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스포츠 경기에 쓰이는 영어 표현들을 바로바로 한국어로 바꿔 말할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한 골도 넣지 못하고 경기 중단만 벌써 10번째였다.
“우리 그냥 말을 하지 말고 경기할까?”
그러자 귀신같이 최 피디님이 룰을 더했다.
“10초 이상 침묵하면 한 골을 상대방에게 주게 됩니다~”
“귀도 밝아, 진짜-”
“그게 피디의 자질이란다, 승빈아-”
“알겠습니다~”
결국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두 번 생각하고 말하기였다. 그렇다 보니 누가 들어도 부자연스러운 말투로 경기에 임했다.
“유현이 형! 나에게- 그 공을 주지 않으련?”
“선우 형! 왼쪽으로 나한테 전달! 전달해 주시오?”
“말투가 왜 이래?”
고장 난 AI처럼 신명 나게 투닥이는 모습에 최 피디님은 배를 쥐고 박장대소했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스태프도 웃느라 카메라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사정없이 흔들리는 화면이었다.
그렇게 직접 넣은 공은 각자 한 개가 전부였고, 서로가 룰을 어겨서 얻은 점수가 더 많았다. 어느덧 경기의 막바지가 됐고, 9대10으로 윤빈 형의 팀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늘 형이 활약하기 전에 영어를 썼기에 골문 근처에도 가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윤빈 형이 능숙하게 골망을 흔들었다. 그것도 엄청 멋있는 덩크 슛으로.
“10대 10 동점이다!”
“형, 최고예요!”
이렇게 감격에 빠져 있던 때, 우리의 선우 형이 큰 역할을 했다.
“윤빈아, 올해 본 최고의 덩크 슛이었다!”
“…어?”
얼싸안으며 기뻐하던 네 명이 동시에 멈췄다. 그리고 우리 팀은 얼떨결에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지운이 형은 꽁트와 같은 상황에 코트 바닥을 이리저리 구르며 웃고 있었다.
“10대 11, 유현 팀 승리!”
“말도 안 돼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다 말해야지! 윤빈아, 너도 자유롭게 말해!”
막힌 댐이 터지듯 윤빈 형의 입에서 속사포 랩처럼 영어가 쏟아졌다. 사실, 윤빈 형은 초반 실수 몇 번 빼고는 룰을 잘 지켰다. 그래서 더 억울한 모양이다.
“자, 승리 팀에게는 미션에 대한 추가적인 힌트를 주겠습니다. 다들 봉투를 받아 가세요.”
최 피디님이 내민 색종이에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이번 미션은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그 장소에서 미션 포즈와 함께 사진을 찍어 오는 겁니다.”
“여기가 어디인데요?”
“뉴욕의 어딘가겠죠?”
게임에서 이긴 혜택은 더 상세한 주소 정보였다. 정보를 받은 우리는 바로 길 찾기 앱을 사용해서 해당 장소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지하철과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반응이 전날과 확연히 달랐다.
“토스맨에 나왔던 사람 아니에요?”
“네?”
“사진 한번 찍어 줄 수 있어요?”
얼떨결에 사진을 찍어 줬지만, 문제는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블록 갈 때마다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역시 유명 크리에이터 방송에 나와서 알아보는 사람이 있나 봐요.”
“그런 거 치곤 너무 많은 거 같은데…….”
그래도 알아보는 사람들 덕분에 더 편하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다들 토스맨에 나왔다는 것만으로 친근했는지 친절하게 대해 줬으니까.
도착한 곳은 뉴욕의 형형색색의 건물이었다. 그 건물 앞에서 우리는 지정 포즈인 인간 하트를 만들었다. 다른 팀 미션 사진을 봐 보니 우리와는 정반대인 건물 전체가 회색, 검정색인 건물이었다. 주소 정보가 부실해서 우리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는 소식도 받았다.
“모두 미션 수행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그럼 이제 쉬나요?”
“아니요! 두 번째 환장여행 코스로 가야죠!”
“두 번째? 코스?”
곧 우리가 도착한 곳은 상품 진열대가 놓인 휑한 뉴욕 거리였다. 개미 한 마리 지나가지 않을 거 같은 이곳에서 뭘 하라는 건지 짐작도 안 갔다.
