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내내 침착하던 오재성의 눈동자가 불규칙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확신은 없지만 떠본 말이었는데 제대로 걸려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게 허술해서 어쩌니, 재성아.”
“그게 무슨…….”
“긴가민가했는데 알아서 증거를 흘리니, 나야 고맙지.”
“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내 제스처가 지루하다고 또 다른 내 거를 카피하면 어떡해?”
지금까지의 당황스러움과는 다른 공격에 오재성이 입술을 짓이겼다. 그러더니 무언가 떠올랐는 듯 눈을 반짝이며 반박했다.
“죄송해요, 선배. 하도 여러 직캠을 보다 보니까 제스처가 겹쳤던 거 같은데…….”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겠다고?’
“티벡스 시절에도 내 직캠 많이 봤었구나?”
티벡스라는 단어에 오재성의 눈동자가 안정적으로 변했다. 예상도 못 한 반응이었다. 갑자기 침착해지는 오재성의 태도에 소름이 돋는 순간이었다.
“아, 뭐야. 어쩐지-”
“…어쩐지?”
“지난번에 연기 얘기할 때는 확신이 안 들었는데 이렇게 확정을 짓네. 티벡스를 아는 걸 보면, 너도 회귀자구나?”
‘이 X끼, 내가 회귀자라는 걸 몰랐어?’
지금까지의 행동은 당연히 내가 회귀자인 것을 알았기에 한 만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는 단순히 회귀를 하고 다시 만났다는 것만으로 나를 자극하지 않았을 거니까.
‘다른 꿍꿍이가 있었나?’
“어쩐지, 문승빈 같은 놈이 투마월 1위를 한다고? 그때도 의문이었어. 넌 늘 애매한 X끼였잖아. 운이 좋아서 연기자로 잘 풀렸을 뿐이지 아이돌 할 재능이라곤 뭣도 없는.”
“꼼수 부리지 마, X친놈아. 너, 내가 회귀자인 거 진작에 알고 있었잖아.”
“아니? 동시에 회귀자가 2명 발생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어. 둘 중 하나는 자멸하게 되거든.”
“…자멸?”
“몰랐어?”
오재성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너, 이번이 처음이구나. 그치?”
오재성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배를 쥐고 목이 찢어져라 웃었다.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프다는 듯 눈물까지 글썽였다. 비상구에 오재성의 웃음소리가 더 선명하게 울렸다. 그동안 가지고 있던 회귀에 대한 정보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순간이었다. 자멸이라니, 그런 건 처음 들어 본다. 그렇다면 오재성은 첫 번째 회귀가 아니라는 거고…….
‘아니야. 거짓말일 수 있잖아.’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오재성의 세 치 혀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아, 지운이 형은 아직 모르지?”
“…네 입에서 지운이 형이 왜 나와.”
“아니, 지운이 형은 알아야 하지 않나 싶어서. 누구 때문에 4년 뒤에 죽을 위기에 처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도망이라도 갈 수 있지. 안 그래?”
순간 이성을 잃고 오재성의 멱살을 잡았다.
“장난이라도 그딴 소리 하지 마.”
“장난? 네가 얼마나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크리드로 데뷔한 것까지는 우연의 결과였다고 치자, 그런데 점점 네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지? 결국 끝은 똑같아. 네가 지운이 형 옆에 있으면 결국 또 위험에 처할 거라고.”
“입 다물어, 정신 나간 X끼야…….”
빌어먹게도 최근에 나를 불안하게 했던 것들에 대해 오재성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충격에 손에 힘이 풀렸고, 그 틈을 타서 오재성은 멱살을 쥔 내 손을 완전히 쳐 냈다. 탁 소리와 함께 힘없이 손이 떨어졌고, 오재성은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대해. 너랑 차지운 때문에 망쳤던 것들, 네가 뺏어간 것들 모조리 되갚아줄 테니까.”
그건, 명백한 경고였다.
* * *
주먹다짐까지 이어질 뻔한 상황을 진정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운이 형이었다.
“너 여기 있었어? 한참 찾았잖… 오재성이랑 있었어?”
“지운 선배,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승빈 선배님이 오늘 무대 피드백해 주셨어요. 다음번에는 이런 제스처 해 보라고 추천도 해 주시고. 그렇죠?”
