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쿵 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떨어졌다.
“미, 미안. 손이 미끄러져서.”
내 예상보다도 더 악랄한 오재성의 행보에 경악했다. 그때의 기억이 순식간에 온몸을 휘감았다. 잊고 지낼 수 없는 일이 있는데, 나에게는 투마월 시즌 4의 모든 일이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다. 특히나 이 곡으로 한 무대가 지운이 형의 마지막 무대였으니까. 쿵쾅거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나도 모르는 사이 손이 떨리고 있었다. 옆자리의 지운이 형이 어깨를 두드렸다. 그 순간도 흠칫 놀라고 말았다.
“…네, 괜찮아요.”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지운이 형의 대면식 무대는 방송으로 공개가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다. 1화도 방영하기 전에 사건이 터졌으니까, 내가 회귀하던 그 순간까지도 출연진 말고는 아무도 몰랐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오재성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모든 것이 의심이 됐다. 이 노래로 대면식 무대 한 것을 알고 있었다면 분명 나를 자극하기 위해 한 선곡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혼란스러웠다.
“포커스는 선곡을 엄청 빨리 했네?”
“제로 선배님 퍼펙트면 확실히 지금까지 포커스가 했던 무대랑은 상반된 분위기겠네.”
‘제로’는 지금을 기준으로 2년 전에 데뷔한 그룹으로, 퍼펙트는 그들의 2집 타이틀이다. 몽환적인 사운드가 특징으로, 무용을 하는 듯 선이 아름다운 안무가 특징이다. 강한 콘셉을 주로 하던 포커스의 무대와는 확연히 다른 선곡이었다.
‘김병대, 오재성의 성격이라면 이런 모험을 할 애들이 아닌데…….’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지켜본 김병대는 안정적인 것에 목숨을 거는 놈들이었다. 그래서 투마월 당시 안무와 파트를 가지고 어그로를 끌었을 때, 모두가 놀란 이유이기도 했다. 얼마나 조급했으면 저랬을까 싶기도 했으니까. 연습생 당시에도 새로운 콘셉이나 안무를 하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고집하기도 했다.
오재성도 그런 점에서 김병대와 비슷했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저 선곡은 나를 엿 먹이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리더인 오재성이 추천을 하니, 다른 멤버들도 쉽게 거절하거나 반박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래를 어떻게 알았는지가 관건인데…….’
오재성도 회귀자라는 것을 알고 난 이후로 머릿속의 가짓수가 배로 늘어났다. 이미 한 번 이상의 회귀를 한 오재성이 나보다는 회귀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을 것이다. 회귀 전과 연결이 되는 방법이나, 상태창의 보상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뒤이어 나머지 그룹들도 순차적으로 선곡을 마쳤다.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 경연에서 기존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겠다는 각오가 보이는 선곡들이었다.
[크리드는 내일까지 선곡을 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머리 아프게 됐네.”
“저기, 나 아이디어 하나 얘기해도 돼?”
“네!”
“지운이 형 아이디어면 완전 환영이죠!”
“내가 며칠 전에 본 영화인데…….”
지운이 형이 말한 영화는 각 마을을 대표하는 청소년들이 서바이벌을 하는 영화로, 국내에서도 인기 있는 장르여서 본 적이 있었다.
“저 이 영화 엄청 재미있게 봤어요!”
“그래서 이 영화처럼 ‘생존’을 주제로 무대를 기획해 보는 건 어떨까?”
“신선한데?”
“그럼, 어떤 것으로부터의 생존일까요?”
박재봉의 질문에 다들 눈이 동그래졌다. 나도 조금 놀랐다. 저런 철학적인 질문을 할 줄 몰랐거든.
“우리 재봉이가…….”
“너, 너무 빨리 커 버린 거 아니야?”
“안 된다, 재봉아. 넌 형들의 귀여운 막내인데!”
“아오, 이 형들이 뭔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근데 진짜 좋은 주제인 거 같아. 그럼 이 주제랑 맞는 노래 떠오르는 거 있어?”
머릿속에 노래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라이트온의 서바이벌 어때요?”
