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오랜만에 찾아온 어지러움과 함께 시공간이 뒤엉키는 듯했고, 눈앞에 보인 것은 익숙한 연습실이었다. 연기 활동을 시작하고 소속사를 옮긴 후로 다시는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한 장소였다. 그래서 기분이 더 찝찝했다.
‘티벡스 연습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본 연습실에는 뜻밖의 인물인 오재성과 지운이 형이 있었다.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오재성의 언성이 점점 커졌다. 그에 비해 지운이 형의 눈은 피로감으로 가득했다.
“형, 이대로 끝낼 거예요? 형은 아깝지도 않아?”
“이 이상 뭘 더 하라고? 포기할 때를 아는 것도 필요한 거야.”
지금의 지운이 형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마인드였다. 그런데 뭘 포기한다는 거지? 설마.
“이거 마지막 기회잖아요. 형, 이걸로 형 인생이 다시 바뀔 수 있는 거라니까?”
“너 혼자 하면 되잖아?”
“형, 나는요. 티벡스가 다시 잘됐으면 좋겠어요. 문승빈 걔, 혼자 살겠다고 팀 버리고 승승장구하는 거 보면 배 안 아파요?”
‘오재성이 저런 생각을 했다고?’
믿기지 않았다. 오재성이 저렇게 티벡스라는 그룹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게 더 신빙성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티벡스는 핑계다. 내내 땅만 보던 지운이 형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답했다.
“…승빈이도 다 이유가 있을 거야.”
그 말을 듣는데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평생을 걸쳐도 형에게 미안한 마음을 다 갚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팀을 버린 건 아니었다.
“우리 둘 중 하나만 되더라도 티벡스 다시 살릴 수 있어요.”
“…….”
“투마월, 같이 나가요.”
‘이게 무슨 소리야?’
한숨을 푹 내쉬던 지운이 형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이게 사실이라면 원래 투마이월드 시즌 4에는 오재성과 지운이 형이 동반 출연을 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는 오재성과 투마이월드 소속사 평가 무대를 준비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프로그램에 나가고 싶지 않다고 하던 지운이 형의 눈에도 점점 생기가 돌았다. 그럼 그렇지, 저 형도 무대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니까.
“거봐요, 형! 우리 이대로면 투마월에서도 꼭 잘할 거예요~”
“그래, 고마워. 우리 더 열심히 준비해 보자.”
소속사를 옮기기 전 마지막으로 본 오재성과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연기를 시작하고 그룹 활동에 임하지 않았던 때부터 정신을 차리게 된 건가? 그사이 환골탈태라도 한 것인지 지운이 형에게 한없이 친절한 태도였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무대를 준비하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투마월은 정말로 티벡스를 위한 도전이었을까?
‘그런데 왜 지운이 형 혼자만 나온 거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장소가 바뀌었다. 장소는 티벡스 회사 건물의 비상구. 역시나 흡연을 하며 전화를 받는 오재성이 보였다. 통화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 차지운 설득하느라 X나 힘들었잖아, X발. 왜냐고? 아니 씨넷이 무조건 차지운 내보내는 조건으로 한두 명 더 붙여서 출연하게 해 준다잖아?”
‘저 X끼가……?’
“안 나가겠다고 고집부리길래 문승빈 이름 좀 팔았지. 문승빈도 다 이유가 있을 거라는데, 저렇게 호구 같은 X끼 때문에 나까지 개고생하는 거 아니겠냐?”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몸이 떨린다는데, 지금 내가 그렇다. 당장이라도 오재성의 멱살을 잡고 주먹질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 나는 어떠한 위협도 가할 수 없다는 것이 분했다. 잠시라도 오재성이 개과천선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내가 한심했다.
“저 정도 당했으면 엄청 미워야 정상 아닌가? 나 같으면 맨날 저주했을 텐데- 아, 그건 걱정 마. 내가 그래도 연기를 꽤 배웠잖아? 반응 좀 잘해 주고 웃어 주니까 본인 딴에는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하나 봐?”
