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217화 (217/346)

217화

“네?”

“다들 예상은 하셨을 거 같은데 되게 놀라시네요? 단체 곡인 만큼 센터가 당연히 필요하죠-”

투마이월드 당시에도 매번 센터와 킬링 파트 선정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여기까지 와서 또 센터 선발전이라니. 게다가 이미 연습생 신분도 아닌 데뷔한 가수 신분으로 센터 결정전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자존심이 상할 법했다.

“센터 파트는 곧 킬링 파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시간 후, 센터 선발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선발 기준은 1절 완곡입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해 주세요~”

“네?”

“1시간 만에 뭐를 하라고요?”

“물론 노래는 라이브로 진행됩니다.”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1절 완곡? 고작 1시간 주면서 1절 완곡을 라이브로 준비하라고? 아무리 노래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혼자서 1절을 완곡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들 얼굴에 당황스러움과 어이없음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윤 피디는 아랑곳 않고 뻔뻔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유, 투마월 때는 하루 만에 눈부셔 완곡 했잖아요? 1시간 만에 1절은 쉽지 않을까요? 게다가 이미 데뷔한 프로들인데…….”

“와…….”

“선정 방식은 선발식 영상 촬영 이후 오늘 12시까지 투표를 받아서 선정할 겁니다.”

그 말과 거의 동시에 상태창이 반짝이기 시작했고, 미션 창이 떴다.

[센터 선정] +1

(제한시간: 1시간)

▶성공 시: 포인트 1 획득

▶실패 시: 포인트 1 차감

‘뭐야, 실패 페널티도 있어?’

비교적 최근에는 페널티에 대한 미션은 나오지 않았는데, 이제 만약에 실패한다면 어떤 포인트를 차감할지도 각오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 왔다.

점점 굳어 가는 표정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특히 유현재는 기가 차다는 듯 이맛살을 구기더니 뭐라 항변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유현재를 막았다.

“뭐야.”

“이번만 좀 참아요.”

못마땅한 얼굴로 내 손을 쳐내서 걱정했더니, 그래도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가증스러운 윤 피디의 목소리에 표정 관리가 힘든 건 유현재 뿐만이 아니었다. 투마월을 경험한 성재 형도 애써 웃어 보였지만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럼 1시간 후에 봅시다!”

“…네.”

촬영이 끝나자마자 유현재가 살벌한 눈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순간 쫄았다. 나보다 한 뼘은 큰 데다가 덩치도 윤빈 형만 해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절대 기죽어서는 안 된다. 물론 내가 쉽게 기죽는 성격도 아니고, 잠시 숨을 가다듬고 정면으로 다가오는 유현재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까는 뭐냐?”

“흥분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서 그랬어요.”

“1시간 만에 해내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냐?”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해내야죠.”

“너 같은 애들 때문에 방송국 놈들이 밑도 끝도 없는 걸 시키는 거 아니겠냐? 터무니없는 걸 시켜도 하니까?”

유현재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누군가 악착같이 해낸다고 그게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윤 피디가 아니었다면 나도 반기를 들었을 것이다.

“유현재 씨, 윤 피디 잘 모르죠?”

“뭐?”

“윤 피디 저 사람, 반기를 들면 들수록 밟으려는 사람이에요. 저 사람이 제일 열받아 하는 게 뭔지 알아요? 자기 기준에서 못 해낼 거라고 생각한 일을 해낼 때예요. 제대로 엿 먹이고 싶으면 일단 해내요.”

‘내가 그래서 윤 피디한테 미움 많이 받았지.’

유현재의 얼굴을 보니 복잡한 표정이었다. 활동을 하면서 윤피디의 악명에 대해서는 들어 봤겠지만, 직접 기획한 프로그램에 참여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을 테니 말이다. 윤 피디를 여타 피디들과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현재처럼 무모하게 달려들었다가 방송계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아이돌이 한둘이 아니다. 유현재도 물론 만만치 않은 성격이지만 윤 피디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그게 제일 열 받게 하는 방법이다, 이거지?”

“제가 왜 투마월 때 그렇게 고생했겠어요?”

