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이번에 선곡이 많이 힘들었나 봐요?”
조용히 넘어가나 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윤 피디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오재성은 눈치 없이 또 성질을 긁었다. 머리가 깨질 듯 몰려오는 두통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억울했다. 저 X끼도 회귀자인데 왜 내 대가리만 깨질 거 같은 거야?
“괜히 시비 걸지 말고 가라.”
“에이, 시비라니요? 제일 늦게 선곡 보내셨길래 걱정돼서 하는 말이죠.”
“그러는 너희는 선곡에 큰 생각을 안 하나 봐? 제일 먼저 보낸 거 보면?”
“선곡 고민을 왜 해요? 딱 맞는 곡이 있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한쪽 입꼬리만 올린 표정, 명백한 도발이다. ‘딱 맞는 곡’이라는 표현에 참을성의 한계를 느꼈다. 촬영장만 아니었다면 주먹이 먼저 나갔을 것이다.
“지금 타이밍에서 퍼펙트만큼 적절한 노래가 있겠어요? 미션 주제 들은 날부터 이 노래 할 생각에 너무 신났는데.”
‘내 생각보다 더 또라이구나.’
하지만 심호흡으로 화를 가라앉히고 답했다.
“잘 준비해 봐. 또 신세계처럼 역량 부족한 거 광고하지 말고.”
“…두고 보세요.”
오재성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하긴, 오재성도 지난 경연 반응을 확인했겠지. 크리드 ‘신세계’를 커버하고 대부분 ‘역시 원곡을 이길 수는 없다.’, ‘크리드의 무대를 보고 오니 허전하다’와 같은 반응이었으니까. 오재성이 떠나고, 강도현이 다가와 물었다.
“오재성이랑 무슨 얘기 했어?”
“이번 무대 두고 보래.”
“웃기는 놈이네?”
“두고 보자는 놈치고 무서운 애 없는 거 알지?”
“당연하지. 그리고 무대 잘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우리가 더 잘할 거니까.”
“오…….”
“왜?”
“웬일로 바른말을 하길래.”
“야!”
정말 우울함이 오래가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우리 팀이었다. 두통도 말끔히 사라진 기분이었다. 옆에서 강도현은 씩씩대고 있었지만 나는 자꾸 웃음이 나왔다. 정말 이 사람들 아니면 안 되겠구나, 그런 거창한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은 의외로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와 행동이었으니까.
* * *
한 번 물꼬가 트이니 이어지는 무대 기획과 연습은 꽤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칼군무를 보여 주기 위해 일곱 명이 거울 앞에 서서 팔, 다리 각도 하나하나 섬세하게 맞췄다. 지난 무대의 자유분방함과 대조되는 모습이 이번 무대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재봉아, 거기 팔 좀 더 내려야 해.”
“네!”
“윤빈 형은 박자 조금만 느리게, 지금 한 박자씩 빨라요.”
“알았어.”
“승빈이 지난번 경연 이후로 춤 실력도 는 거 같더니 이제 춤 선생님도 하네~”
춤 스텟을 올린 보람이 있었다. 그동안 노래와 외모, 프로듀싱 등에 투자를 하면서 춤 스텟은 상대적으로 덜 신경 썼는데 확실히 춤선도 정리되고 안무 습득 속도도 빨라졌다.
‘B만 되어도 이 정도인데 A가 되면 얼마나 잘하게 되는 거야?’
라고 생각했다가 지운이 형과 강도현의 상태창을 보고 납득했다.
‘얼른 춤도 A로 만들어야겠군.’
이번에는 아무래도 각 잡힌 모습을 보여 주려다 보니 고난이도 안무가 많았다. 운동으로 다져진 체력의 윤빈 형이 다른 멤버를 받쳐 주거나 지탱하는 역할을 많이 했다. 부상의 위험이 있어서 안무를 수정할까 했지만 형의 의지가 확고했다.
“조심할게. 방금 동작 너무 멋있어. 놓치고 싶지 않아.”
“부상당하면 다 말짱 도루묵 되는 거 알죠? 조금이라도 무리인 거 같으면 얘기해야 해요!”
“응. 근데 승빈아.”
“네?”
“말장 도르무? 그게 뭐야?”
“아.”