“어, 나도 그 노래 생각했는데!”
라이트온의 ‘서바이벌’은 획일화를 강요하는 정글 같은 세상 속에서 결코 지지 않고 살아남겠다는 메시지를 담은 노래다. 타이틀 곡은 아니어서 인지도가 높은 곡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사와 노래의 세계관이 소위 말하는 ‘오타쿠 저격’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숨은 명곡’으로 입소문을 탄 노래다. 노래를 잘 모르는 윤빈 형과 지운이 형에게 들려줘 보니 둘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우리가 애초에 원했던 것처럼 웅장하고, 각 잡힌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 거 같아.”
“그럼, 이 노래로 정한다?”
“좋아요!”
“우리도 빨리 메시지 보내요!”
[라이트온 – 서바이벌 선곡했습니다.]
“드디어 한고비 넘겼네…”
“이제야 좀 홀가분하네.”
“그럼, 재봉이 말처럼 각자 무엇으로부터 생존할 건지 정해 볼까?”
“가장 두려운 것을 말하면 되나?”
가장 두려운 것. 조금은 무거운 주제에 멤버들도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사실 선우 형이 귀신이라면서 어그로를 끌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유현이 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꿈을 포기하는 게 제일 두려워.”
이어서 강도현이 답했고, 곧이어 선우 형이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후회가 제일 두려워.”
“아,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그냥 둘 다 해~”
박재봉은 젤리를 우물거리며 답했다.
“전 약해 보이는 게 제일 싫고, 두려워요.”
지운이 형과 윤빈 형도 이어서 답했다.
“난 정체되는 게 두려워. 계속 발전하고 싶어.”
“난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는 거.”
결국, 마지막으로 나만 남았다.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큰 결심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전… 소중한 걸 지키지 못하는 게 두려워요.”
지금 내가 느끼는 가장 큰 공포의 이유를 말했다. 잠시 정적이 오갔지만, 선우 형의 말로 분위기가 풀어졌다.
“뭐야- 난 그냥 귀신, 공포 영화 무섭다 하려고 간 보고 있었는데 유현이 형이 너무 진지하게 답해서 못 했잖아요~”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형이야.’
“오늘 나온 아이디어는 오해나 디렉터님이랑 잘 다듬어 볼게요.”
“완전 기대돼…….”
“맞아. 너랑 오해나 디렉터님이면 무적이지”
“또, 또 오버한다.”
말은 이렇게 해도 내심 뿌듯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떤 무대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기대됐다.
* * *
오해나 디렉터는 이번에도 흥미롭다는 듯 나와 멤버들의 아이디어를 경청했다.
“멤버들이 그런 아이디어도 냈어요? 승빈 씨 긴장해야겠는데? 특히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 보자고 한 거 너무 마음에 들어요.”
“멤버들의 의견이 최대한 반영된 무대로 만들고 싶었는데,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를 내주고 제가 고맙죠.”
“이제 승빈 씨 부담이 줄어들겠어요.”
미소를 머금은 오해나 디렉터의 얼굴에도 뿌듯함이 스쳐 지나갔다.
“제가 생각한 이미지가 있는데, 두려워하는 것들로 세뇌되어 갇혀 있던 이들이 그것들을 극복하고 해방감을 얻는 거예요.”
“좋은데요?”
“그럼 의상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서바이벌이니까 방탄복?”
“네. 그런데 기본으로는 교복을 입고 그 위에 테크웨어, 방탄조끼 같은 걸 매치해도 좋을 거 같아요.”
“교복이요?”
“네, 저희가 살면서 가장 연약했을 시기를 생각해 보면 학생 때인 것 같아서요. 특히 다 같은 교복을 입고 있을 때는 뭐 하나라도 달라 보이면 이상한 취급을 받거나, 무리에 속하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교복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네요. 교복에 방탄복이라, 그 생존이 더 치열하고도 비극적으로 보일 것 같네요.”
투마월 당시 슈트에 테크웨어를 믹스매치한 적은 있었지만, 교복에 매치는 상상도 못 했다. 오해나 디렉터는 급하게 패드를 꺼내서 교복과 테크웨어, 방탄조끼를 조합해서 그렸다.