유현재는 내 대답에 흥미로운 듯 한쪽 입꼬리를 들어 웃었다.

“근데 나한테 그건 왜 알려 주는 거지?”

“여럿이 해내야 더 열받지 않겠어요?”

“내가 해낼 거라고 생각해?”

“네.”

이건 진심이었다. 유현재가 연예계 X같다고 은퇴한 데에는 쌓인 분노를 제대로 방출하지 못한 점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필터링 없이 말하는 건 근본적으로 유현재가 엿 먹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타격이 되지 못했을 테니까. 유현재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말없이 연습실로 향했다. 언제 온 건지 성재 형이 어깨에 매달렸다.

“와, 너도 진짜 대단하다. 나는 쟤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치겠던데.”

“저 티 별로 안 났죠?”

“뭐야, 너도 무서웠어?”

“당연하죠! 진짜 무섭게 생겼잖아요.”

그때, 연습실로 누군가 들어왔다. 멤버들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성재 형에게 서프라이즈를 하려는 건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뒤이은 형의 말에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됐다.

“진짜, 난 지운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지운이 처음 봤을 때보다 무섭게 생긴 애 처음 봤잖아…응? 너 표정이 왜 그래?”

인기척에 뒤 돌아 본 성재 형의 입이 쩍 벌어졌다. 시무룩하게 서 있는 지운이 형에 성재 형은 거의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

“아이고 지운아, 네가 왜 여기서 나오니……?”

“그렇게 무서웠어요……?”

“전~혀. 그럴 리가? 아주 귀여운 고, 고양이 같았어!”

나는 지운이 형이 장난치고 있다는 것을 표정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하도 자주 봐서 다른 크리드 멤버들도 성재 형을 놀리는 데 이미 도가 텄다.

“그런 줄 몰랐는데 성재 형 무서운 사람이었네!”

“지운이 형, 울지 마요…….”

“성재 형 인성 논란 나는 거 아니야?”

“야 이, 나쁜 놈들아! 도와주지 못할망정…….”

더 하다가는 성재 형이 울 거 같아서 지운이 형이 타이밍 좋게 성재 형을 끌어안았다.

“장난인 거 알죠, 형-”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야, 근데 지운아, 솔직히 말해서 좀 무서웠다. 지금은 절대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매를 버는 형이다.

* * *

멤버들이 응원차 간식을 챙겨 왔는데, 센터 선발전이 한 시간도 안 남았다는 말에 바로 돌아갔다. 이렇게 미련 없이 갈 줄 몰랐는데, 서운함을 느낄 틈도 없었다.

“빨리 연습해야겠네!”

“우리 빨리 가자!”

“아니, 조금은 있어도…….”

“무슨 소리야, 센터 해야지, 승빈아!”

“아니, 나 응원…….”

자신들이 생각해도 너무했다고 생각했는지 문밖까지 걸어 나갔다가 후다닥 들어와서는 달려들었다.

“숨, 막히는, 데…….”

“잘하고 와라, 승빈아!”

“박재봉 지금, 아우, 좀! 반말한 거야?”

“우리도 연습 열심히 하고 있을게!”

“머리 망가져-”

“가자!”

유현이 형의 경쾌한 외침을 마지막으로 썰물 빠져나가듯 문밖으로 떠났다. 순식간에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엉망이 된 머리와 상태에 성재 형이 배를 쥐고 웃었다.

“아하하… 진짜 웃기다, 너네.”

“아, 헤어 쌤한테 혼나겠는데요?”

“꼬질꼬질해졌어.”

“에휴, 어차피 연습하다 보면 꼬질해질 거긴 했는데.”

“우리도 얼른 연습하러 가자.”

연습실에 들어오자마자 노래창을 살펴봤다.

[제목: Next Level]

-노래: ■■■□□

-춤: ■■□□□

기본 노래와 춤 포인트 덕분에 어느 정도 포인트가 채워져 있었다. 워낙 단기간이어서 5칸을 다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최대한 채워 보는 것을 목표로 연습을 시작했다.

