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스타일링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목 상태를 점검했다. 노래 포인트는 이미 다섯 칸을 다 채운 지 오래였고, 기본 노래 스텟도 A+이니 걱정 없다.
“크리드 입장 스탠바이하겠습니다!”
“네!”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는 연습생이 아닌 크리드라는 그룹으로 이 로드를 걷는다고 생각하니 옅게 소름이 돋았다.
“매번 순발식마다 어떻게 등장할까 정했던 거 기억해요?”
“당연하지. 그거 은근히 부담이었다니까?”
“오늘은 평범하게 들어가야겠죠?”
박재봉과 선우 형의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유현이 형의 말에 모두 장난기가 사라졌다.
“첫인상이 제일 중요한 거 알지? 오늘 우리가 보여 주고자 하는 메시지에 맞게 행동하자.”
“네!”
큐 사인과 함께 촬영장으로 향했다. 미리 와있는 포커스가 살가운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멋져요!”
‘병대야, 입꼬리 떨린다.’
“안녕하세요, 본 투 샤인! 크리드입니다!”
“저희가 먼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
“…”
보통 이러면 인사를 하기 마련인데 눈만 멀뚱거리는 포커스에 지운이 형이 먼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잘 부탁드려요~”
자칫하다간 우리 쪽에도 안 좋은 편집점이 될 수 있으니 발 빠르게 대처한 것이다. 그러곤 정해진 자리에 향했다. 하필이면 포커스와 마주 보는 자리였다. 이것도 다 계획한 거겠지. 뒤이어 투샤인, 선샤인, 하이드가 순서대로 입장했다. 선샤인은 예상한 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여운 장식들로 가득했다. 프릴이 달린 실크 셔츠와 반바지, 반양말에 구두까지. 저 의상을 소화해 내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필이면 선샤인 뒤로 하이드가 나오면서 더 비교가 됐다.
멤버 전체가 180cm가 넘는 하이드는 아예 깔끔한 슈트를 입고 나오면서 초반 기선 제압을 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유현재가 압도적이긴 했지만. 하이드의 입장을 뚫어지게 보던 박재봉이 부러움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와, 짱 크다…….”
“재봉이도 저만큼 될 수 있어.”
“윤빈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놀리는 거 같아.”
“아, 아니야- 그리고 요즘 재봉이 완전 빨라, 키가.”
마지막으로 MC인 ‘하리’와 루커스의 ‘성훈’이 등장했다. 먼저 ‘하리’는 10년 동안 탑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여성 솔로 가수이다. 원래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했는데, 개인 인지도가 압도적이라 일찍이 그룹은 해체되고 솔로 가수로 노선을 변경했다. 다양한 콘셉 소화력과 신들린 조련 기술로 코어와 대중성을 잡은 몇 안 되는 솔로 가수가 되었다. 벌써 10년 차지만 여타 걸그룹 팬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막강한 팬덤을 가지고 있다.
루커스의 성훈은 현재 압도적 1군인 루커스 중에서도 인기 순위 1위의 멤버였다. 수려한 외모에 뛰어난 능력치, 팬 서비스까지 상위권에 들어가면서 만인의 최애가 된 멤버였다.
“가요계 최고의 신인을 결정하라 NEXT LEVEL! 안녕하세요, 가수 하리입니다!”
“안녕하세요, 루커스 성훈입니다!”
“와아아!!”
역시 포스가 남달랐다. 괜히 연예인들의 연예인이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 저 성훈 선배님 실물 처음 봐요…….”
“대박, 연예인 보는 거 같아.”
“형도 연예인이거든요?”
“알아, 임마.”
“저도 처음 봐서 반가워요. 크리드 재봉, 선우 군.”
“헉!”
갑작스러운 성훈의 인사에 선우 형과 재봉이 얼음 상태가 되었다. 유현이 형은 골 때린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고, 지운이 형과 강도현은 윤빈 형 뒤로 숨었다. 나는… 자리에 앉은 둘의 등짝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장난이에요, 오늘 여러분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서로 인사는 나눴나요?”
“네!”
“자, 본격적인 경연에 앞서서 5팀이 선택한 최강자 팀과 최약체 팀을 알아볼 건데요.”