‘말짱 도루묵’에 대해 설명해 주니 윤빈 형의 눈이 반짝였다.
“오… 소용없어 진다는 거지? 알았어.”
녹음도 순조로웠다. 윤빈 형의 편곡은 언제나 멤버들의 기대를 충족시켰으니까. 나 역시 편곡을 들으면서 감탄했다. 요청 사항이 100% 반영된 결과였다.
“중간중간에 날카로운 소리를 넣어 봤어.”
“그래서 뭔가 더 긴급하고, 진짜 서바이벌에 떨어진 거 같아.”
“요청하면서 너무 추상적으로 말했나 걱정했는데… 이걸 해내네.”
멤버들의 멈추지 않는 칭찬에 윤빈 형은 쑥스러운 듯 머리만 긁적였다.
“우리 이번 무대 레전드 찍을 거 같아.”
“선우 형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도 그런데.”
“강도현이랑 박선우가 이렇게 의견 통합이 되네.”
불안함으로 시작했던 이번 경연의 시작은 어느새 기대와 확신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녹음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새벽이 다 된 시간이었다.
“이제 곧 경연이라니.”
“진짜 고생들 많았어. 그래도 무대에서 제일 고생해야 하는 거 알지?”
“당연하죠.”
“승빈이는 내일 뮤직쇼 촬영도 있으니까 좀만 더 고생하자.”
“당연하죠. 다들 내일 저 없이 마지막 리허설도 잘해야 해요!”
생방송 MC 일정 때문에 경연 전날 이뤄지는 최종 리허설에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내가 없어도 내 자리를 채워 줄 멤버들과 지난 우리의 연습량을 믿기에.
“그럼, 이번 무대 진짜 잘해 낼 자신 있어.”
“오, 윤빈 형이 이렇게 말하는 거면, 우리 진짜 잘 준비했나 보다.”
“연습하는 동안 아무도 안 다치고 잘 따라와 줘서 고마워.”
유현이 형의 조금은 낯간지러운 말에 모두 말없이 눈동자만 굴렸다.
“이제 보니까 유현이 형도 감성적인 사람이네!”
선우 형의 장난기 섞인 말에 유현이 형은 어깨를 으쓱일 뿐, 부정하거나 모른 척하지 않았다. 찬 바람이 불어도 춥지 않을 수 있구나, 그때 처음 느낄 수 있었다.
* * *
오랜만에 돌아온 뮤직쇼 촬영을 준비하기 위해 대기실로 향하는데, 익숙한 이름표가 보였다.
[루커스]
“루커스 선배님들, 오늘 컴백 무대 하시나요?”
“응, 오늘 컴백 음원 공개랑 동시에 첫 방송 시작하는 거 같더라.”
루커스의 무대를 직접 보는 것은 티벡스 시절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번이 해외 투어를 마치고 거의 1년 만에 하는 컴백이라고 얼핏 기사를 봤던 거 같다. 어쩐지 지난 녹화 때 MC였던 성훈 선배가 녹화 중간중간 안무를 연습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신곡 안무였구나.
“녹화 전에 인사라도 해야겠어요.”
대기실에 들어가니 김민영이 대본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어폰을 꽂고 있는지 내가 들어온 걸 모르는 눈치였다.
“안녕하세요?”
“…….”
그 모습을 보던 스타일리스트가 못마땅한 듯 물었다.
“진짜 한결같다. 너무한 거 아니야?”
“괜찮아요- 지금 이어폰 끼고 있어서 모르는 거고 아마 조금 있다가 너 언제 왔냐고 물어볼걸요?”
“진짜 승빈이 네가 너무 착해서 문제다.”
“대본에 집중하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거죠.”
여전히 의심쩍은 표정이었지만, 10분 뒤 스타일리스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언제 왔어?”
“참나, 누가 잡아가도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쏘리, 내가 하나 집중하면 다른 건 안 보여서.”
김민영이 메이크업을 수정하러 가고, 스타일리스트가 한 걸음에 달려왔다.
“진짜네? 어떻게 알았어?”
“몇 주 같이 진행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죠.”
“내가 살다 살다 김민영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게 될 줄 몰랐는데.”
