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바다다!”
짐 정리를 마치고 곧장 바다로 향했다. 지난번에는 겨울 바다여서 바다에 들어가지 못한 게 아쉬웠는지, 모두 바로 입수할 기세였다. 금방 유현이 형에게 붙잡혀서 준비 운동을 하게 됐지만.
“다들 겁도 없이 바다에 바로 들어갈 생각을 해? 너네 그러다가…….”
“하나, 둘!”
“헛 둘!”
다들 유현이 형의 잔소리가 시작되기 전에 열정적으로 준비 운동에 임했다. 유현이 형도 처음에는 엄한 표정이었지만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 국민 체조 영상을 틀어 놓고 본격적으로 준비 운동을 시작했다. 마치 안무를 연습하듯 각 잡힌 칼군무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특히 박재봉은 어찌나 신나셨는지 물에 들어가기도 전에 체력을 다 쓸 것만 같은 열정적인 움직임이었다.
숙소 소유의 사유지였는지 넓은 바닷가에는 인적 하나 보이지 않았고,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놀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해방감이었다.
“와, 물 진짜 차가운데?”
“아니, 윤빈 형, 괜찮아요?”
윤빈 형을 필두로 다들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차가움에 몸서리치며 다시 뛰쳐나왔다. 아직 봄이라 그런지 들어가기에 살짝은 싸늘한 온도였다. 그렇게 몇 번을 왔다 갔다 했을까. 어느새 적응된 건지 다들 물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추위마저 놀겠다는 우리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참을 물속에서 놀다가 입술이 시퍼레질 즈음에는 숙소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숙소 안에도 커다란 풀이 있어서 마저 물놀이를 이어 갔다. 스파 풀장이라 바다에서 꽁꽁 얼었던 몸을 녹이기에도 제격이었다.
“처음부터 여기서 놀 걸 그랬나?”
“에이, 그래도 바다랑은 다르죠.”
“맞아요! 제주도까지 왔는데 추워도 바다에서 놀아 봐야죠.”
“그래도 따뜻하니까 좋긴 하다.”
노곤해진 분위기에 다들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근데 숙소 너무 좋지 않아요?”
“맞아, 여기가 우리 집이었으면 좋겠어.”
“하루 종일 숙소에만 있어도 재밌을 듯.”
“그럼 우리 도현이 형만 빼고 나갑시다!”
“너, 이리 와.”
“아, 물총 반칙, 반칙!”
평화로운 분위기도 잠시, 그새를 못 참고 티격태격하기 시작하는 박재봉과 강도현 덕에 졸지에 물놀이 2라운드가 다시 시작되었다. 숙소에 마련되어 있던 물총까지 들고 와서 서로 저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 대체 물에서 얼마나 논 거지?”
“바다에서부터 따지면 한 3시간?”
“지운이 형 손가락 봐 봐요. 완전 쭈글쭈글해졌어요!”
“어쩐지, 엄청 배고프더라.”
격한 물놀이의 끝은 역시나 라면이었다. 놀랍게도 이게 제주도 와서 먹은 첫 끼였다. 그 휘황찬란한 라인업을 뒤로 하고, 그렇게 제주도에서의 먹부림은 라면으로 시작했다.
“좀 쉬었다가 나가 보자.”
“좋아요!”
“숙소 근처에 흑돼지집 있던데 거기 가 볼까?”
“그 전에 소화시킬 겸 유채꽃 먼저 보러 가요!”
“오, 괜찮아. 밝을 때 먼저 가서 사진 찍고, 밥 먹으러 가자.”
이렇다 할 계획 없이 온 여행이었지만, 그래서 더 재밌었다. 다들 성격이 무난한지라 누가 뭔가를 하자고 제안하면 군말 없이 따랐고, 서로 취향이 다른지라 다양한 코스가 가능했다. 촘촘하게 짜인 스케줄 대로만 살다가 각자 자유롭게 일정을 정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도 상당한 듯했다.
“와, 이것도 맛있어요.”
“아니, 진짜 제주도 와서 먹은 거 다 미쳤어.”
“우리 이러다 화보 못 찍는 거 아냐?”