아마 지난번 사전 인터뷰 영상을 보여 줄 계획인가보다. 그런데 포커스와 선샤인이 눈에 띄게 불안한 모습이었다.
[크리드는 아무래도 투마이월드 수혜를 받은 그룹이니까요.]
[그룹 색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몇 달 만에 서바이벌로 만들어진 그룹인데 팀워크가 좋을까? 그런 의문도 들어요.]
“헉…….”
“저렇게 대놓고 말해도 되는 거야?”
생각보다 더 노골적인 멘트에 출연진들 모두 우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는 자기들도 데뷔조로는 몇 달 연습하고 데뷔했을 거면서…….’
뒤늦게 오재성이 해명 아닌 해명을 했지만, 여론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저희도 정말 어려웠습니다, 다들 너무 잘하시는 분들이기도 하고… 크리드 선배님들이라면 개의치 않아 하실 거 같아서 뽑았습니다. 기분 상하신 건 아니죠?”
“뭐, 저희가 진짜 최약체라고 생각해서 뽑은 건 아니니까 기분 상할 이유는 없죠.”
선우 형 특유의 웃고 있지만 살기가 느껴지는 표정을 오랜만에 봤다. 저 형 분명 카메라만 없었으면 온갖 비방용 발언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들 표정 관리를 하고 있지만, 옷을 쥐고 있는 주먹에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승빈 군, 크리드가 최약체 팀에 뽑히게 되었는데 각오 한마디 한다면?”
나는 침착하게 답했다.
“오늘 무대로 그 생각, 완전히 바꿔 놓겠습니다.”
“승빈아, 멋있다!”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멤버들과, 경쟁자임에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치는 성재 형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
“최강자 팀으로는 포커스가 뽑혔습니다. 선샤인과 하이드가 뽑았네요.”
‘선샤인이랑 결탁이라도 한 건가? 그래도 하이드는 의외네.’
“포커스를 뽑은 이유가 있을까요, 하이드의 현재 군?”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어선 유현재가 짧게 답했다.
“전 안 뽑아서 모르겠는데요.”
“…아, 다른 멤버들과 의견이 달랐군요!”
돌발 상황이었지만 성훈은 능숙하게 넘어갔다. 저러다가 악편이라도 당하면 어쩌려나 싶었지만, 하이드가 윤피디의 악편 스타일에 맞는다면 우리의 악편이 줄어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원까진 아니고… 적당히 어그로 끌어 주길 바란다.’
역시나 선샤인은 포커스와 무언가 있는지 구구절절 포커스를 최강자 팀으로 뽑은 이유를 설명했다. 자꾸만 시선이 흔들리고, 안절부절못하는 게 눈에 너무 보여서 안쓰러울 정도였지만.
“그럼, 최강자 팀으로 뽑힌 포커스가 무대 순서를 정하겠습니다.”
포커스가 정한 무대 순서는 크리드, 투샤인, 하이드, 선샤인, 포커스 순서였다. 예상한 대로였다. 모두가 기피하는 첫 번째에 우리를 넣은 것도, 피날레를 장식하는 마지막에 본인들을 넣은 것도.
“잠시 쉬었다가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휴식 시간이 되어 대기실로 돌아가자 모두 긴장이 풀렸는지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최약체 팀이라니… 자존심 상해요.”
“이미 인터뷰로 다 말해 놓고 뽑을 사람 없어서 뽑았다? 이거 완전 엿 먹이는 것도 아니고.”
“선우 형, 진정해요. 어디서 또 카메라 돌고 있을지 모르니까.”
넥스트 레벨도 투마이월드 못지않게 많은 카메라 설치로 유명했다. 회귀 전 걸그룹 버전일 때 대기실에서의 대화가 악편을 당하면서 대중의 질타를 받고 이미지에 큰 피해를 입은 그룹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다행히 선우 형이 분노를 삭인 후에 스태프들이 카메라를 설치하러 왔다. 나는 선우 형의 입에 달달한 간식을 물리고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저거 다 견제하려고 저러는 거 알잖아.”
“맞아. 오늘 무대로 증명하면 되는 거야.”
강도현과 음료수를 사러 가는 복도에서 포커스 멤버들이 단체로 루커스 성훈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선배님! 오늘 정말 멋있으셨어요!”
“응? 어, 그래요.”
“저희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응, 수고하고. 이따 녹화 때 봐요”
“네!”
