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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231화 (231/346)

231화

“이제 좀 진정이 돼?”

“…네.”

매니저 형과 스태프들의 노력으로 재봉이는 겨우 울음을 그쳤다. 멤버들 모두 팬 미팅과 화보가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침울한 분위기였다.

“그럼 매니저 형, 팬 미팅도 일부러 말한 거예요?”

“이게 완전 비밀리에 진행된 프로젝트여서…….”

“진짜 너무해요, 감독님-”

우는 소리를 내자 최 피디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워-낙 스케줄이 많은 크리드여서 저희도 고생 꽤 했어요. 제주도에 휴가 오게 한 것도 다 오늘을 위한 빌드업이었던 거죠!”

“와, 최 피디님 진짜…….”

‘지독하시네요…….’

“자, 여러분 여권이랑~ 표입니다.”

“그건 또 언제 챙겼어요?”

어쩐지, 매니저 형이 제주도에 도착한 공항에서부터 여권은 분실하면 안 되니 보관하겠다고 한 이유가 있었다. 제주도는 여권이 필요 없는데도 챙기라고 한 것부터 이상하긴 했다. 멤버들은 모두 허탈한 얼굴로 여권과 비행기 표를 받았다. 심드렁한 얼굴로 대충 표를 훑어보던 중 국가 이름을 보고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참 나, 어디 가는지나 보고… 미국이요?”

“네?”

“헐!”

어디 오지나, 정글에 데려가서 개고생만 시키는 게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머쓱할 정도였다. 미국이라니?

“저 미국 처음 가 봐요!”

“나도!”

가장 충격이 커 보였던 재봉이와 선우 형은 언제 실망했냐는 듯 눈을 반짝였다. 축제 분위기가 되려던 무렵, 지운이 형이 조용히 물었다.

“근데… 시간이 2시네요? 지금이 몇 시지?”

나는 곧장 시계를 확인했고, 머리가 아파왔다. 지금은 20분 전, 1시 40분이다. 어쩐지 스태프 몇몇이 짐을 챙겨서 이동한다 했다. 촬영을 위해 먼저 가는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뛰어야 하는 거 아니야?”

“피디님들 이미 뛰어가시는데?”

“뭐? 저기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더 당황할 틈도 없이 나는 유현이 형과 함께 멤버들을 인솔했다. 그나마 짐을 부쳐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무거운 캐리어를 끙끙대며 공항을 누벼야 했을 것이다.

‘대낮부터 달리기라니…….’

체육 예능 피디 1인자다운 미션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출발 5분 전에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멤버들 모두 기진맥진하여 쓰러지듯 자리에 착석했다.

“빠진 사람 없이 다 탑승했죠?”

“느에…….”

“미국까지 12시간 정도 비행해야 하니까 푹 자 두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래도 벌써 곯아떨어진 멤버들이었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최 피디님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곧장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까지 비밀리로 진행하실 필요는 없었잖아요.”

“윤 피디 같이 하게 된 거? 네가 이런 반응일 거 같아서 일부러 얘기 안 했지.”

“…….”

“걱정하지 마, 형식이도 많이 배우는 자세로 임한다고 했어.”

‘그 인간이 뭔들 말을 못 할까…….’

윤 피디의 등장이 청천벽력 같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큰 프로젝트인지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윤 피디님이 그렇게까지 한다니… 정말 큰 프로젝트인가 봐요.”

“응. 상반기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는 프로그램이야. 왜인 줄 알아?”

“왜요?”

최 피디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웃었다. 촬영장이었다면 조용히 자리를 피했을 거다. 왜냐고? 최 피디가 자아도취에 취할 때 짓는 표정이거든. 기내여서 꼼짝할 수 없다는 게 이렇게괴로울 수 없었다.

“내가 씨넷에서 처음으로 맡은 프로그램이잖니? 작년부터 어찌나 사정 사정을 하던지… 내가 누구니, 승빈아?”

“예능계의 마이다스 손 최 피디… 요.”

‘이제 거의 반사 반응처럼 나오는군.’

플레이 온 아이스 촬영 당시 하루에 몇 번이나 주입식으로 세뇌당한 수식어다. 틀린 말이 아니어서 더 말하기 싫은 수식어였는데.

“형식이 쟤, 이 프로그램 엄청 하고 싶어 했어.”

“그랬을 거 같아요. 아무래도 야심이 과도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니까.”

