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누가 씨넷이 만든 서바이벌 아니랄까 봐, 익숙한 감성의 질문이 가소로웠다.
“뭐야, 저 감성 문구는?”
“어떻긴요… X같았지.”
현장에 모인 다섯 팀의 팬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얘네는 진짜 양심도 없나.”
“그니까, 꼭 억지 감동 만들어 내시겠다고-”
“진심 올드 하기 짝이 없네.”
[승빈: 넥스트 레벨은 안 그래도 독기 가득한 멤버들의 열정이 더 활활 불타오르게 만든 장작과 같은 프로그램이었어요.]
[이든: 매 경연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활동기의 모습뿐만 아니라 저희가 이만큼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하지만 어른스러운 멤버들의 답에 다들 머쓱해졌다.
“저게 바로 신인의 마인드인가?”
“그니까. 애들이 참 열정적이네.”
“미안하다, 얘들아. 그래도 이게 다 씨넷 잘못이다.”
“진심. 나 씨넷 때문에 성격 다 버렸잖아.”
“와중에 재봉이보고 이든이라고 하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진심. 저도 지금 이든이가 누군가 했음.”
“이렇게 예명이 입에 안 붙기도 쉽지 않은데.”
“재봉이도 이제 포기한 거 같더라고.”
[이번 파이널 경연에 임하는 각오 한마디]
[승빈: 씨넷 서바이벌에서 다시 한번 우승하는 짜릿함을 느껴 보겠습니다!]
[도현: 그냥 빨리 무대로 보여 드리고 싶어요. 그만큼 자신 있고, 멋진 무대 준비했으니 후회 없이 모두 쏟아 내겠습니다!]
“역시 서바이벌 2회 차 답다…….”
“오늘 우승하면 투마월 파이널만큼 쾌감 미칠 거 같아요.”
“진짜로. 매주 경연 결과 때문에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
투마월 때를 생각하면 새발의 피겠지만, 넥스트 레벨 역시 타 그룹 팬들과의 화력 싸움과 투표 경쟁으로 매주 긴장의 연속이었다.
“넥스트 월드 음원만 들어도 황홀했는데, 무대랑 같이 보면 얼마나 더 완벽할지 너무 기대돼.”
“저 어제 한숨도 못 잤잖아요.”
[크리드의 마지막 무대, 이제 시작합니다.]
전광판을 가득 채운 문장과 함께 조명이 꺼졌고, 현장은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점점 채워지고 있었다.
“시작하나 봐!”
곧 VCR이 재생되었다. 잔잔한 전자 기타 루프가 돋보이는 배경음이 은은하게 들려왔다. 연기로 가득한 황무지 속 검은 사제복을 입은 누군가가 넥스트 레벨의 트로피 앞으로 걸어왔다.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아 모두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여정의 끝은 오로지 승리뿐]
트로피를 쥔 남자가 사제복의 모자를 걷어 냈다. 남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고, 전광판에 비친 주인공은 승빈이었다. 평소보다 짙은 세미 스모키 화장에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전에도 종종 승빈의 얼굴이 흰 도화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콘셉을 하든지 위화감 없이 소화한다고 생각했는데, 스모키 화장도 어색함 없이 소화할 줄은 몰랐다. 오랜만에 보는 백발과도 무척 잘 어울렸다. 화면 너머에서도 느껴질 만큼 강렬한 눈빛이었다. 문스트럭은 절로 입을 틀어막았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면 이런 것이겠구나, 하고 홀로 감탄했다.
[Now, We go to the Next World]
승빈의 나지막한 나레이션과 함께 무대 위 크리드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현장이 떠나가라 외치는 클로버의 함성과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타 팬들의 탄성 소리가 뒤섞였다.
VCR에서 승빈이 입은 것과 같은 사제복을 입은 일곱 명이 등장했고, VCR에 나왔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넥스트 월드 음원에서는 듣지 못한 멜로디에 문스트럭과 레빗드림은 동시에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둘 다 의문이 가득한 눈이었다.