의외였다. 직속 후배 그룹이어서 나름 아낄 줄 알았는데 어딘가 꺼림칙한 표정과 태도였으니까.
그리고 이어진 성훈의 행동은 더 의외였다. 포커스가 대기실로 돌아가고, 우리 쪽으로 걸어오던 성훈이 강도현과 나를 아주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다.
“어, 도현이 오랜만이네-”
“네! 저 데뷔하고는 처음 보는 거죠, 선배님?”
“야, 무슨 선배님이야, 어색하게. 그냥 형이라고 해.”
“그래도 돼요?”
역시 강도현이 친화력 하나는 최고다. 성훈과 연습생 생활이 겹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가끔 조언을 해 주거나, 월말 평가 참석을 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친해진 걸 보면.
“당연하지. 승빈이도 오랜만이네! 진짜 너희 왜 VM 나갔냐…….”
“전 아직 VM이에요, 형-”
“이건 뭐, 빨리 겸업하라고 할 수도 없고… 무슨 선후배 케미, 내리사랑 보여 주고 오라는데- 죄다 애매하거나 급하게 데려온 애들로 꾸려 놓고는 내리사랑은 무슨. 솔직히 말해서 진짜 직속 후배는 너랑 승빈이지.”
하긴, 김병대를 제외하고는 연습생 기간이 그다지 길지도 않고, 오재성 역시 급하게 수혈한 멤버였을 테니까. 지난 생도 이번 생도 VM에서는 버려진 카드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말해 주니 얼떨떨했다.
“승빈이가 마지막에 좀 아쉽긴 했지?”
“제가 그땐 부족했던 거죠.”
“그래도 더 좋은 기회로 데뷔하게 됐으니 축하해.”
“감사합니다.”
“곧 녹화 재개하겠다. 그때 보자-”
“네!”
뜻밖의 든든한 아군이 생긴 기분이 들었다.
* * *
오프닝 촬영 후 무대용으로 메이크업 수정을 마치고 모두 한곳에 모였다.
“와, 이러니까 진짜 투마이월드 때 같네?”
“반년 전으로 돌아간 거 같아.”
“볼 터치 이렇게 진하게 한 것도 오랜만이지?”
“어차피 곧 지워질 거지만?”
지난 시상식 무대 이후로 다들 자연스럽게 구호를 외치고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면 뭔가 사기가 충전된다나?
“본 투 샤인!”
“씨넷에 한 방 먹이고 오자고-”
선우 형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였고, 멤버들 역시 동의의 눈빛을 보내며 웃었다.
촬영장으로 향하는 대기실에서 투샤인과 포커스를 마주쳤다. 익숙한 마린 룩에 투마이월드를 함께했던 두 명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와, 이거 투마이월드 마린 룩 아니야? 진짜 오랜만이다-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라더니 이거였구나?”
“대놓고 투마이월드 코인 타겠다는 거네요?”
김병대의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성재 형의 말에만 답했다.
“저희도 오랜만에 입어서 감회가 새로워요.”
“반바지에 볼 터치 진한 거까지 완전 재현해 냈네!”
“무대 재밌게 봐 주세요.”
“당연하지-”
선샤인은 지난번 일은 까맣게 잊은 것인지 여전히 선우 형을 겨냥하며 비아냥댔다.
“저렇게 하면 뭐 해? 입 열면 깰 텐데.”
잠시 선우 형의 어깨가 움츠러드는 게 보였지만, 자연스럽게 어깨동무하며 숨겼다.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형, 목소리가 얼마나 큰 무기인지 알죠?”
“…응”
“기죽은 거 아니죠?”
“당, 당연하지!”
조명이 들어오고, 큐 사인과 함께 다시 촬영장으로 입장했다. 무대가 더 넓어졌다. 대면식 무대인데도 거대한 세트와 무대 장치를 가져온 팀이 있었다. 아마 VM이겠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자본에는 자본으로 맞서 주겠다는 소리다.
“크리드, 무대 준비하겠습니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무대로 향했다. 그리고 엄청난 다인원 댄서들의 등장에 현장은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족히 50명은 되어 보였으니까.
마침내 현장이 암전되고, 모두 정해진 자리로 향했다. 무대가 시작되기 전 VCR 하나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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