먼저 가이드로 멜로디를 익혔다. 어차피 가이드는 또 투마월 때 들었던 아저씨의 목소리였기 때문에 크게 참고할 점은 없었다.

그때, 뒤쪽에서 하윤과 오재성의 신경전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꾸 자리 침범하면서 방해하시는데 그만 좀 하세요.”

“난 누구처럼 팔다리가 짧지 않아서. 알아서 자리 비켜 주면 될 일 아닌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면서 억지 부리지 마세요!”

“마음에 안 들면 네가 나가든가.”

연습하던 성재 형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쟤네 살벌하다…….”

“내버려 둬요. 저러다가 말걸요?”

하지만 점점 언성은 커졌고, 결국 하윤이 연습실을 박차고 나갔다. 애꿎은 불똥은 나와 성재 형에게 튀었다.

“시간 많은가 봐요? 연습도 한참 뒤에 시작하더니.”

“무시해요, 형.”

“응.”

평소였다면 뭐라고 한 마디 했을 텐데, 지금은 언쟁할 시간도 부족했다. 원하는 반응이 아니었는지 몇 마디 더 성질을 긁는 발언을 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센터 선발전 끝나고 보자.’

넥스트 레벨은 특히 변주가 많은 곡이다. 코드와 멜로디가 휙휙 바뀌는데, 잠깐 한눈팔면 전혀 다른 음으로 노래가 이어질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곡이다. 그래서 최대한 정확한 멜로디를 찾았고, 피아노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해서 음을 잡았다. 옆을 보니 유현재가 같은 음을 틀리고 있었다.

‘역시 보컬 포지션은 아니어서 고생 좀 하겠네…….’

어쨌든 경쟁은 경쟁이니 애써 모른 척했다. 그런데 그 순간 미션창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뭐야?’

[한 번의 도움] +1

(제한 시간: 1시간)

▶성공 시: 포인트 1 획득

순간 어이가 없었다. 이전 미션을 위한 시간도 얼마 안 남은 이 시점에서 남을 도우라고? 게다가 유현재를 돕는 게 센터로 얻는 포인트와 같은 보상을 얻는다고?

승부수를 걸어야 했다. 만약 성공한다면 센터 미션을 실패하더라도 제로섬 게임이 되는 거니까. 그런데 문제는 유현재를 어떻게 돕느냐이다. 자존심이 거의 비브라늄급인 인간이어서 남에게 도움받기를 죽기보다 싫어할 것이다. 내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자신을 돕는 거라고 의심하고도 남을 인간이다.

우선 의식하지 않고 연습에 몰두했다. 어려운 구간도 음정 하나하나 직접 건반 소리를 듣고, 따라 부르니 안정적으로 부를 수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연습했을까.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고, 뒤돌아보니 뜻밖에도 유현재가 서 있었다.

‘뭐지? 시끄럽다고 화내려고 왔나?’

“…왜요?”

“…나 좀 도와줘.”

“네?”

‘이게 웬 떡이야?’

“진심이에요?”

“어, 완전 진심이야.”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여기 파트 음정이 자꾸 헷갈려. 너 연습하는 거 들어 보니까… 잘하는 거 같아서.”

그때 떠올랐다. 맞다, 이 사람 가수 아니면 싫다고 은퇴까지 한 사람이지. 자존심을 굽히고 물어보는 게 다 느껴졌다.

내가 연습한 방법을 알려 주니 처음에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점점 늘어 가는 걸 느꼈는지 눈을 반짝이며 연습하기 시작했다.

“자, 제가 먼저 불러 볼게요?”

[Look! 눈앞의 Next Level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다음 Level을 넘을 유일한

Catch! 눈앞의 Next Level]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유현재가 이어서 불렀고, 처음으로 해당 구간을 막힘없이 해냈다. 순간 반짝임이 느껴질 정도로 유현재의 눈이 달라 보였다. 미션을 클리어 했다는 미션창과 함께 유현재가 말했다.

“고마워. 그리고 아까 일은 사과할게.”

이유는 모르겠다만, 어떤 인연으로든 간에 다시 마주할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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