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그 이후로도 오재성은 한참 통화를 이어 갔다. 얼른 숙소에 가서 짐을 챙겨야 하는데, 통화는 끝날 듯 끝나지 않았다. 숙소에 녹음기를 두고 온 게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급한 대로 휴대폰 녹음 어플을 켰지만, 거리가 멀어 제대로 녹음될 거 같지는 않았다.
“응, 알겠어, 지연아.”
“나도 당연히 보고 싶지. 녹화 끝나고 바로 너희 집으로 갈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층 풀어진 표정의 오재성이 마침내 전화를 끊었다. 지연? 여자 친구 이름인가 보지? 잠깐 겁 좀 줄 겸 아는 체할까 했지만, 그랬다가는 경계심만 늘어날 것 같아 몸을 숨겼다. 방심해야 저런 모습을 더 보이지.
그리고 내 예상이 정확했다. 오재성은 계속 빈틈을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었겠지만, 모든 신경이 그쪽에 향해 있는 나에게는 빤히 보였다. 녹화가 멈추면 잠깐이라도 꼭 핸드폰을 확인한다든지, 핸드폰을 쥔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재성의 메신저 배경 화면이 어떤 여자 사진으로 되어 있는 걸 포착했다. 결정적인 확신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물증과 심증이 모두 확실해도 막상 사용할 수 있는 증거가 없었다. 핸드폰을 몰래 훔칠 수도 없는 거고, 오재성이 언제 또 통화를 할 줄 알고 미행할 수도 없고 말이다.
“녹화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별다른 추가 소득 없이 1박 2일간의 MT 아닌 MT가 끝났다.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다양한 일을 겪은지라 다들 끝날 때쯤에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오죽했으면 그 말 많은 성재 형도 손짓으로만 마지막 인사를 했을 정도였다.
녹화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서도, 연습을 하면서도 아쉬움은 끝이 없었다. 아이돌에게 있어서 연애만큼 타격이 큰 게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오재성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번 생에서는 답지 않게 얌전한 척을 하고 있어서, 인터뷰마다 본인이 모태 솔로라고 말하고 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연예인을 꿈꿨기 때문에 연애는 해 볼 엄두도 못 했다고 수줍은 듯 말하는 인터뷰를 처음 봤을 때는 정말 토할 뻔했지.
근데 그 웃기지도 않은 콘셉질이 꽤 효과가 있었는지, 포커스 팬덤 내에서 오재성은 거의 뭐 불가침의 영역으로 존재했다. 만인의 차애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팬덤 내 신뢰도가 엄청난 거 같았다.
‘그때 녹음기만 들고 갔어도-’
후회해 봐도 어쩔 수 없었다. 하다 하다 신문사에 익명으로 열애설을 제보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말 다했지 뭐. 하지만 그랬다가는 상대에게도 피해가 갈 테니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목표는 오로지 오재성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그 답답함을 해결해 준 건 의외로 윤 피디였다.
* * *
씨넷 건물에서 마주친 윤 피디가 먼저 아는 체를 했다. 평소에 윤 피디가 올 일 없는 복도인 걸 봐서는 일부러 나를 찾아온 거 같았다.
“승빈 씨, 잠깐 저 좀 보죠.”
“저요?”
“네. 여기 승빈 씨 말고 다른 승빈이가 또 있었나요?”
“…아, 네.”
어쩜 한마디를 그냥 넘기지를 않으시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거의 기어가듯 느릿한 속도로 윤 피디를 따라갔다. 가다가 그냥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고 했으면 했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원하는 대로 되지만은 않았다. 어느덧 윤 피디의 편집실 문 앞에 도착했다.
“들어가시죠.”
“제가 여기를요?”
“장담하는데 안 들어가면 후회할걸요.”
자신만만한 윤 피디의 표정이 재수 없었지만, 편집실에서 무슨 일이라도 나겠냐 싶은 심정이었다.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얼마 전 갔다 온 MT 녹화분이 틀어져 있었다.
“MT 갔던 거 벌써 편집 중이셨어요?”
“네. 일단 예고편부터 내보내야 하니까 촉박하죠.”
“근데 이걸 저한테 왜……?”
“그거 재생 한번 눌러 볼래요?”