끝까지 가증스러운 놈이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지운이 형과 비상구를 빠져나왔다. 투마이월드에서 우승을 하고 지운이 형과 재데뷔를 하면 4년 뒤의 비극을 막을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이런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다. 평소처럼 숨 쉬고 움직이는 형을 보는 것에 너무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형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 세계는 언제든지 회귀 전 세계로 변할 수 있는, 불완전한 곳이다. 이 상태창 역시 오재성의 말이 맞는다면 나를 자멸시킬 수 있는 나의 편도, 적도 아닌 존재였다.
“형.”
“응?”
“만약에 제가 형을 실망시키는 순간이 오면 어떨 거 같아요?”
“네가? 나를?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라서 딱 잘라 대답할 수가 없네.”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기면, 저 믿어 달라고 부탁해도 돼요?”
“당연하지. 너도 나 믿어 줬잖아. 아무도 안 믿을 때.”
“고마워요.”
“뭐야- 너 혹시…….”
이 형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지.
“사춘기구나? 하긴 열여덟 살이면 사춘기 올 만도 하지- 좀 늦게 온 건가?”
“네?”
“아니야? 그게 아니면 굳이 이런 주제로 고민을 할 이유가 있나?”
“맞, 맞아요. 사춘기. 제가 요즘 책도 많이 읽고 생각이 많았나 봐요.”
“오, 책을 읽어? 요즘?”
머리를 최대한 굴려서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을 떠올렸다. 대충 줄거리를 얼버무리니 지운이 형은 별 의심 없이 넘어갔다. 그런데, 사춘기라니. 사춘기를 보낼 정신도 여유도 없었다. 한국에 와서 보낸 학창 시절은 전부 연습생 생활이었고, 매일이 전쟁이던 연습생들에게 사춘기는 사치였다. 단체 생활에서 오락가락한 기분을 티 내는 순간, 집단에서 소리 소문 없이 내쳐졌다. 다들 참는 게 습관이 되었다. 나 역시 사춘기를 보낼 새 없이 스물이 넘었고, 배우로 성공하면서는 더더욱 사춘기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사춘기면 아주 감정이 파도치겠네? 재봉이도 그랬었잖아. 너도 괜히 참지 말고. 알겠지?”
“네.”
귀엽다는 듯 웃는 형을 보며 다짐했다. 절대 같은 미래를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 * *
“우와, 형! 우리 음원 순위 봤어요?”
이른 아침부터 박재봉이 숙소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음원 순위가 찍힌 화면을 보여 줬다. 그리고 멤버들 모두 놀랐다.
“우리 거만 10위 안에 들어간 거야?”
“네! 요즘 레트로 유행이 돌아오면서 올드스쿨 음악도 인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편곡한 버전이 엄청 인기래요-”
[아이돌 노래인데 이렇게 올드스쿨 느낌 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원곡이랑 진짜 아예 다른 곡임;; 이거 듣고 궁금해서 들으러갔다가 바로 나왔잖아ㅎ…]
-아ㅁㅊㅋㅋㅋㅋㅋㅋ 다 똑같은 반응이넼ㅋㅋㅋㅋㅋ
-근데 진짜 편곡도 너무 잘했고, 무대랑 같이 봄? 안무도 올드스쿨 느낌 낭낭함ㅇㅇ
-아 무대도 있어? 보고 와야지
[선샤인 그 귀여운 노래를 이렇게 바꿨네ㄷㄷ]
[크리드에도 능력캐들 많은듯ㅇㅇ 얘네 무대 다 직접 기획한다잖아. 편곡도 직접 하고]
그 영향 때문일까, 선샤인의 ‘스케이트보드’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다.
“게다가 아이돌 팬들이 우리 음원에 영상 편집해서 올리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나 봐요,”
“그 정도야?”
박재봉의 말대로, 짹짹이에서 ‘스케이트보드’의 킬링 파트 음원과 함께 좋아하는 아이돌의 헐렁한 모습과 무대 위 완벽한 모습을 교차 편집하는 방식으로 영상 편집을 하는 아이돌 팬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 상황을 모두 지켜보던 선우 형은 어안이 벙벙한 듯 밥을 먹다가도 쉽게 멍을 때렸다. 시리얼에다가 물을 붓지 않나, 젓가락으로 국물을 뜨는 등…….
“거봐요, 무대 하기 잘했죠?”
“응, 나에게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꿈이 좌절됐던 팀의 노래로 원곡을 뛰어넘은 무대와 노래를 만들어 냈다는 것만으로도 선우 형은 그간의 한을 풀었다고 말했다. 여전히 구름 위에 있는 기분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클로버한테도 알려 줘야지-”
“클로버들은 이미 실트 총공도 해서 축하하고 있는데요?”