“딱 여러분 나이대에도 맞고, 흔하지 않은 조합이라서 더 좋을 거 같아요.”
“좋아요!”
“그리고 각 멤버의 두려움을 상징하는 아이템을 착용하는 거예요.”
“그걸 부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고요?”
“그렇죠!”
이제는 누가 한 마디만 던져도 티키타카가 끊이지 않을 만큼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 * *
중간 점검을 위해 모든 팀이 촬영장에 모였다. 어차피 중간 점검에서 전력을 다할 팀은 없을 테니, 무대에 대한 간략한 파악이라도 한다면 충분했다.
“각자 선곡과 이유에 대해 들어 볼까요?”
선곡을 공개할 때마다 처음 들은 것처럼 리액션을 해야 했다. 겹치지 않기 위해 서로의 선곡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건 방송이니까. 포커스의 차례가 왔을 때가 제일 고비였다. 자꾸만 굳어지려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거든.
“그동안 포커스가 보여 준 모습과는 상반된 매력을 보여 드리고 싶었고, 이 곡은 정말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자신감이 넘쳐 보이네요-”
‘어디 지운이 형보다 잘하는지 두고 보자.’
“치열한 서바이벌과 아이돌 세계에서 살아남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각오가 남다른데요?”
“최고의 아이돌을 뽑는 곳이니 이 정도 각오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크리드는 최고가 될 거니까요.”
프로그램을 치켜세우면서도 적당히 어그로로 쓰일 멘트였다. 저 멀리서 보이는 윤 피디의 신난 얼굴이 유일한 흠이었지만 말이다.
“네, 오늘 녹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다들 중간 점검에서는 힘을 뺀 듯했다. 덕분에 빠르게 녹화가 종료되었고, 각자 대기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빨랐다. 언제나 마지막으로 남는 건 봐도 봐도 할 얘기가 많은 투샤인과 우리였다.
“승빈아, 벌써 2차 경연인 게 말이 되냐? 나 진짜 이러다 금방 서른 되겠어.”
“형, 그게 또 무슨 소리예요.”
“시간이 뭐 이렇게 빨리 지나간다니, 정말-”
성재 형의 너스레에 정리하던 스텝들까지 빵 터졌다. 하여간 이 삭막한 서바이벌 현장에 유일한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승빈 씨, 멘트가 많이 늘었던데요?”
그리고 그 삭막함의 주범, 윤 피디가 뜬금없이 껴들었다.
‘하여간 눈치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갑자기 등장한 윤 피디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재빠른 움직임에 당황했지만, 윤 피디는 신경도 안 쓰는 듯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피디님.”
“그러게요. 반갑네 오랜만에 보니까-”
“프로그램 시작한 지 꽤 됐는데.”
‘어디 갔다 이제야 나타난 거지.’
“아, 내가 맡고 있는 게 좀 많아서. 왜요, 저 없어서 심심했어요?”
“그럴 리가요.”
“섭섭하네, 나는 승빈 씨 멘트 다 살려 주고 있는데-”
어쩐지 서바이벌이 시작했는데도 현장에서는 통 얼굴을 볼 수 없다 했더니, 욕심 많은 인간이 이것저것 건드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 보여서 좋았는데, 갑자기 왜 친한 척이지.
“아… 감사합니다.”
“정말 하나도 안 감사해 보이지만 괜찮아요. 내가 승빈 씨 덕 톡톡히 보고 있으니까-”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많은 도움이 되었고, 앞으로는 더 도움이 될 거니까요.”
“…네?”
“뭐, 그런 게 있어요. 곧 알게 될 거예요.”
답지 않게 친한 척한다 했더니 저 재수 없는 화법은 여전했다. 윤 피디랑 대화를 할 때마다 찝찝한 이유가 바로 저거였다. 분명 얘기를 하고 있는데, 알맹이가 없단 말이지.
과연 이번에는 또 어떤 뒤통수를 준비하고 계실지, 벌써 머리가 아파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