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고맙다는 말도, 사과도 유현재와는 거리가 먼 단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얼떨떨했다.
“서로 돕고 사는 거죠, 뭐.”
“너 되게 애늙은이같이 말한다.”
뜨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제가 좀 어른스럽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능청스럽게 답했지만, 조금 민망했다. 어느새 옆자리에 성재 형이 와서 너스레를 떨었다.
“맞아. 승빈이는 투마월 때도 열여덟 같지 않았어.”
“아, 형까지 왜 그래요.”
“…….”
유현재는 더 대화에 끼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하긴, 여기서 저 우스갯소리에 동참했으면 그건 진짜 더한 캐릭터 붕괴니까.
[제목: Next Level]
-노래: ■■■■□
-춤: ■■■□□
유현재에게 알려 주면서 내 실력에도 도움이 됐는지 춤 포인트가 올라가 있었다. 남은 시간은 이제 20분. 이제 연습한 것들을 견고하게 만들 시간이었다. 그 전에 곧장 외모 포인트를 1 높였다.
[이름: 문승빈]
외모: A+
끼: A
보컬: A+
댄스: B+
프로듀싱: B+
뒤에 있던 오재성은 연습이 잘 풀리지 않는지 연신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전전긍긍하는 성재 형도 도와주고 싶었지만, 본인이 거절했다.
“여기서까지 네 도움을 받으면 내가 너무 민망할 거 같아.”
충분히 이해되는 마음이었기에, 가볍게 서로를 응원하고 마저 연습을 이어갔다.
* * *
정해진 1시간이 지나고 칼같이 윤 피디와 촬영 팀이 돌아왔다. 모든 팀의 멤버도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멤버들 앞에서 선발 영상을 찍어야 한다니, 마치 투마이월드의 데자뷔 같았다. 하윤도 그제서야 연습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오재성과 신경전이 있었지만, 센터 선발 준비로 분주해 보였다.
“1시간, 충분했죠?”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입꼬리를 주체 못 하고 찢어질 듯 웃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아마 대부분 해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무슨 일인지 유현재가 먼저 손을 들지 않았다. 나와 같은 이유인 거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윤 피디도 그런 유현재가 이상한지 괜히 말을 걸었다.
“현재 씨가 먼저 해 보는 거 어때요? 아까도 할 말이 많아 보이던데.”
“연습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요.”
“의외네요?”
자존심을 자극하는 말이었지만 유현재도 필사의 힘으로 인내하고 있었다. 하이드 멤버도 화를 참는 유현재의 모습에 의외라는 듯 서로 귓속말을 했다. 누구 하나 쉽게 먼저 한다고 자원하지 않자 잠시 고민하던 윤 피디가 말했다.
“어쩔 수 없네요, 순서는 뽑기로 정하겠습니다.”
결국 성재 형, 하윤, 유현재, 오재성, 나의 순서가 되었다. 유현재는 마지막 순서가 되지 않은 것이 못마땅히 보였다. 하지만 나에게 작게 말했다.
“그래도 오재성 앞이네.”
“저도 오재성 뒤라서 다행이네요.”
“내가 오늘 저 둘 열받아 죽는 꼴 보고 만다.”
안 그래도 무섭게 생긴 사람이 살인 예고까지 하니 더 섬뜩했다. 아무튼, 하늘이 도왔다는 말로밖에는 설명 안 되는 순서였다.
“성재 형, 파이팅!”
“애들아, 우짜냐!”
“긴장하지 말고, 잘할 수 있을 거예요!”
투샤인과 크리드 멤버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성재 형이 카메라 앞에 섰다. 중간중간 자잘한 가사 실수와 음정이 조금 불안했다. 그래도 1절을 완주했다는 것에서 성재 형의 숨겨진 독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박, 나 1절 다 한 거 봤어?”
“형 최고예요!”
역시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다음 주자인 하윤은 시작부터 불안불안하더니 후렴구에서는 아예 안무와 노래를 이어가지 못했다. 완전히 멘털 붕괴 상태인 것이 눈에 보였다. 평소의 하윤이었다면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이어 갔겠지만,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욕을 잃은 모습이었다.