“나도 솔직히 좀 걱정돼.”
“진심 최소 2kg는 찐 듯?”
“형, 장난해요? 저는 제주도 와서 4kg는 찐 거 같아요.”
“화보부터 찍고 놀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시간이 지나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매일매일이 행복의 연속이었다. 가는 곳마다 멋있었고, 먹는 것마다 맛있었다. 이 모든 성공적 일정은 알고 보니 제주도 출신이라는 매니저 형의 덕이 컸다. 근처 맛집과 관광지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덕에, 멤버들이 하고 싶은 걸 말하면 바로 선택지를 제시해 줬다. 덕분에 즉흥적으로 일정을 결정해도 실패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다들 직업이 직업인지라 어느 장소에 가져다 놔도 기가 막히게 사진을 찍었다. 대부분 내가 사진을 찍어 주기는 했지만,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다들 이제 사진 찍는 솜씨가 상당했다.
“옆에도 한번 보고!”
“이렇게?”
“그렇지! 아련하게 하늘 한번 쳐다보고-”
“됐다! 다음 사람 들어오세요.”
거의 뭐 버스 대절해서 다니는 단체 관광객들처럼 관광지에 도착하면 재빠르게 사진 스팟을 찾아 5컷 이내에 결과물을 얻어 냈다. 덕분에 누가 알아보기도 전에 다음 장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제주도 곳곳을 휘젓고 다녔다. 나중에는 하도 열심히 돌아다녀서 운전하다 지친 매니저 형을 대신해 윤빈 형과 유현이 형이 번갈아 가며 핸들을 잡았을 정도였다.
* * *
마침내 꿈만 같던 5일이 모두 지나갔고, 멤버들은 5일 내내 놀고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모든 자유 일정이 끝나고, 내일부터는 화보 촬영 일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얘들아, 내일 촬영 콘셉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매니저 형의 말에 모두 한걸음에 달려왔다. 다들 신나게 휴가를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팬 미팅 화보 촬영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던 것이다.
“콘셉은 정장 입은 비밀 요원이야.”
“헐, 그거 완전 그 유명한 영화잖아요!”
“막 안경 쓰고 우산 들고!”
“맞아, 그 느낌으로 찍을 거야.”
“완전 좋아요!”
“그래. 잘 나오려면 내일 얼굴 상태 최상이어야 하는 거 알지? 얼른 자자.”
다들 더 놀고 싶은 마음이 커 보였지만, 매니저 형의 말대로 최상의 얼굴을 위해 팩을 찾기 시작했다.
“대박, 슈트 진짜 잘 어울려요, 형.”
“재봉이가 칭찬해 주니까 진짜 그런 거 같네.”
“당연하죠, 저 이런 걸로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잖아요.”
거울에 보인 내 모습이 나도 마음에 들었다. 멤버들 모두 고풍스럽고 단정한 느낌의 정석 슈트는 오랜만이었다. 목 끝까지 채운 셔츠가 낯설기까지 했다. 각자 우산, 총 등 아이템을 받았고, 뿔테 안경까지 쓰니 지적인 매력이 더 돋보였다.
가장 잘 어울린 사람은 역시 윤빈 형과 유현이 형이었다. 저 형 피지컬은 백 번 봐도 백 번 놀랍다니까?
“애들아, 이제 촬영하러 가자!”
“네!”
전날 매니저 형이 보여 준 사진 속 장소를 떠올리며 모두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팬들이 엄청 좋아하겠죠?”
“오늘 스타일링 레전드야.”
“무슨 포즈 할지 전날 연습도 했다고요.”
“다른 사람들은 못 봤죠? 어제 얼마나 거울 앞에서 패션쇼를 하던지…….”
“참 나, 형도 같이했었잖아요!”
‘시도 때도 없이 싸우네.’
촬영에 대한 기대는 팬 미팅에 대한 기대로 옮겨 갔다. 티벡스 시절엔 팬 미팅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망돌도 정도껏 망돌이어야 했는데 최소한의 수익도 보장이 안 되니 대관부터 어려웠다. 소속사에서도 굳이 이익이 남지 않을 곳에 투자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사실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주 넓은 장소가 아닐지라도 팬 미팅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엄청난 기대감을 주었다. 옆에 앉은 지운이 형에게 넌지시 말했다.