[새롭게 채워질 이야기
첫 페이지를 넘기는
내 손은 아프게 떨려 와]
승빈의 목소리는 음향을 뚫고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전광판에 비친 승빈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눈이었다. 짙은 메이크업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소년의 유약함이 보이는 눈이었다. VCR에서 보던 눈빛과는 전혀 다른 연기였다. 무엇보다도, 무대를 시작하기 전에 기대해 달라고 말하며 해맑게 웃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쓸쓸한 느낌을 주는 멜로디와 어우러지면서 더욱더 무대에 감정이입이 되게 만들었다.
“연기 미쳤다.”
“문승빈 얘 진짜 뭐하는 애야?”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
이대로 끝은 아닐까]
비틀거리며 걸어오던 승빈이 무대 중앙으로 올 때쯤, 휘청이다가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멤버들이 모였고, 승빈의 위로 서로의 어깨를 감싸며 둥지를 만들었다.
약 3초간의 정적을 깨고, 넥스트 월드의 도입부 반주가 들려왔다. 리드미컬하면서 웅장한 현악기 소리와 함께 앞에 있던 윤빈과 차지운이 손으로 문을 만들어 양옆으로 흩어졌고, 사제복을 벗어 던진 승빈이 걸어 나왔다. 사제복 속에서 드러난 새하얀 얼굴이 전광판에 담기면서 현장의 모두가 감탄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안개로 가득한 이곳에서
절대 놓치지 않을게
내 손에 쥔 Next World]
문스트럭은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그동안의 승빈의 성장은 오늘의 무대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의 임팩트였다. 비주얼뿐만 아니라 무대 위에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떻게 무대마다 레벨 업을 해서 돌아오는 건지 이제는 무서울 지경이었다.
승빈과 강도현의 페어 안무가 이어졌다. 투마월 파이널에서 보지 못했던 둘의 페어 안무에 문스트럭은 오랜 한을 푼 기분이었다.
[지쳐 쓰러지더라도
절대 멈추지 않아]
[후회 없이 이뤄 낼 거야
오늘 세상이 끝난다 해도]
승빈을 센터로 두고 격렬한 군무가 시작됐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도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모두가 똑같은 동작을 하고 있지만 절대 찍어서 나오는 공장 인형과 같은 움직임이 아니었다. 각자 본인의 매력을 알고 있고, 어떻게 해야 혼자 튀지 않으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는지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승빈이 춤 실력 성장한 것 봐…….”
문스트럭은 무대 위에서 날아다니는 승빈을 보면서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투마월 당시 안무로 인해 고생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데뷔 후 자체 콘텐츠에서도 뒤에서 항상 안무 연습을 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노력파라고 생각했는데, 그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감동이었다.
[정복한 적 없는
모두가 꿈만 꾸는
그래서 더욱더
포기할 수 없어
Our Next World]
센터에 선 재봉이 이제껏 본 적 없는 파워풀한 안무를 하며 라이브를 이어 갔다. 확실히 투마월 때에 비해 젖살이 빠진 것이 눈에 보였다. 제법 날렵해진 얼굴선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성숙해 보였다. 독기로 가득한 눈도 한몫했다. 무대 전 의기소침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재봉이 센 콘셉과 어울리지 않다고 하던 반응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X친, 같은 사람 맞냐?”
“아예 다른 사람 같은데?”
“재봉이 다 컸네, 진짜.”
레빗드림은 그 말을 들으면서 짜릿함을 느꼈다. 문스트럭이 느꼈던 쾌감과 결이 같았다. 모두의 예상을 깨부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을 해내는 아이돌을 덕질하는 건 삼대가 공덕을 쌓아야 얻을 수 있는 축복이었으니까.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무대였다. 기승전결이 분명한 노래 진행에, 깔끔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안무로 무대 퀄리티를 높였다. 각 멤버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의상도 한몫했다. 피지컬로는 단연 압도적인 윤빈이 센터로 올 때는 모두들 입이 쩍 벌어졌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감탄하게 되는 몸이었다.
