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206화 (206/346)

206화

“누구 노래 고를지도 고민이네…….”

“근데 선샤인이랑 포커스는 엄청 빨리 퇴근했네요?”

“그러게. 벌써 자리에 없는 거 보면.”

우연이겠지만 둘이 거의 동시에 자리를 피한다? 무언가 남아 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멤버들과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을 유심히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건너편에 선샤인의 리더 하윤이 포커스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귀까지 빨개져서는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이건 약속한 거랑 다르잖아요!”

하지만 오재성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되물었다.

“그 무대를 하고 1위를 뽑은 게 방송에 나오면 우리가 뭐가 되니, 하윤아?”

“뭐라고요?”

“적어도 3등 안에 들 만한 무대는 만들어 왔어야 우리가 포장이라도 잘해 줘서 1위로 뽑아 주지, 장기 자랑 같은 무대를 들고 와서 우리가 더 당황했잖아.”

피지컬 때문에 내려 보이는 위치까지 되어 버리니 하윤은 더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다음 경연부터는 연합이고 뭐고 없는 줄 아세요.”

내내 꼿꼿하게 서 있던 오재성이 허리를 살짝 숙이고 말했다.

“연합은 1회성이라고 말 안 해 줬었나?”

“그걸 지금 말이라고…….”

“여기 누가 듣고 있을 줄 알고 그렇게 언성 높이는 거야? 너네 믿을 구석 있어? 없잖아.”

대놓고 배후에 씨넷과 VM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리는 발언이었다. 하윤과 그 뒤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선샤인 멤버 중에는 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는 멤버도 있었다.

“그만 좀 울어라. 안 그래도 애같이 생긴 애들끼리 애새끼처럼 굴면… 꼴사납잖아.”

‘그때나 지금이나 필터링 없이 말하는 것도 여전하네.’

“아무튼, 다음 경연은 좀 좋은 무대 만들어 와 봐. 혹시 알아? 좋은 순위 줄지.”

코웃음을 치며 대기실로 돌아가는 오재성에 선샤인 멤버들은 닭 쫓던 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를 찾던 멤버들이 단체로 우르르 달려왔다. 자세히 보니 윤빈 형, 지운이 형, 강도현, 박재봉이었다.

‘선우 형이 없어서 다행이네…….’

“여기 있…….”

“……!”

나는 황급히 검지손가락을 입술 위에 두었다. 우다다 달려오던 셋이 급브레이크를 걸었다. 살금살금 걸어오던 지운이 형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

누가 보면 첩보 영화라도 찍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나는 조용히 손짓으로 멤버들을 불렀다.

“선샤인이랑 포커스가 대놓고 연합한 게 맞더라고. 그거 좀 엿듣고 있었어.”

“아니, 근데 오늘 박선우 진짜 우습지 않았어?”

갑자기 하윤이 선우 형 얘기를 꺼냈다. 뜻밖의 이름에 멤버들도 놀란 토끼 눈이었고 특히 강도현과 박재봉은 욱한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뭐야, 저 X끼 입에서 왜 선우 형이 나와?”

“쟤네 뭐예요?”

“조용히……!”

다행히 스태프들이 지나가는 소리에 묻혔다. 강도현과 박재봉은 영문도 모른 채 지운이 형과 윤빈 형 손에 입이 막혔다.

“으니, 으이그 읍으니끄아”

“맞아, 어이없어!”

“뭐야, 대체 어떻게 알아들은 거야?”

그래도 스태프들 눈치는 보이는지 선샤인도 잠깐 조용해졌다. 하지만 다시 복도에 아무도 남지 않자, 이곳저곳에서 선우 형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걔, 아직도 귀여운 콘셉 포기 못 해서 그런 거잖아.”

“맞아요. 하긴, 그래서 데뷔 못 했으니까 집착할 만도 하죠.”

“아, 역시 기분 안 좋을 땐 박선우 얘기하면 좀 나아진다니까?”

“맞아요.”

‘못 들어 주겠네, 진짜.’

이제 보니 선우 형을 자신들의 자존감 지키기용으로 쓰고 있다. 데뷔가 간절했을 선우 형에게는 미안한 말일 수 있지만, 선샤인으로 데뷔해서 이도 저도 아닌 아이돌이 됐을 바에는 고생 조금 하고 크리드로 데뷔하는 게 백 배, 천 배는 더 나았다.