“팬 미팅도 엄청 기대되지 않아요?”
“나도. 약간 상상이 안 가. 팬 미팅 하면 팬들 많이 와 주시겠지?”
“당연하죠!”
“빨리 하고 싶다…….”
문득 티벡스로 활동할 당시 미니 팬 미팅이 떠올랐다. 서른 명 남짓한 팬들이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지운이 형 팬에 1/3 정도가 내 팬 그리고 한두 명이 오재성 팬이었다. 바로 직전에 수백 명의 팬들과 미니 팬 미팅을 하는 투샤인을 보고 와서일까,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순간이었다. 그래도 정성껏 만든 플래카드와 진심이 담긴 편지에 마음을 다잡았던 기억이 있다. 지운이 형도 의기소침한 멤버들을 다독이며 꼭 성공해서 더 많은 사람들과 팬 미팅을 하자고 했었지.
옛 기억에 아련해질 찰나, 운전하던 매니저 형이 나를 불렀다.
“승빈아, 전화 오는 거 같은데 대신 받아 줄래?”
“네!”
핸드폰을 넘겨받았는데, 화면에 뜬 번호는 전화번호부에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별 의심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업무 연락이려나?
“여보세요?”
그러자 휴대폰 너머로 변조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크리드 여러분. 제주도에서의 휴가, 어떠셨나요?]
“뭐야?”
[스피커폰으로 전환해 주세요. 다른 멤버 분들도 들어야 하니까!]
“네?”
“뭐예요, 형?”
“아, 알겠어요.”
스피커폰으로 바꾸자 변조된 목소리가 차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여러분, 여권은 잘 챙기셨죠?]
“무슨 소리야, 이게?”
[지금쯤 도착했을 거 같은데, 매니저님 맞나요?]
“네~ 곧 도착합니다!”
“형?”
이 무슨 장르 변경인가? 모두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현실 파악이 안 되는 듯했다. 몇몇은 공포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평정심을 유지한 유현이 형이 말했다.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역시 유현 군, 리더답게 멤버들을 지킬 줄 아네요- 합격입니다!]
“예?”
[안타깝게도 여러분이 차에 탄 순간부터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유현 군, 핸드폰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신고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런 X친…….”
[아이고, 선우 씨. 욕은 안 돼요!]
혼란스러움에 다들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와중에 차가 멈췄고, 매니저 형은 태연하게 차에서 내렸다.
“우, 우리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운전할 수 있는 사람 있나?”
“윤빈이 형?”
차를 훔쳐서 탈출할 계획을 세우려던 찰나 문이 열렸고, 매니저 형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얼른 내려, 애들아.”
“형……?”
“저희 이렇게 버리시는 거예요……?”
결국, 박재봉이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자 낯선 표정이었던 매니저 형도 당황하며 재봉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니, 재봉아. 이게 울 일이 아니고, 그러니까.”
“저, 아직 흐엉, 죽기 싫, 어요!”
“그런 게 아니라니까?”
“에이씨,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내려 보자고.”
행동파인 선우 형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건 익숙한 장소였다.
“공항?”
그리고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캠코더를 들고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크리드 여러분?”
“전화… 그 또라이?”
“오랜만이네, 승빈아?”
‘이 목소리는?’
목소리 변조가 사라진 남자의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의심은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은 순간 확신이 됐다.
“최 피디님?”
‘피디님이 거기서 왜 나와요?’
그런데 더 환장은 그 뒤였다. 보기만 해도 기분 더러워지는 얼굴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여러분~”
“윤 피디?”
심상치 않은 둘의 조합을 보자마자 얼추 상황 파악이 됐다.
‘설마 그때 다리 놔 달라고 한 프로그램이 이거였어?’
그리고 허망한 선우 형의 목소리를 비지엠 삼아 박재봉의 눈물 가득한 원망이 시작되었다.
“팬 미팅은? 화보는?”
“다들 미워요!”
‘하… 인생 쉽지 않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