윤 피디의 말에 홀린 듯이 재생 버튼을 눌렀고, 화면에 등장한 건 성재 형이었다. 어느 때와 다름 없이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형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리고 짧은 영상은 그대로 끝났다.
“아니, 그쪽을 보라는 게 아니라-”
“네?”
“다시 틀어 줄게요. 여기 봐 봐요.”
성재 형이 나오고 있는데, 그걸 보라는 게 아니라고? 윤 피디가 가리킨 손끝에는 오재성이 있었다. 솔직히 화면에 쟤가 있는지도 몰랐다.
“쟤는 별로 안 보고 싶은데요?”
“나도 그렇긴 한데, 이건 보고 싶어질걸요? 쟤 핸드폰 잘 봐요.”
핸드폰? 오재성은 시끌벅적한 사람들 뒤 한쪽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녹화 중인 걸 몰랐나? 싶었지만 분위기를 봐서는 잠깐 녹화 쉬는 시간에 성재 형의 재롱을 찍은 것 같았다. 그리고 스톱. 나도 모르게 정지 버튼을 눌렀다.
“이거 화면 확대는 못 해요?”
“못 할 것도 없죠.”
윤 피디가 마우스를 몇 번 움직이니 화면이 확대되어 오재성의 핸드폰 화면이 제대로 보였다.
“이거 세라 그분 아닌가요?”
“역시 승빈 씨도 아는구나. 맞아요, 루핀의 세라.”
사진의 주인공은 여자 아이돌 그룹 루핀의 멤버 세라였다. 이제 루핀은 거의 팀 활동을 안 하고 있지만, 개인으로는 방송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어서 나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하도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인지 데뷔한 지 꽤 되었는데도 여전히 오재성 또래였다.
“이게 어떻게-”
“아니 승빈 씨, 요즘 아이돌들은 겁도 없어요? 대놓고 배경으로 해 놓네. 아니면 여친한테 들들 볶인 건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만.”
“그래야지. 아이돌이 무슨 연애야, 연애는.”
흥미롭다는 말투와 상반되는 무미건조한 표정이었다. 딱 봐도 윤 피디는 오재성의 연애에는 별 관심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
“근데 이걸 왜 저한테 보여 주시는 거예요?”
“음... 승빈 씨. 등가교환이 뭔지 알아요?”
“저한테 뭐 부탁하실 게 있나 보죠?”
“역시, 나는 승빈 씨가 눈치 빨라서 좋더라.”
이어지는 윤 피디의 제안은 의외였다. 최 피디님의 다음 작품에 끼고 싶으니 다리를 좀 놔 달라는 얘기. 안 그래도 씨넷의 끝없는 구애에 최 피디님도 씨넷에서 다음 프로그램을 할 예정이라고 하시기는 했는데, 그걸 벌써 눈독 들이는 것 같았다. 살짝 듣기만 해도 스케일이 엄청나서 나도 기대 중이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지, 천하의 윤 피디가 누구 밑에서 일하기를 자처하다니. 새삼 최 피디님이 다시 한번 대단하게 느껴졌다.
‘최 피디님 이제 좀 덜 놀려야지.’
“근데 피디님은 어떻게 아셨어요?”
“척하면 척이죠. 하루 종일 아주 폰을 놓지를 못하던데요.”
“…….”
맞는 얘기였다. 오재성은 잠깐이라도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바로 핸드폰을 찾았다. 물론 오재성만 그런 건 아니고 다른 팀에서도 몇 명 보였다. 다들 아직 신인인데 참 다른 의미로 대단하다 싶었다. 그걸 보니 여자 연예인 만나고 싶어서 연예인 됐다는 티벡스 멤버들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오재수 쟤는 진짜 한결같구나.
“근데 피디님은 VM 편인 거 아니셨어요?”
“오,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신다?”
“여기까지 와서 제가 뭘 가리겠어요.”
윤 피디의 표정이 바뀌었다. 오랜만에 보는 저 표정, 내가 던진 질문이 꽤 재밌으신가 보네. 이제 윤 피디의 표정도 척하면 척, 알아볼 수 있다는 게 새삼 끔찍했다. 이 인간이랑도 꽤 오래됐구나.
“음, VM 편인 척하는 거죠.”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저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니에요. 오로지 저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만 움직이거든요.”