가까이 가서 주먹을 날려 봤지만, 역시나 오재성의 몸을 통과할 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근데 앞으로 더 재밌어질 거야. 왜인지 알아? 저 형 아직 투마월에 문승빈이 나오는 걸 모르거든.”
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오재성은 내가 투마월에 나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운이 형에게 말하지 않았고, 형은 나처럼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일단 같이 나가서 대충 차지운 후광으로 분량 좀 얻고, 망돌인 걸로 동정심 자극하면 되겠고… 그 형은 어차피 첫날 문승빈 때문이라도 멘탈 터지고 시작할걸? 그럼 그사이에 내가 치고 올라가면 되지. 같은 그룹, 다른 운명. 딱 편집 각 나오지 않냐?”
“나도 문승빈한테 붙어서 불쌍한 척 좀 연기해야지 뭐. 그 새끼, 꼴 보기 싫었는데 인생에 도움이 될 때도 있네.”
비상구에는 오재성의 소름 돋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노와 허탈함에 온몸의 힘이 풀렸다. 이렇게 허무한 원인이었구나. 엄청난 무력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내가 가졌던 죄책감, 형이 당했던 비참함의 시작은 결국 또 오재성이었구나.
‘도대체 왜, 왜 나와 지운이 형이어야 했는데?’
빨리 이 악몽에서 벗어나 오재성을 만난다면 말보다도 주먹이 먼저 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끔찍한 웃음소리 속에서 장면은 또 전환되었다.
익숙한 세트장, 투마이월드 촬영장이다. 대기실 한쪽에 서서 핸드폰을 보는 지운이 형은 왜인지 불안해 보였다. 다른 연습생들은 마지막 연습을 하거나, 다른 연습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등 긴장을 풀고 있어서 더 비교가 됐다. 그러고 보니 대기실 어디에도 오재성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대기실을 빠져나온 형은 오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받지 않던 전화가 마침내 연결됐다.
“재성아, 곧 촬영 시작할 텐데 어디야?”
“아… 형, 죄송해요. 저 지금 오디션 때문에…….”
“뭐?”
“이번 소속사 평가 무대만 형 혼자 해야 할 거 같아요. 회사 쪽에도 이미 말씀드렸어요. 진짜 죄송해요. 근데 저 이 작품 너무 간절한데…….”
“아무리 그래도…!”
“형, 저 지금 가야 되거든요? 나중에 통화할게요, 파이팅!”
“재성아, 재성아?”
망설임 없이 끊긴 전화에 지운이 형의 얼굴엔 황당함이 가득했다. 막막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마른세수를 하곤 다시 대기실로 돌아갔다. 힘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에 더욱 비참해졌다. 저 상태로 나까지 마주쳤으니 멘탈이 박살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냉정하게 굴었던 이유가 조금은 설명되는 순간이었다.
“A조 연습생들 대기하세요!”
“네!”
스태프의 안내와 함께 지운이 형이 달려갔다. 형을 따라가면서 다른 대기실에서 대본을 확인하는 나를 발견했다. 내 옆에는 무수히 많은 스태프들이 화장을 수정해 주고,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고 있었고, 프로그램 대본 옆에는 새로 들어갈 작품의 스크립트가 있었다.
제대로 된 소속사 케어가 없어서 인 이어도 자신이 쓰던 이어폰을 챙긴 지운이 형이 그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 소름 끼치는 간극 앞에서 나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나는 프로그램과 새로 들어갈 작품으로 행복해하고 있었으니까. 살면서 내 웃는 얼굴을 내가 욕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뭐가 좋아서 웃고 있어 멍청한 놈아…….’
곧 투마이월드 촬영이 시작됐고, 얼음장이었던 첫 재회의 장면이 보였다. 대꾸 한번 하지 않고 나를 무시하던 지운이 형의 모습은 기억 속에서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마주할 줄이야. 그런데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의외였다.