게다가 저 작은 애들 사이에 180이 넘는 선우 형이 서 있었다면… 고목나무에 매미들이라는 소리밖에 못 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콘셉이 너무 아니다. 아이돌계에서는 희귀하고 임팩트 있는 저음은 활용도 못 했을 것이다.

“근데 크리드 무슨 노래할까요?”

“일단 우리 노래는 아닐 거야.”

“맞아요. 걔네가 우리 노래를 어떻게 하겠어요-”

“박선우 때문에라도 못 하겠다고 할걸?”

‘니들 노래가 구려서라는 생각은 못 하는 거냐고.’

그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살벌함에 돌아보니 네 명의 눈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형, 이번에 무조건 쟤네 노래로 해요.”

“그래, 우리가 진짜 귀여움이 뭔지 보여 주자고.”

“맞아, 승빈아.”

그걸 강도현, 윤빈 형, 지운이 형 당신들이 말하고 있으면 어쩌냐고.

* * *

“선샤인 노래?”

“네!”

“전혀 예상도 못 한 선곡이어서 좀 당황스럽네.”

유현이 형의 반응도 이해가 갔다. 나도 원래대로라면 선샤인 노래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이번 기회를 통해 선우 형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반대.”

역시나 선우 형은 반대했다.

“왜요?”

“우리가 무슨 귀여운 콘셉이야… 걔네 노래 안 들어 봤어?”

선우 형의 말에 강도현이 천연덕스럽게 반박했다.

“아니요? 다 들어 봤는데요. 그리고 저희 잘할 수 있는데요?”

“억지 부리지 말고-”

“저희가 왜 안 귀여운데요?”

“…응?”

“진짜 실망인데요. 저희 안 귀여워요? 유현이 형, 저희 안 귀여워요?”

강도현의 뻔뻔한 태도에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유현이 형도 나에게 조용히 다가와서 물었다.

“쟤, 뭐 잘못 먹었어?”

“글쎄요?”

“아무튼,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아니라면 난 선샤인 노래 못 해.”

생각보다 더 굽히지 않는 선우 형의 마음에 다들 고민에 빠졌다. 선우 형이 빠져나간 연습실, 유현이 형이 나와 멤버들에게 물었다.

“너희, 뭐 숨기는 거 있지?”

“그게…….”

자초지종 넥스트 레벨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자 유현이 형의 표정도 점점 굳어 갔다. 자신이 여태 몰랐던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는 듯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야 해. 경연인 만큼 귀여운 콘셉은 반응이 안 좋을 수 있어.”

“당연히 똑같이 귀여운 콘셉으로는 안 하죠.”

“생각해 둔 곡은 있어?”

“선샤인의 ‘스케이트보드’요.”

선샤인의 데뷔 앨범 수록곡인 ‘스케이트보드’는 짝사랑하는 이에게 멋지게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는, 지극히 일차원적인 가사와 멜로디가 특징인 곡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곡을 고른 이유 중 하나였다. 단순하다는 건 그만큼 바꿀 수 있는 가짓수가 많다는 거니까.

“어떻게 편곡하게?”

“힙합으로요.”

“응?”

“올드스쿨 느낌 나게요.”

유현이 형은 뜻밖의 대답인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흥미로운 얼굴로 경청하기 시작했다.

“좋아. 선우는 내가 설득해 볼게.”

“네. 형이 걱정하는 선샤인 같은 귀여움은 절대 아닐 거라고 꼭 강조해 주시고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형의 설득이라면 우리 다섯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선우 형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이었지만 선샤인의 노래를 하는 것에 동의했다. 어떻게 설득했냐고 물었더니, 우리가 이런 콘셉도 소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자고 했다는 것이다. 크리드의 정체성으로 다양한 무대를 보여 주겠다는 취지와도 맞지 않냐며.

“고마워요, 형.”

“나 정말 큰 마음 먹고 도전하는 거야.”

“당연히 알죠!”

선우 형은 옅게 한숨을 내쉬고는 거울 앞에 섰다.

‘뭐지?’

“다들 뭐 해? 안무 연습 안 할 거야?”

“안무를 벌써 알아요?”