“이번 미션은 크리드 최고의 장사꾼을 가리는 미션입니다!”
이제 하다 하다 장사까지 시키는구나-
“최 피디님, 그런 줄 몰랐는데 무서운 분이셨네요…….”
“다양한 경험을 해 보는 거지!”
멤버들 모두 침울한 얼굴로 상품 진열대 뒤에 섰다.
“우리 알아보는 사람은 있을까요?”
“최대한 불쌍한 척이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정확히 20분 뒤, 상황은 예상을 한참 빗나갔다. 아무도 안 올 거 같던 이곳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같이 토스맨 때문에 왔다는 말을 했다. 게다가 물건은 안 사도 되니 돈을 내고 셀카 한 장만 찍어 주면 안 되냐는 부탁도 들었다. 아마 타지에 와서 외국어로 물건을 팔면서 어려워하거나, 웃지 못할 상황을 연출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나조차도 예상 못 한 반전이었다. 장사가 계속 잘되자 강도현이 우스갯소리로 아이돌 말고 장사해도 먹고살겠다는 말을 했다.
“최 피디님! 여기 품절 됐는데요?”
“벌써?”
“네! 물건 더 주시거나, 아니면 철수해야겠는데요?”
“너희 뭐야? 미국에서 왜 이렇게 인기가 많아?”
“저, 저희도 당황스러워요!”
누구도 예상 못 한 반응이었다. 우리는 미국 진출도 하지 않았고, 이렇다 할 해외 활동도 없었는데 단순히 토스맨 영상 하나로 이 정도로 화제가 된다고? 그제야 멤버들과 스태프들도 제대로 SNS 반응을 확인했다.
“쇼츠 영상만 총 5천만 뷰?”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봤다는 거잖아? 너네, 그냥 노래만 조금 부르고 온 거라고 하지 않았어?”
“네! 정말 노래만 하고 왔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우리가 노래만 한 건 사실이니까.
* * *
“제이드 쇼요?”
매니저 형의 말에 멤버들 모두 경악했다. 토스맨 영상이 예상치 못하게 큰 사랑과 관심을 받으면서 소속사에서도 바빠졌다는 소식을 듣긴 했다. 갑자기 미국의 토크 쇼와 음악 쇼에서 섭외가 물밀듯 들어온다고 했지만, 그때까지도 바쁘게 프로그램을 촬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감할 수 없었다. 어쩐지, 길에 지나가도 알아보고 사인과 사진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생기긴 했다. 이게 단순히 재밌는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아니구나, 웃기지만 정작 우리는 그제야 실감했다.
“저희 데뷔한 지 1년도 안 됐고 미국 진출도 안 했는데 그게 가능해요?”
“너희가 촬영 중이라 모르는 거야, 지금 미국에서 제일 인기 있는 영상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제이드 쇼는 토스맨의 콘텐츠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미국의 팝 가수 제이드가 진행하는 토크 쇼다. 이전에는 전설적인 MC 마이크가 진행해서 ‘마이크 쇼’였는데, 후임이 제이드가 되면서 쇼 이름도 ‘제이드 쇼’로 바뀌었다. 이미 마이크가 30년가량 진행을 해 와서 미국 전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토크 쇼이고, 연예인들에게는 성공의 지표와 같은 토크 쇼였다. 그런데 데뷔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고, 무엇보다 미국에서 인지도가 거의 0에 수렴하던 우리가 토크 쇼에 출연한다니?
“제이드도 토스맨 통해서 데뷔한 인연이 있어서 그런가, 출연을 강력 추천했대.”
“생각해 보니 그러네?”
“공연 보러 가길 잘했죠?”
“근데 예능 촬영은 어떡해?”
갑작스럽게 잡힌 스케줄이어서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최 피디님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저건 뭔가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의 눈인데…….’
아니나 다를까, 최 피디님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축하해! 덕분에 우리 프로그램도 엄청 홍보되고 있거든! 그리고 이게 얼마나 재밌는 일이니? 난 미국에 와서 최대한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하길 바랐는데… 너희 진짜 효자다, 얘들아!”