마침내 다가온 하이라이트 파트는 지운과 승빈의 페어 안무였다.
“X친… 지금 메댄이랑 페어 안무를 하고 있는 거잖아……?”
승빈을 덕질하면서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독무를 하던 때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을 순간이었다. 노래는 잘하지만 춤 실력은 부족하다든가, 묘하게 뚝딱거리는 게 있다고 억까 하는 이들에게도 한 방을 날리는 무대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숨 가쁘게 이어지는 고음 파트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비로소 도착한 나의 유토피아
Now, We are in the Next World
비로소 발견한 나의 이데아
Now, We are in the Next World!]
화려한 폭죽과 함께 꽃가루가 하늘에서 쏟아졌다. 진정한 피날레를 알리는 순간이었다. 무대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멤버들도 멈추지 않고 질주하고 있었다. 마침내 일곱 멤버가 서로의 손을 엮어 왕관을 만들며 무대가 끝이 났다.
문스트럭과 레빗드림은 탈진한 몸을 서로에게 기대며 중얼거렸다.
“무대는 애들이 했는데…….”
“왜 내가 힘들어 죽을 거 같냐……?”
잠깐의 정적 후, 공연장이 터질 듯한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결과 발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정해진 결과였으니까.
* * *
모든 것을 쏟아 낸 무대였다. 무대가 끝나자마자 너 나 할 것 없이 주저앉고, 쓰러졌다.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했던 안무와 비교해도 배로 어려운 안무였다. 온몸에 땀이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마이크에 숨소리가 잡히지 않도록 최대한 숨을 참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관객들의 함성 소리에 심장 박동이 더욱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벅차오름에 가슴께가 아플 만큼 두근거리는 경험은 투마월 파이널 이후 처음이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눈에 보이는 손을 일단 잡고 일어난 후에야 지운이 형인 걸 확인했다. 기진맥진한 멤버들을 하나둘 일으켜 세웠다. 곧 MC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고, 모두 급하게 숨을 골랐다.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무대였습니다!”
“크리드 괜찮나요? 무대 위에서 정말 쓰러질 듯 춤추고 노래하셨는데…….”
“네, 괜찮, 습니다.”
체력으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 윤빈 형조차도 몇 차례 끊어야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다음번 미션이 뜨면 체력 포인트부터 올려야지…….’
“오늘 무대가 넥스트 월드만이 아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이번에는 내가 답했다.
“네. 저희가, 넥스트 월드 전에 미공개곡을…….”
“와아아아!”
“미공개곡?”
역시 미공개곡에 대한 팬들과 참여단들의 반응은 엄청났다.
“네. 앞으로 나올 저희 앨범에서 만나 보실 수 있는 노래인데, 이번 넥스트 월드 무대와 잘 어울릴 거 같다는 생각에 조금은 파격적인 선택을 해 봤습니다.”
“저희 믿고 허락해 주신 코어 고마워요!”
“저희가 이렇게 넥스트 레벨에 진심입니다!”
“제가 다 감동이네요. 크리드 분들,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강도현이 애교 섞인 목소리와 말투로 감사 인사를 했다. 설득의 과정은 어려웠지만,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겠다는 약속은 지키게 될 수 있을 거 같다. 생방송이었기 때문에 대기실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현장 팀석으로 향했다.
“크리드의 무대까지 함께 했습니다. 이제 생방송 문자 투표가 곧 마감됩니다. 10, 9… 1!”
“문자 투표 마감합니다!”
불과 반년 전에 느꼈던 긴장감을 다시 느꼈다. 사실 지금은 1위를 하지 않더라도 데뷔를 못 한다거나, 불이익을 받는 것은 없다. 하지만 오늘의 무대로는 반드시 1등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 못한다면 내 뜻을 따라와 준 멤버들 얼굴을 볼 자신이 없을뿐더러,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