놓은 PPT 파일이 있었다. 참고할 레퍼런스를 정리해 뒀는데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이야. 이러니 내가 좌우명이고 뭐고 유비무환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지.
“이번 앨범은 미국에서의 관심을 이어 가기 위해 제이드 쇼에서 매시업 해서 보여 준 곡을 타이틀로 낼 예정입니다. 그럼 앨범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제이드 쇼를 한 번 더 찾아보게 될 겁니다. 자연스럽게 홍보가 되겠죠?”
“…그렇지?”
“그리고 콘셉은 미국의 하이틴 느낌을 내기 위해 ‘프롬 킹’으로 잡으려고 합니다. 한국 아이돌이 선보이는 미국의 프롬 킹 콘셉은 현지 팬들에게도 흥미롭게 다가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수많은 하이틴 영화로 인해 익숙할 국내 팬들에게도 매력적인 콘셉이고요.”
“제일 중요한 노래는 최대한 이지 리스닝으로 완성할 예정입니다. 가녹음한 샘플이 있는데 이것도 잠깐 들려드릴게요.”
윤빈 형이 급하게 녹음해 둔 파일을 틀었다. 가사만 아직 미정일 뿐, 사실 거의 완곡이나 다름없었다. 노래가 진행될수록 본부장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애써 뚱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으나 쉽지 않은 듯했다. 하이라이트에 가서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씩 리듬을 타는 모양새가 제법 웃겼으나 애써 웃음을 참았다.
“나쁘지 않네.”
“다행이네요. 본부장님 귀에 좋게 들렸다면, 분명 대중적으로 먹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지.”
“지금처럼 모두의 관심이 저희를 향할 때, 가장 대중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만 들어도 쉽게 흥얼거릴 수 있게 말이죠. 팝적인 요소를 넣었지만, 기존의 저희 음악에서 벗어나지는 않는 게 포인트입니다.”
이미 게임은 거의 끝났다. 본부장의 표정만 봐도 다 넘어오고도 남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런 꼰대들은 자기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 여기서 마지막 한 방.
“그리고 이건 전부 본부장님 덕분입니다.”
“내 덕분이라니?”
“전에 넥스트 레벨 때 저희가 자유롭게 무대를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셨잖아요. 그 덕분에 넥스트 레벨 우승하고, 그 상품으로 미국에 예능을 촬영하러 간 거고요. 그렇기에 이런 예상치 못한 행운까지 거머쥐게 된 거죠. 이게 다 본부장님이 만들어 낸 나비 효과입니다.”
게임 오버. 퍼펙트 스코어 달성. 본부장의 입꼬리가 거의 귀에 걸릴 듯했다. 이 인간을 마주한 이래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슬쩍 멤버들을 둘러보니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감탄을 넘어선 질색의 표현이었다.
* * *
한참을 칭찬하던 본부장이 마침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회의실을 떠났다. 다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눈치였다. 아닌 척해도 직위가 주는 힘은 무시 못 할 정도긴 했으니까.
“와, 나는 결심했어, 승빈이랑 친하게 지내기로.”
“지금까지는 안 친했다 이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더 친해져야겠어.”
좀 입이 풀렸는지 조잘거리기 시작하는 선우 형이었다.
“갑자기 왜요?”
“얘는 무조건 같은 편으로 둬야 하는 애야.”
“아, 인정. 문승빈 진짜 세 치 혀로 세상을 뒤집을 인간임.”
“나 아까 본부장한테 얘기하는 거 보고 진짜 말을 잃음.”
“너, 19살 맞냐? 나이 속인 거 아님?”
“그니까. 아무리 봐도 능구렁이 몇 마리는 품고 있는 거 같은데.”
누구 덕분에 지금 이렇게 넘어간 건데, 다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놀리기 시작했다.
“유비무환 몰라요? 저의 철저한 자료 조사 덕분이죠.”
“아니, 에잇비트가 본부장이 만든 그룹이었어?”
“그니까. 나 아까 처음 들었잖아.”
“그때부터 미국 병 걸렸던 거구나.”
“다들 조용. 일단 원래 계획했던 회의를 마저 진행해야지?”
역시 구세주는 우리 유현이 형. 든든하기 그지없는 천생 리더였다.
“맞다, 우리 회의하러 왔지?”
“근데 이미 회의 다 한 거 아냐? 승빈이가 말한 그대로 하면 될 거 같은데?”
“그니까. 아까 본부장한테 브리핑한 거 완벽하던데.”
“하긴…….”
유현이 형마저도 사실 그런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멤버들은 그렇다 치고 오 디렉터님은 왜 옆에서 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계시는 건지.
“일단 기 쫙 빨렸으니까, 맛있는 것 좀 먹고 다시 생각하자.”
“콜! 오 디렉터님도 같이 식사하시죠-”
이 본부장이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아침 먹고 나왔는데 어느덧 벌써 점심시간이 되기는 했다. 나도 한참 긴장한 탓에 체력 보충이 필요하던 찰나였다.
“우리 오랜만에 중국집 거기 시키자.”
“대박. 나 진짜 너무 그리웠잖아.”
“중식은 너무 과하지 않을까?”
“아, 형. 제발여. 한 번만 먹읍시다.”
“그래. 그럼 다음 주부터는 다시 관리 들어가야 하니까, 이번 주까지만 즐기자.”
유현이 형까지 허락했으니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매번 시키던 대로 금세 주문을 마치고, 배달이 올 때까지 간단하게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배달 오기까지 딱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오히려 효율적으로 회의가 진행되는 듯했다.
“이거 방법 괜찮은데?”
“뭐가요?”
“배달시키고, 딱 올 때까지만 회의하기.”
“그러게.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까 늘어지지 않는 거 같아.”
“대신 배고플 때는 안 될걸요?”
“왜?”
“사람이 예민해지니까요!”
정말 재봉이다운 발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