사실 나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같이 방송하다 보니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후부터는 경계심도 많이 줄어든 것이 느껴졌다. 3년 뒤에 더 성공한 배우가 될 사람이니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도움이 되겠지.
잠시 마주 앉아 대본 리딩을 맞췄다. 처음에는 서로 지지 않겠다는 묘한 기 싸움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척하면 척이랄까, 호흡을 맞춘 게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닌데 역시 프로는 프로였다. 리딩을 마치고 김민영이 넥스트 레벨을 주제로 말을 꺼냈다.
“넥스트 레벨 무대 잘 봤어.”
“와, 방송도 찾아봤어요?”
‘의외인데?’
“아니? 자꾸 알고리즘에 떠서 넘기고 넘기다가 하는 수 없이 봤지.”
“아, 넵.”
‘그럼 그렇지…….’
그래도 귀차니즘 심한 김민영 성격에 그렇게라도 봐 준 게 어디인가 싶었다.
“근데 그거 우승하면 뭐가 좋아?”
“상품도 있고, 또 대중분들한테 저희가 어떤 그룹인지 알릴 수 있잖아요.”
“그러기엔 너무 개고생하는 거 아닌가?”
“개고생해서 얻을 만한 가치가 있어서 하는 거예요.”
김민영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답했다.
“그럴 만한 가치… 안 그런 거 같으면서도 낭만을 꿈꾸는 거 같다니까?”
“누나는 너무 낭만이 없어요.”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
“연예계에서 낭만이라니,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게 더 빠르겠다.”
김민영의 표정은 무덤덤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긴, 아이돌 연습생부터 연예계 생활하면서 낭만을 꿈꾸긴 힘든 일이지. 나 역시 꿈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첫 시작이 밑바닥을 찍으면서 삶의 모든 의욕을 잃었던 순간이 있었으니까.
배우로 성공한 후에도 낭만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회귀를 하고, 다시는 이룰 수 없을 줄 알았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아이돌의 삶을 살면서 다시 낭만을 꿈꾸게 되었다. 나도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누나도 꼭 누나만의 낭만을 찾길 바라요.”
“너…….”
“승빈아, 루커스 성훈 씨가 찾아.”
“생방 때 봐요!”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던 김민영을 두고 대기실 밖으로 향했다. 이미 무대 준비를 마쳤는지 성훈이 앨범을 들고 서 있었다.
“선배님!”
“에이, 말 편하게 하기로 했는데.”
“아, 선배 안녕하세요.”
“아직 우리 팀 애들 만나 본 적 없지? 내가 소개해 줄게.”
“네!”
대기실에 들어가니 루커스 멤버들이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비교 대상이 없는 최정상 아이돌답게 다들 무대 준비에 진심이었다.
“애들아, 여기가 내가 전에 말한 승빈이.”
“안녕하세요, 본 투 샤인! 크리드 문승빈입니다!”
“목소리 우렁찬 거 봐. 꼭 우리 신인 때 보는 거 같아.”
“몇 살이야? 너무 귀엽게 생겼다!”
“열아홉 살입니다.”
“긴장 풀어요~ 뭐야, 성훈이 너 혹시 눈치 주고 그랬냐?”
“헐,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억울하지!”
그때 루커스의 막내 레디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물었다. 화려한 피어싱과 진한 화장 때문에 더 흠칫했다.
“아, VM 출신이라고 했지?”
순간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후배 그룹인 포커스와 경쟁 그룹인데, 과거 VM 출신이니 안 좋게 볼 가능성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랐다.
“크리드로 데뷔한 거 축하해! 이런 말 하면 포커스 애들한테 미안하긴 하지만 거기 계속 남아 있는 것도 별로… 무슨 말인지 알지?”
“야, 넌 무슨 그런 말을…….”
“왜? 형들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뭘 숨기고 그래-”
무서운 인상과 달리 무해한 웃음을 지어서 더 괴리감이 들었다. 크게 부정하지 않는 걸 보면 다른 루커스 멤버들도 비슷한 생각인 듯 보였다.
‘전체적으로 포커스를 별로 안 좋아하네.’
얼마나 깽판 치고 다녔으면 벌써 평판이 이렇게 된 건지 싶다가도, 오재성 하는 짓을 생각하니 충분히 이해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