[크리드 음원 총공계] @CR:ID_Support
크리드의 ‘스케이트 보드’가 음원 사이트 10위권에 올랐습니다! 모두 해시태그와 함께 축하해주세요! 꾸준한 스밍도 잊지 말아주세요!
#크리드_음원짱먹었다
[실트보고 들어봤는데 노래 진심 ㅆㅅㅌㅊ임 하루종일 스케이트보드~ 거리고 있어]
-심각한 스케이트보드 중독입니다
└크리드도 많관부~
└원곡자 선샤인 버전도 들어줘ㅠㅠㅠㅠ
[이거 편곡도 멤버가 직접한거라매;; 저 프로듀싱 실력에 저 얼굴 몸은 반칙 아니야?]
-얼굴 몸 실력 반칙인 남자 크리드 “윤빈”을 영업합니다 (윤빈 사진)
└투마월 조랭이 걔, 크리드 이름 창시자, 크리드 센터, 세상에서 가장 노래 잘하는 강아지 문승빈을 영업합니다♥(Gif)
[무대에서 힙합 스텝 맛깔나게 밟더랔ㅋㅋㅋ얘 이름이 뭐임?]
-스텝도 노래도 맛깔나게 하는 크리드 메인보컬 문승빈 (사진)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크리드를 홍보하는 클로버에 멤버들 모두 감탄했다.
“우리 팬들 최고다…….”
“공계에도 글 올릴 건데 사진 한번 찍어요!”
강도현의 제안에 다들 잠옷 차림인 것은 망각하고 사진을 찍었다.
[클로버!! 저희 1차 경연 음원 ‘스케이트보드’가 정말 뜻깊은 순위를 얻었어요!!! 멤버들도 너무너무 기뻐하고 있어요ㅎㅎ 정말 감사합니다. 이건 저희가 드리는 작은 선물♡]
(단체 사진)
-으아아아아ㅏ아
-애들 잠옷 단체사진은 처음 아니야?
-미쳤나봐ㅠㅠㅠㅠㅠㅠ
-승빈이 눈 부었엌ㅋㅋㅋㅋㅋㅋㅋ귀여워ㅠㅠㅠㅠ
팬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뿌듯했다. 어려운 도전이었지만 그만큼 값진 결과를 얻었다. 선우 형은 트라우마 극복을, 우리 멤버들에게는 생소한 콘셉도 우리의 색깔로 소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 * *
2차 경연의 주제는 자유곡 대결이다. 선택의 가짓수가 많아진 만큼 멤버들 간의 의견도 다양했다. 그래도 공통된 의견은 있었다.
“청량은 그만.”
대면식에서 청량에 가까운 밝은 무대, 1차 경연에서 귀여운 밝은 분위기의 무대를 했다. 2차 경연에서는 조금 더 무게감 있는 무대를 준비해야 했다.
“지난 경연을 완전 밝고, 가볍게 즐기기 좋은 무대로 했으니까. 이번에는 웅장하고, 임팩트 있는 무대를 하고 싶어. 크리드의 다크한 면도 보여 주는 건 어떨까?”
“자유로운 모습도 좋지만, 이번엔 군무를 좀 더 살린 각 잡힌 무대도 좋을 거 같아요.”
“제복 콘셉?”
“제복 좋은데?”
“그럼 이제 어떤 제복 콘셉을 할지 생각해 보자.”
콘셉 구상의 단계가 가장 어렵다. 최대한 새로운 콘셉을 보여 주기 위해 기존의 것들과 비슷해 보이는 것들을 쳐 내다 보니 실직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정말 소수였다.
몇 시간째 머리를 맞대고 콘셉을 생각해 봤지만 다 이전에 했거나, 이미 너무 많은 아이돌이 한 콘셉들이었다.
“와, 최대 위기인데?”
“머리에서 쥐 날 거 같아요.”
“하늘에서 콘셉이 뚝 하고 떨어졌으면 좋겠다.”
그때, 넥스트 레벨 단체 메신저 방에 오재성이 메시지를 보냈다. 선곡을 마치는 팀은 먼저 메시지로 노래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서로 겹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노래를 확인하고 하마터면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제로 – 퍼펙트]
이 노래, 투마이월드 시즌 4 지운이 형의 대면식 평가 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