“프로그램도 프로그램이지만, 나 통해서 공중파 진출하려는 게 제일 크지.”

‘하긴 최 피디 사단에 들어가면 탄탄대로 확정이긴 하지…….’

“아무튼 잘 부탁드려요.”

“당연하지!”

* * *

장시간의 비행을 끝으로 드디어 미국에 도착했다. 푹 자서 그런지 다들 잔뜩 부은 얼굴이었다. 다들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데뷔하고 처음으로 온 해외여행에 들떠 있었다.

“자, 시간이 늦었으니 숙소로 바로 갈게요.”

“네-”

“이번에도 뭔가 숨겨져 있는 거 아니죠?”

불신 가득한 박재봉의 물음에 최 피디는 박장대소했다.

“아이고, 재봉 씨가 충격이 엄청 컸나 봐. 당연하죠~”

솔직히 나도 숙소 앞에 도착하기 전까지 완벽히 신뢰하진 않았다. 최 피디는 어느 정도 신뢰하지만, 윤 피디는 언제나 예측이 어려운 변수이기 때문이다.

“룸메이트는 어떻게 정하죠?”

나의 질문에 윤 피디가 최 피디에게 말했다.

“선배님, 아무래도 게임을…….”

“게임? 에이, 지금 도착했는데 게임으로 방 정하는 건 너무 피곤하지. 올드하기도 하고.”

“그, 그렇죠? 네…….”

‘올드’라는 단어에 윤 피디의 미간이 잠시 요동쳤다. 하지만 금세 꼬리를 내리고 최 피디의 의견을 따랐다. 역시 성공을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위는 언제든지 버리는 인간이다. 새삼 최 피디의 파워를 실감했다. 지금까지 너무 편하게 지내와서 잊고 지냈는데.

“크리드분들은 숙소에서는 방 어떻게 정했어요?”

“저희는 방송에서 게임으로 정했는데요.”

“그럼 오늘은 깔끔하게 3명, 4명씩 나눠서 방 들어가는 거 어때요? 복불복이긴 한데.”

“좋아요!”

최 피디 뒤에 있는 윤 피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복불복 게임이거든. 윤 피디의 제안과 별반 차이 없는 것임에도 최 피디의 한마디에 현장이 움직이니 배가 아플 만도 했다. 자존심도 상했을 것이고.

“그럼, 장유유서… 는 너무 식상하니까 첫째, 셋째, 다섯째, 막내 순서로 가죠?”

“방 하나는 혼자 쓰는 거네요?”

“맞아요!”

“우와, 독방은 처음인데요?”

하긴, 숙소 생활을 하다 보면 독방은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고 나서 얻을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다들 눈이 번쩍였다.

“독방이 확실히 좋죠~”

그렇게 말하는 최 피디님의 입꼬리가 씰룩였는데, 뭔가 숨겨진 게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독방은 걸리지 말아야겠는 걸.’

그렇게 유현이 형, 선우 형, 나, 박재봉이 먼저 방을 선택했다. 나는 파랑색 문의 방을 선택했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문을 박차고 나왔다.

“다시 뽑는 건 안 되나요?”

“에이, 승빈아. 안 되지-”

어쩐지 이 방 앞에 멈췄을 때부터 최 피디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흥미진진하다는 얼굴이었으니까.

“자, 다음 팀 방 선정해 주세요!”

결국,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장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이 넓은 공간에 침대가 달랑 하나다. 그러니까, 내가 독방에 당첨됐다는 말이다.

다른 방을 구경 가 보니 다양한 조합의 룸메이트가 만들어졌다.

“어, 지운이 형이랑은 처음이다!”

“와, 형 괜찮겠어요? 재봉이 잘 때 잠버릇이…….”

“이 형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형, 도현이 형 잠버릇이 더 심하거든요?”

“나는 투마월 공식 잠버릇 대장 윤빈 형이랑 같은 방인데 뭐가 두렵겠냐, 재봉아?”

가만히 있던 윤빈 형은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급하게 해명했다.

“나, 나 잠버릇 없어!”

“네, 네. 오늘은 제발 침대 위에서 주무시길 바랍니다~”

“진짠데…….”

“유현이 형이랑은 이제 너-무 편하지, 그쵸?”

“침대 위에 간식 두고 자지 마라, 선우야.”

“진짜 적응 안 된다…….”

“뭐가?”

“한결같은 형의 이런 태도가…….”