믿었던 리더마저 무너져 버리니 선샤인 멤버들도 충격이 커 보였다.
“1시간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제가 너무 과대평가했나 봐요?”
윤 피디의 뻔뻔한 발언에 성재 형이 작게 귓속말했다.
“지도 1시간 만에 프로그램 촬영 편집 다 하라고 하면 못 할 거면서…….”
‘근데 아마 저 인간은 할걸요?’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심각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하윤도 어지간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는지 입술을 앙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쯤 되면 팀원들이 힘내라고 응원이라도 해 줄 법한데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저 팀 분위기도 참 알 만했다.
“다음으로 현재 군, 준비해 주세요.”
유현재를 보며 윤 피디는 내심 기대에 찬 눈이었다. 하긴, 투마월 때의 나 이후로 이렇게 밟아서 추락시키고 싶은 인물은 오랜만이었겠지.
“하이드 유현재, 센터 선발전 영상 시작하겠습니다.”
자신만만해하던 대로 완벽한 무대였다. 괜히 도와줬나 싶을 정도로 잘한 무대여서 약간 긴장도 됐다. 원래 노래 포지션이 아니어서 고음이나 음정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1시간 안에 준비했다고는 믿기 힘든 무대였다. 유현재의 무대를 보던 윤 피디의 표정도 점점 굳어 갔다. 마지막 엔딩까지 깔끔하게 마치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피디님, 표정이 안 좋네요?”
“그럴 리가요. 너무 잘해서 잠깐 넋 놓고 있었나 보네요.”
윤 피디의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짓는 유현재의 광기 어린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적으로 두면 안 될 사람이라니까…….’
오재성의 차례가 오고, 포커스는 기선 제압이라도 하려는 듯 요란하게 응원하기 시작했다.
“센터 하자!”
그에 비해 오재성은 여전히 예민한 상태였다. 그렇게 영상 촬영이 시작됐다. 그런데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서 김병대의 응원 소리가 들렸다.
“재성이 형 파이팅!”
꽤 큰 소리에 오재성이 본능적으로 흠칫했고, 그 여파로 첫 음을 잘못 잡아 버리고 말았다.
“첫 음이 저게 맞냐?”
“아니요. 지금 당황한 거 같은데…….”
유현재의 목소리에 묘한 비웃음과 통쾌함이 묻어 있었다. 나도 오재성의 실수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지만, 유현재만큼은 아니었나 보다.
[Look! 눈앞의 Next Level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다음 Level을 넘을 유일한
Catch! 눈앞의 Next Level]
결국, 후반부 고음에서 음 이탈이 나 버렸고, 현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해졌다. 패기 넘치던 포커스의 분위기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영상 촬영을 마친 오재성은 카메라 앞에서는 이를 악물고 웃어 보였지만 뒤돌자마자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 X발…….”
입 모양이었지만 너무 선명했다. 김병대는 자신 때문인 걸 눈치 못 챈 건지 오재성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이렇게 멍청해도 되는 건가. 윤 피디의 표정도 풀리지 않았다. 하긴, VM인 오재성이 적당히 해내기만 했어도 어떻게든 서사를 만들어 봤을 텐데, 빼도 박도 못하게 음 이탈이 나 버렸으니 센터로 선정되어도 골치가 아플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왔다. 멤버들은 방금 전 김병대의 실수를 봐서 그런지, 내가 카메라 앞에 서는 때까지만 응원을 했다.
“승빈아! 센터 해 보자!”
“형, 잘해요!”
“센터 하고 또 고기 먹자!”
강도현의 생뚱맞은 응원에 살짝 웃음이 터질 뻔했다. 힐끗 보니 옆자리 박재봉과 선우 형이 양어깨를 때리며 핀잔을 주고 있었다.
“웃기면 안 된다니까?”
“도현이 형이 또…….”
그래도 덕분에 조금 남아 있던 긴장감도 사라졌다. 편한 마음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빨간불이 들어오고, 노래가 시작됐다.
