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경쾌한 전우치 OST와 함께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선우 형과 유현이 형이 등장했다. 해외에서 한복이라니. 길거리만 걸어도 시선을 사로잡을 게 분명했다. 유현이 형은 시원한 청색, 선우 형은 화사한 노랑색 도포였다. 갓과 부채까지 야무지게 챙겨 온 준비성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이, 이리 오너라!”
“푸하하! 선우 형 지금 사극 말투 쓰는 거예요?”
“조용히 하거라!”
“이 형 완전 과몰입했네.”
“그대들의 언어 사용이 무척이나 자유분방하구나.”
유현이 형은 그대로 사극 촬영장으로 가도 위화감이 없을 비주얼과 연기 톤이었다. 다음으로 쨍한 복고풍 음악과 함께 바가지 머리를 하고, 통 큰 청바지를 입은 박재봉이 등장했다. 버섯 모양인 머리가 찰랑거리며 걸어오는데, 곳곳에서 스태프들이 귀엽다며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재봉은 잠시 부끄러워하다가 칭찬에 자신감이 생겼는지 천연덕스럽게 토끼 춤 스텝을 밟았다.
“저건 또 어디서 배워 온 거야.”
“어린 애가 저 춤은 또 어떻게 알고 춘다니-”
그리고 뒤이어 청청 패션의 왁스로 깔끔하게 머리를 넘긴 지운이 형이 등장했다. 저런 촌스러운 스타일링을 하고도 특유의 까리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말해서 미안하지만, 한층 더 양아치스러웠다. 귀 끝까지 빨개졌지만 나름대로 머리도 쓸어 넘기고 사랑의 총알도 날리는 등 지운이 형으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와… 형, 진짜 수고했어요.”
“나 얼굴이 터질 거 같아, 승빈아.”
그리고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마지막 팀이 등장했다. 비장한 음악과 함께 우주 헬멧을 쓴 둘이 등장했다. 화려하게 팝핀을 추고, 우주인 댄스까지 보여 주는 센스가 빛났다. 그러고는 크로스 자세까지 하는데, 영화 예고편을 보는 기분이었다.
“누가 누구야?”
“헬멧 벗어 봐~”
“이거 콘셉입니다. 누가 누군지 모르겠죠?”
“도현아, 윤빈 형 키가…….”
“아, 선우 형!”
헬멧을 벗은 강도현이 선우 형 쪽으로 헬멧을 약하게 내동댕이쳤다. 그 모습에 멤버들 모두 배를 쥐고 웃었다. 윤빈 형이 강도현을 위로하려는 듯 가까이 다가왔지만, 강도현은 필사적으로 피했다.
“아, 나도 작은 키 아닌데!”
당연하다. 강도현도 180이 넘는데, 거의 190에 육박하는 윤빈 형 잘못이었다 이건. 이번만큼은 나도 강도현 편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자! 모두 준비를 마쳤으니 본격적으로 미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미션은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지 않았다. 주어진 지도에 표시된 장소마다 숨겨져 있는 멤버들과 관련된 숫자를 찾는 게 미션이었다.
오히려 미션을 하는 과정이 더 어려웠다. 길을 걷기만 해도 꼬마들이 달려들어서 사진을 찍자, 간식을 달라, 어디서 하는 촬영이냐…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오는 애도 있었다. 한복을 입은 유현이 형과 선우 형은 그나마 평범한 사진 요구였지만, 우주복을 입은 둘은…….
“으악! 자꾸 때리지 말라니까?”
“이거 진짜 우주복이에요?”
“아오, 형 얘네 뭐라는 거예요?”
“당연히 우주복 아니지~ 근데, 이 손 좀…….”
복고 팀은 미국에선 본 적 없는 독특한 패션이라며 스트릿 사진작가의 촬영 제의까지 받았다. 이런 흑역사는 절대 남겨선 안 된다는 박재봉의 강력한 반대가 있어서 무산됐지만.
내 의상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냥 코스튬 입은 게스트들을 인솔하는 가이드나 MC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움직이다 드디어 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마지막 숫자를 발견했다. 윤빈 형은 아이스크림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반갑게 매장에 들어갔다.