“솔직하시네요.”
“여기까지 와서 저도 뭘 가리겠어요-”
짜증나지만 확실한 답변이었다. 지금까지 윤 피디가 왜 VM을 돕는 척했는지도, 왜 이제 와서 나와 거래를 하려는지도 단번에 이해가 됐다. 그게 저 인간에게 득이 되는 거니까.
“그럼 이렇게 거래 성립인 겁니다?”
그렇게 편집실에서 몇십 분을 실랑이하고 나서야 서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내가 최 피디님 덕을 톡톡히 보네. 편집실을 빠져나오면서 바로 피디님께 문자를 날렸다.
* * *
윤 피디가 빼도 박도 못하게 본방송에 내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나는 무조건 예고편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고편에 해당 장면이 스쳐 지나갔는데, 정작 본방송에서는 편집된다? 누가 봐도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할 게 뻔했다. 그래서 예고편도 전주에 나가는 예고편 말고, 본방 전날 마지막으로 풀리는 최종 예고편에 넣어 달라고 요청했다. 하루가 뭐야, 공개된 지 한 시간만 지나도 이미 난리가 나 있을 거니까.
편집실에서 확대했을 때만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여자 사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부러 윤 피디에게 화질을 높이지 말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타겟은 오직 오재성이지, 상대 여성분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반응은 역시나 예상 그대로였다.
[오재성 폰 배경 뭐임?]
이거 여자 사진 아님?? 오재성 여자형제라도 있어??
(방송 캡처)
-뭐야 이게???????
-어디서 나온 거임??????????
-ㅁㅊ.........여자인거 빼박인데????
-오재성 여자형제 없음;; 외동이야..........
-아니 어디서 나온 거냐니까??
└이거 방금 나온 넥스트레벨 예고편;;
-헐..... 예고에 이런 것도 나왔어??
└그니까ㅋㅋㅋㅋㅋ 대체 어디 지나간거야;;
[오재성 폰배경 고화질 돌려옴ㅇㅇ]
고화질 어플 돌려봤는데 이거 진짜 여자사진 맞는데?
-ㅎ.... 긴머리네.....?
-심지어 외국인도 아닌거 같은데....
-아니 근데 누가 미쳤다고 배경을 여자친구로 해놔?
└나도 저거 돌려보니까 그냥 배경아니고, 어떤 어플 배경인거 같던데
└ㅇㅇ 폰배경은 딴거고, 저거 아마 메신저 배경해놓은 거 같더라
-오재성 폰배경은 이거임 (기본화면)
-아 미친 그럼 여친이랑 대화방 배경을 저걸로 했나보네ㅎ....
해당 영상의 캡처본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흐릿한 사진이었지만, 점점 화질이 높아지면서 온갖 여자 연예인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오재성 배경 얘 아님??]
루/핀의 세/라 ㅇㅇ
(세라 사진)
이 사진이랑 착장이 완전 똑같은데??
-헐 뭐야.....
-ㅁㅊ......
-근데 옷만 비슷하지 각도나 머리스타일 다르지 않음?
└ㅇㅇ 옷도 흔한 스타일이라 모르겠음
-걍 오재성이 세라 팬인 거 아냐??
└팬인데 배경을 해놓는다고?? 그것도 그거대로 노답 아니냐ㅋ
-팬들 지금 현실부정하는 거 같은데??
-루머 유포 작작 좀;; 저걸 가지고 뭐가 보인다는 거야 ㅅㅂ
[ㅅㅂ 오재성이 뭐라고 이지랄들임]
아니 미친새끼가 폰하나 간수 못해서 무슨 여자연예인들 다 소환되고 있어
-진심.....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우리언니 저런 애랑 만날 리가 없거든요ㅅㅂ 언급 작작 좀
예고편이 공개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온갖 사이트가 다 오재성 얘기로 도배되었다. 믿는 사람 반, 의심하는 사람 반. 아직까지는 팽팽한 대결이었다. 하지만, 내가 노린 건 단순히 해당 사진의 공개가 아니었다. 오재성 여자 친구 얘기가 돈다면 분명 나타날 텐데…….
그리고 정확히 5시간 뒤, 내가 예상한 대로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