왁자지껄한 대화 속에서 유난히 조용한 나를 발견한 멤버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저 독방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걱정이 가득한 게 얼굴에도 드러났을 것이다. 말없이 눈치만 보던 와중에 선우 형이 먼저 텐션을 높였다.

“와, 문승빈 독방이어서 좋겠네!”

“방 되게 넓겠다.”

“형, 재봉이 잠꼬대 때문에 깨면 그냥 얘 방 가서 자요.”

“이 형이 진짜!”

독방의 비밀은 12시가 되자마자 공개됐다. 침낭을 들고 들어오는 최 피디님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승빈이 너라서 다행이다-”

“…저도 최 피디님이어서 다행이네요.”

윤 피디였으면… 한숨도 못 잤을 것이다. 자는 사이에도 카메라 들이밀 인간이거든. 다른 멤버였다면 메인 피디와의 룸메이트라며 당황했겠지만, 다행히 상대가 나였다. 최 피디도 그런 점에서 다행이라고 한 거겠지.

“근데 굳이 침낭을 챙기셨어요? 편하게 주무시지.”

“아~ 나도 게임 져서 오게 된 거야.”

“네?”

“우리끼리는 사다리 타기 했거든. 꽝 걸리는 사람이 침낭 챙겨서 일인실에서 자기.”

“안 그래도 독방이라 슬픈데, 더 굴욕인데요?”

“생각해 보니 그러네, 미안~”

‘하나도 안 미안해 보이는데요?’

그래도 어찌 보면 이 프로그램의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최 피디가 게임 결과에 따라 벌칙을 받게 되다니.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기는 했다. 그게 내가 최 피디님을 좋아하는 이유기도 했고.

“근데 피디님, 저 궁금한 거 있어요.”

“응, 뭔데?”

“왜 미국에서 촬영하는 거예요?”

“땅덩어리가 넓잖아~ 갈 곳도 많고. 여행 예능은 최대한 콘텐츠를 뽑아 먹을 수 있는 곳을 가야 해.”

“별 뜻은 없네요?”

“얼마나 거창한 이유를 생각한 거야?”

“아니 뭐… 저도 미국에서 오래 살다 왔고, 윤빈 형은 고향이 미국이니까 온 건가? 했었거든요.”

순간 최 피디님이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너무 정곡을 찔렀나?’

일 분쯤 지났을까, 피디님이 침낭 속에서 손을 꼬물꼬물 꺼내더니 짝 소리가 나게 박수를 쳤다.

“와, 승빈아. 너 완전 방송꾼 다 됐네! 왜 그런 걸 생각 못 했지? 예능 처음부터 다시 찍을까?”

“저희 제주도 다시 가고 딱이네요.”

“아직도 제주도에 대한 미련이 남았구나? 걱정 마, 제주도보다 재밌게 놀게 해 줄 거니까.”

하긴, 넥스트 레벨 우승 팀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니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뒀겠지. 미국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고.

“늦었다, 자자!”

“넵.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다. 하지만 무겁게 짓누르는 눈꺼풀을 이겨낼 방법은 없었다.

* * *

아침 기상송은 우리의 데뷔곡이었다. 반사적으로 일어난 나와 달리 최 피디님은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그냥 넘어갈 리가 없는데…….’

그때 익숙한 변조된 목소리로 안내 방송이 나왔다.

“환상 투어! 첫날 첫 미션은 룸메이트와 함께 약속된 장소로 모이는 것입니다!”

안내 방송이 끝나자마자 양 옆방에서도 다급하게 멤버들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최 피디님의 어깨를 흔들었다.

“피디님? 우리 나가야 해요. 일어나세요!”

“흐아암~ 더 자 승빈아, 여기 휴가 온 거고…….”

“아니, 뭔 소리 하시는 거예요! 이거 피디님이 짠 거 아니에요?”

“내가 짠 거 맞지…….”

한참의 실랑이 끝에 겨우 침낭에서 빼낼 수 있었다. 최 피디님은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

“근데 지금이 몇 시냐……?”

“8시 5분이요!”

“엥? 근데 왜 여기 있어? 출발 안 해?”

“피디님이 제 룸메잖아요!”

잠시 버퍼링이 난 듯 우두커니 멈춰선 최 피디님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맞다!”

그제야 외투를 챙기고 내 손목을 잡고 뛰어가는 최 피디를 보며 진지하게 의문이 들었다.

‘아니, 어떻게 대한민국 최고의 피디가 된 거지?’

다음 생이 있다면 피디나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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