“여기서 아이스크림 자주 사 먹었는데!”
“우와. 알던 곳이에요?”
“신기하다~”
그곳에서 한 직원이 아이스크림 주문을 하려면 미션을 통과해야 한다며 즉석에서 미션을 주었다. 미션은 텅 트위스터였다. 안 그래도 배도 고프고 힘든데 텅 트위스터라니!
“텅 트위스터?”
“그게 뭐예요, 승빈이 형?”
“쉽게 말해서 한국의 간장콩장콩장장 같은거야. 비슷한 발음이나 어려운 발음을 틀리지 않고 하는 거지.”
“큰일이네요?”
“대표로 세 명이 해야 해.”
“하, 딕션이면 래퍼가 해야 유리한데…….”
“미안하다, 승빈아. 내가 영어 울렁증이.”
나는 강도현과 선우 형을 보고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션 문장을 읽던 둘의 혀가 꼬이는 걸 보니 절대 시키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
옆에서 계속 시도하던 박재봉과 선우 형은 당이 떨어진다는 핑계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있었다. 미션은 이미 뒷전인 듯싶었다. 다행히 나와 윤빈 형, 유현이 형이 성공하면서 마지막 숫자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 * *
그렇게 아이스크림집을 마지막으로 미션을 모두 클리어 했고, 수집한 숫자들을 주소에 대입하여 검색하니 산타크루즈가 나왔다.
“우와, 캘리포니아 해변으로 가는 거예요?”
“신난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네~”
잔뜩 신이 난 멤버들을 보며 최 피디님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거봐, 제주도만큼 재밌게 보낼 거라고 했지?”
“빨리 가요!”
최 피디님의 말은 자동으로 음소거 처리되었다. 모두 기대에 가득 차 보였지만, 윤빈 형이 가장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 역시 몇 년 만에 마주하는 캘리포니아 해변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차 안에서 최 피디님이 나와 윤빈 형에게 물었다.
“둘 다 캘리포니아 살았다고 했었나?”
“네. 윤빈 형은 아예 고향이고, 저는 2년 좀 안 되게 지냈었어요.”
“와, 피디님. 그런 것도 알고 계세요?”
“당연하지! 출연자들에 대한 사전 조사는 필수야.”
‘근데 별 의미 없이 미국을 선정했다고?’
어젯밤 대화와는 상반되는 답변이었다. 어쩌면 어제 내 말을 듣고 급하게라도 조사를 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1시간쯤 달렸을까, 드디어 산타크루즈 해변에 도착했다. 드넓게 펼쳐진 푸른빛 바다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익숙한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제부터는 자유 시간입니다. 카메라는 돌아가지만, 마음껏 즐겨 주시면 돼요.”
이제는 거울보다 카메라가 익숙한 우리였기에, 진짜 자유 시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환상적인 풍경에 다들 기대감이 가득했다.
점점 노을이 지는 시간대여서 하늘은 주황빛과 보랏빛으로 뒤섞이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파도 소리.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나와 윤빈 형은 가만히 눈을 감고 파도 소리에 집중했다. 형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마른세수를 하며 숨을 토해 냈다. 언뜻 보니 두 눈이 물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이야.”
하긴, 데뷔 후 휴가 기간에도 숙소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 더 그리웠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를 놀라게 할 돌발 행동이 벌어졌다. 윤빈 형이 순식간에 윗도리를 벗어 던지고 바다로 달려들었다. 현장의 모두가 헉 소리와 함께 일시 정지했다. 형의 카메라맨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벙쪄 있을 뿐이었다.
“형?”
‘한국 돌아가서 또 한 소리 듣겠네…….’
아직 신인이기 때문에, 무대가 아닌 자체 콘텐츠나 방송에서는 노출을 극히 제한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능 프로그램에서 상체 탈의라니, 방송이 나가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저걸 편집할 리가 없으니까.
“와중에 저 형 몸은 진짜…….”
강도현과 박재봉이 홀린 듯 말했고, 모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안 들어와요?”