선우 형은 덤덤하게 말했지만 모두 경악했다.

“어. 나 이거까지 연습하고 데뷔조 탈락했어.”

“…….”

“안무를 전부 바꿀 생각은 아니잖아?”

‘이런 X친.’

골라도 이런 곡을 골랐냐고 스스로를 원망했다.

* * *

다시 모인 넥스트 레벨 촬영장. 각 팀 간의 미묘한 신경전은 여전했다.

“자, 그럼 노래 선정 우선권을 가진 크리드가 고른 노래 먼저 발표하겠습니다. 유현 군이 발표하나요?”

“네. 저희가 선택한 팀과 곡은… 선샤인의 ‘스케이트보드’입니다.”

“응?”

“선샤인?”

“네?”

현장에 있던 스태프를 포함한 다른 팀들도 우리의 선곡에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특히 선샤인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게 화면에 전부 잡히고 있었다.

“와, 모두 예상하지 못한 반응인데요? 선샤인의 스케이트보드를 선곡한 이유가 있을까요?”

“모두가 상상하지 못한 반응이어서 오히려 마음에 듭니다. 아직까지 크리드가 도전해 보지 못한 장르라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크리드의 파격적인 무대, 기대하겠습니다.”

다음은 포커스의 차례였다.

‘보나 마나 우리 노래를 골랐겠지.’

“저희가 고른 곡은 크리드의 신세계입니다.”

다들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였는지 방송용 리액션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저희가 무-척 존경하는 선배님의 곡이기도 하고, 포커스의 매력을 잘 보여 줄 수 있는 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희 병대의 아쉬움을 풀어 낼 무대가 될 거 같기도 하고요.”

오재성이 웃으며 말했지만, 현장의 그 누구도 웃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성재 형의 표정이 심하게 굳어 있었다. MC들조차도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진땀을 흘렸다.

“…네~ 포커스의 무대 역시 기대하겠습니다.”

이후로 하이드는 포커스, 투샤인은 하이드의 곡을, 선샤인은 자연스럽게 투샤인의 곡을 하게 되었다.

“다음 주, 이곳에서 300명의 현장 평가단과 함께 2차 경연이 진행될 텐데요. 남은 기간 완벽한 무대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녹화가 끝나고, 성재 형이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너희 무슨 일이야? 진짜 상상도 못 했어! 우리가 선샤인 거 할 줄 알았는데-”

“아~주 재밌고 귀여운 무대 준비 중이니까 기대해 줘요.”

“승빈이가 귀여움? 새롭긴 하겠다, 진짜.”

“헐. 형, 제 에이앱 한 번도 안 봤죠? 제가 얼마나 팬들한테 귀여움받는데요~”

“맞아. 넌 좀 심해”

“조용히 해, 도현아.”

“형네는 그래도 1순위인 하이드 곡 돼서 다행이네요.”

“응. 우리 설마 선샤인 곡 되는 거 아닌가 걱정했었어… 아, 미안.”

옆자리에서 묵묵히 대화를 듣던 선우 형이 시무룩한 얼굴로 답했다.

“거봐, 난 분명 말렸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언제 나타난 건지 모를 선샤인의 하윤이었다.

“저희 곡이 뭐 어때서요? 저희도 투샤인같이 X소 아이돌 노래하게 돼서 기분 별로 안 좋거든요?”

“뭐라고?”

“그리고 선우 형도 무슨 객기로 귀여운 노래를 하겠다고 한 건지 모르겠지만, 저희 노래 먹칠 안 되게 잘 준비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아담한 키에 애티가 가득한 얼굴로는 상상할 수 없는 성질머리였다. 성재 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벙쪄 있었다. 선우 형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술만 깨물었고, 나와 유현이 형의 권유로 먼저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어차피 원곡대로 하기에는 꼴사나울 거 같아서 저희 나름대로 멋있는 무대 준비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정중한 말투에 그렇지 못한 단어 선택이었다. 선샤인 멤버들은 기분이 나쁘지만, 정유현의 기에 눌린 듯 한껏 째려보는 것이 전부였다. 뒤에서 지켜보는 지운이 형의 살벌한 표정도 한몫했겠지.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추한 곡에 훌륭한 편곡이 들어갈 테니 기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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