“다행이긴 한데-”
“벌써부터 편집할 생각에 가슴이 막 뛴다, 승빈아!”
하긴, 드라마도 이렇게 진행되면 현실성 없다고 욕먹을 스토리 진행이긴 했다. 처음 얼렁뚱땅 토스맨의 라이브에 참여하면서 걱정이 많았다. 아무래도 단독 행동이기도 하고, 자칫 잘못하면 촬영 중인 프로그램에도 피해를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긍정적으로 새로운 기회를 엿보는 걸 보니, 역시 최 피디님이다.
“하, 내가 그때 따라갔어야 했는데 그게 너무 아쉬워! 현장을 담아야 했는데…….”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아쉬워하던 최 피디님을 보니 문득 타임 스퀘어에 오기 전에 챙긴 캠코더가 떠올랐다.
“이걸 언제 챙겼어?”
“저희 틈틈이 크리데이 찍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챙겨 왔죠!”
“잘했다, 승빈아!”
최 피디님은 나를 번쩍 들더니 빙글빙글 돌기까지 하며 기뻐했다. 역시 운동 예능으로 다져진 힘이 엄청났다.
“승빈아, 뭐 먹고 싶거나 갖고 싶은 거 있어? 오늘은 게임이나 그런 거 없다! 하고 싶은 거 다 해!”
“승빈아!”
“리버!”
“이거 녹음해야 하는 거 아니야?”
“피디님, 지금 카메라 다 돌아가고 있어요! 무르기 없습니다?”
카메라 감독님과 작가님들 모두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은 최 피디님의 말대로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할 수 있었다. 더 놀 수 없겠다고 뻗을 때까지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대망의 제이드 쇼 촬영 날이 밝았다. 멤버들 모두 첫 해외 방송 출연에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웬만하면 긴장하지 않는 유현이 형도 평소보다 굳은 얼굴이었다.
“나 영어 하나도 못 해서 망신당하면 어떡해?”
“걱정하지 마요, 형. 저랑 승빈이가 다 도와줄게요.”
“너희만 믿는다?”
“안녕!”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제이드가 대기실에 방문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소년들이 어지간히 신기했나 보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촬영할 때 긴장하지 말라는 조언까지 해 주고 갔다. 다들 잔뜩 굳어 있다가 친숙한 가수가 등장하니 긴장이 풀린 듯했다.
‘아니, 어쩌면 사실 더 현실감이 없어서 정신을 놓아 버린 걸지도.’
“크리드, 곧 촬영 시작합니다. 대기하세요!”
유현이 형은 우리를 불러모아서 언제나처럼 긴장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덧붙였다.
“기회를 만든 건 우리야, 이제 즐기기만 하면 돼. 알지?”
“물론이죠.”
“지금은 하나도 긴장 안 돼요! 그냥 제대로 즐기고 오면 될 거 같아요!”
우리가 만든 기회를 즐기면 된다- 그나마 남아 있던 긴장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오늘 제이드 쇼의 게스트는 리얼 토스맨이 있는 그룹이죠! 한국에서 온 크리드입니다!”
일부러 ‘리얼 토스맨’을 강조하면서 방청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멤버들도 자연스럽게 웃으며 분위기에 녹아들어 갔다.
“크리드 때문에 이번 주가 아주 시끄러웠어요! 예상했나요?”
나는 침착하게 마이크를 쥐고 답했다.
“전혀요. 우린 그저 재밌는 공연이라고 생각했고, 토스맨이 마이크를 토스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죠.”
“고음이 엄청났잖아요! 나도 노래 좀 하지만 그 곡은 늘… 알잖아요. 음소거 파트인 거.”
“너무 겸손한 거 아니에요? 제이드, 당신은 노래를 좀 하는 게 아니라, 엄청나게 한다고요!”
“아니, 대기실에서 그렇게 떨린다고 하던 사람 맞아요? 너무 여유로운데?”
“제가 실전에 강한 타입이라-”
사실 인터뷰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단지 외국어로 해야 한다는 게 부담이었을 뿐. 하지만 예전부터 가진 생각이 있다.
‘영어는 자신감이지.’
“그럼 화제의 그 영상, 같이 한번 볼까?”
“물론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