[내가 걸어온 이 길엔
수많은 땀방울로
새겨진 발자국
내 미래를 알려 줄
지도가 될 거야]
거울 너머로 춤을 추고 노래하는 내 모습에 투마이월드 센터 선발전 영상 촬영 날이 떠올랐다. 이것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가득했던 내 모습을 회상했다. 순간 가슴 한구석이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는 혼자만의 싸움이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행여 실수하거나 센터가 되지 않아도 나를 지지해 줄 멤버들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벅차올랐다.
[뛰어넘어 Next Level
넘어져도 괜찮아
난 더 단단해지니까]
어느새 후렴구에 도달했고, 계속해서 애를 먹이던 파트가 시작됐다. 연습 때도 완벽하게 완성하지 못해서 모 아니면 도라는 마음이었다. 침착하게 음정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불렀고, 다행히 연습 때보다 더 안정적으로 부를 수 있었다.
[Look! 눈앞의 Next Level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다음 Level을 넘을 유일한
Catch! 눈앞의 Next Level]
마지막 파트에 와서는 긴장보다는 정말 무대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무대를 더 넓게 쓰고, 옆에 있는 다른 팀의 호응을 유도하기도 했다. 영상에 방해가 될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멤버들도 그동안 참아 온 흥을 방출했다.
크리드와 투샤인이 호응을 하기 시작하니 하이드 멤버들도 소심하지만 호응을 해 주었다. 추임새를 넣으며 함께 즐기는 스태프들도 있었다.
[이제야 도착한
새로운 Next Level!]
엔딩 포즈까지 완벽했다. 멤버들과 성재 형의 함성 소리가 들렸고, 그제야 마음 편히 가쁜 숨을 내쉬었다.
“진짜 잘했어!”
“마지막에는 그냥 공연하는 줄 알았어-”
“어떻게 1시간 만에 이걸 다 외웠냐?”
“이건 솔직히 회식해야 한다.”
강아지떼처럼 달려들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멤버들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것도 선발 영상에 찍힌 건 아닐까-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다.
윤 피디의 표정은 볼 만했다. 신경질적으로 대본을 내려 두고는 현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에, 영상 촬영이 내 생각보다 더 성공적이었음을 직감했다. 어느새 유현재가 옆에 와 있었다.
“센터 미리 축하한다.”
“그럴 리가요. 오늘 형도 엄청 잘했잖아요.”
“사실 센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 저 재수 없는 놈들 엿 먹이는 게 목적이었지.”
“그럼 제대로 성공했네요.”
“응. 그래서 센터 못 해도 아쉬움 없어. 그리고-”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죠.”
“센터는 네가 해야 해. 그게 맞아.”
알면 알수록 의외인 사람이었다.
* * *
2차 경연 방송이 방영되고 승빈의 분량 컷을 정리하던 문스트럭은 알림을 확인했다.
“센터 선발전? 뭔 소리야 이게.”
[Next Level 파이널 무대의 센터를 뽑아 주세요!]
투표 수와 하트 수를 통해 센터가 정해집니다!
여러분의 선택으로 뽑는 센터!
“아니 X발, 이게 투마월도 아니고 왜 센터를 대중 투표로 정해? 게다가 센터가 갑자기 왜 나와?”
씨넷의 우려먹기식 경연 방식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일단 승빈에게 투표하고 야무지게 영상 하트도 눌렀다.
그리고 영상을 보던 문스트럭은 곧장 영상 편집 프로그램과 포토샵을 켰다.
“미친, 이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해.”
역시나 포커스와 크리드의 인기 싸움이 되고 있었다. 하이드 유현재도 오재성과 비슷한 투표 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각 팬덤의 서포터즈 계정에도 투표 방법과 홍보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게다가 12시? 이제 6시간 정도 남았네…….”
시계를 보며 초조해하던 문스트럭은 곧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다시 영상 작업에 집중했다. 문스트럭의 방 한쪽에는 좌우명이 적힌 메모가 붙어 있다.
[불가능하면 가능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