나는 심사 위원석에 앉아 있어서 지운이 형의 이후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형은 방금 전 나를 쳐 냈던 손이 신경 쓰이는지 매만지고 있었다. 또,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매몰찬 눈으로 인사와 안부를 무시했으면서, 나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보상 버튼을 누른 것을 후회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번 기회가 아니었다면 평생 나는 지운이 형이 나를 미워한 채로 죽음의 문턱에 간 것에 괴로워했을 테니까.
장면은 또 한 번 전환되어 촬영이 끝난 시간으로 나를 데려갔다. 장시간의 녹화로 녹초가 된 연습생들 사이에서 지운이 형은 다시 오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오늘 잘했어요?”
“…응.”
“목소리가 왜 이렇게 안 좋아요? 혹시 실수했어요?”
“그건 아니고, 승빈이가 나왔어.”
“승빈이? 문승빈이요?”
“응, MC로.”
“와… 그 형도 진짜 악독하다. 어떻게 우리한테 말 한마디도 안 해 줄 수 있지?”
“우리가 여기 나오는 걸 몰랐겠지.”
“그럴 리가요! 형은 사람이 너무 순진하다니까? 씨넷이 티벡스 출신이 나오는데 언질을 안 했을까요? 그것도 형은 투마월 출신인데? 문승빈 우리가 나오는 거 백 퍼센트 알고 있었을 거예요. 진짜 소름 끼친다…….”
기가 막혀서 화도 안 났다. 나 역시 씨넷의 의도적인 숨김으로 지운이 형의 출연은 꿈보다도 더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으니까. 형은 설마 그랬을 리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두 손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당장 형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이간질을 했구나. 소름 끼치고 이제는 궁금하기까지 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그리고 마지막 장면. YJ 엔터테인먼트 건물 계단 한편, 오재성이 서 있었다.
‘뭐 하는 거지?’
계단 위쪽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오재성은 기다렸다는 듯 비열하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척 그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아니, 투마월 예고편 봤어? 그 형은 이게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그걸 망쳐? 이렇게 되면 쓸모가 없어지잖아.”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일순간 멎었다. 계단 위쪽에 멈춰 선 건 역시나 지운이 형이었다. 형이 연습할 때마다 신던 운동화가 계단 사이로 보였다. 확실했다. 오재성은 분명 지운이 형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였을까, 더 보란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투마월이고 나발이고 어차피 나는 이번 웹드 주연 자리 거의 따 놓은 셈이니까 상관은 없지. 근데 투마월로 인지도 좀 더 높이고 하고 싶어서 고사할까 했는데, 그냥 해야지 뭐. 차지운도 참 박복하지… 근데 뭐 어쩌겠어? 지팔지꼰이라고 거기서 정색을 하냐? 안 그래도 험악하게 생긴 X끼가.”
그 말을 듣는 지운이 형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에는 놀란 눈이었다가, 점점 일그러지다가, 눈가가 붉어졌다가,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근데 문승빈도 진짜 나쁜 X끼지.”
‘이 X끼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건 내가 대표한테 들은 건데, 씨넷이 우리 나온다고 얘기했는데, 문승빈이 자기가 MC인 거는 촬영 날까지 절대로 언론 발표하지 말라고 따로 부탁까지 했대. 진짜 쓰레기 아니냐? 혼자 살겠다고 나가 놓고 이렇게까지 사람을 죽여 놔야겠냐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뻔뻔하게도 나불거렸다. 하지만 그걸 듣는 지운이 형의 표정은 놀람을 넘어서 경악에 가까웠다. 힘없이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은 지운이 형은 한참 동안 흐느끼다가 힘겹게 일어섰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회사를 떠났다. 형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나에게 전화를 했다.
“아닐 거야…….”
답 없이 반복되는 연결음 소리에 지운이 형이 우뚝 멈춰 섰다. 그 모습을 정면에서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텅 빈 눈. 형은 핸드폰을 도로 위로 던졌다. 나는 그제야 핸드폰을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그리고 한참을 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형을 본 마지막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