“기다려요, 형!”
“맞다, 준비 운동!”
바다 앞에서 우뚝 멈춰 선 윤빈 형이 급하게 준비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을 사람이 있을까?
“와중에 저건 안 까먹네!”
“너희 선크림은 발랐어?”
유현이 형이 선크림 걱정을 할 때는 이미 나와 지운이 형을 제외하고 모두 바다로 뛰어간 후였다.
“형, 저도 주세요.”
“응. 여기.”
나는 햇빛에 닿는 모든 곳에 선크림을 듬뿍 발랐다. 아무래도 내 비주얼에 탄 피부는 안 어울리니까. 이쪽으로 달려온 강도현이 내 얼굴을 보더니 웃음이 터졌다.
“언제 와… 풉! 문승빈 뭐냐, 달걀귀신이야?”
“이 정도로 발라야 바른 보람이 있지. 너나 와서 좀 발라.”
“어차피 바다 들어가면 다 지워지는데 뭐 하러 바르냐?”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논리에 헛웃음이 나왔다. 뭐라 반박할 시간도 없이 강도현이 떠났고,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핀잔을 줬다.
“저러다가 탔다고 후회하지.”
지운이 형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바다에서 놀고 온 티 나고 좋지 뭐.”
“형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런 나를 보더니 유현이 형이 바다로 달려가며 스쳐 가듯 말했다.
“싱겁긴.”
하지만 유현이 형도 지운이 형의 말이었다면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선크림을 다 바르고 짐을 챙기는 지운이 형의 손목을 쥐고 유현이 형을 따라 뛰었다.
반짝이는 윤슬, 경쾌하게 모래사막을 치고 돌아가는 파도 소리, 누구 하나 웃지 않는 사람이 없는 바다. 우리를 보며 손짓하는 멤버들에게 달려가는 이 순간이 비현실적이게 느껴졌다. 바다 짠내가 바람을 타고 시원하게 불어 왔다. 곧장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두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 한참 숨을 참다가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폐 깊숙이 들어오는 숨들. 그간의 고민을 다 털어 버릴 수 있다고 착각할 만큼이나 황홀한 순간이었다.
한 시간쯤 놀았을까, 하늘이 점점 어둑해지고 있었다. 쉬지 않고 물놀이를 한 탓인지 멤버들 모두 기진맥진하여 모래사장으로 거의 기어서 나왔다. 일렬로 누워 있는 우리는 별다른 얘기 없이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런 우리 위로 윤 피디와 최 피디의 얼굴이 보이기 전까지는.
“잘 놀았어요?”
“아, 깜짝이야…….”
“마지막 선물이 남아 있습니다!”
“네?”
“해안가 옆에 비치 보드워크 관람차 앞으로 모이세요. 시간은… 30분 드리겠습니다.”
“지금요?”
다들 물에 젖은 생쥐 꼴인데 30분 안에 준비를 마치고 나오라니? 갑작스러운 미션에 머리를 쥐던 윤빈 형이 물었다.
“그, 그냥 이러고 가면 안 돼요?”
“…형, 그건 쫌.”
“저희 여분 옷, 아 그래서 아침에 챙기라고 한 거였어요?”
어쩐지 아침에 미션을 안내하는데 여분 옷을 챙기라고 했다. 물이라도 맞는 게임이 있나 했는데 이거였구나.
급하게 준비를 마치고 멤버들과 함께 관람차 앞으로 달렸다. 저녁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사람이 붐볐다. 대응책으로 서로의 어깨를 붙잡고 움직였다. 그리고 드디어 관람차 앞에 도착했을 때, 선물은 보이지 않았다.
“뭐지?”
“선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선물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멤버들 사이에서 나는 확신했다. 관람차 앞에 서 있는 한 남녀. 맞잡은 손 사이로 보이는 약지에 새겨진 선명한 반지 문신. 그냥 반지는 잃어버리기 쉽고, 쉽게 빼 버릴 약속은 하기 싫다며 엄마가 아빠를 타투 숍으로 끌고 가서 한 타투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