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203화 (203/346)

203화

첫 번째 대면식 무대의 주제는 ‘WHO AM I’였다. 아마도 팀의 정체성을 증명할 무대를 준비하라는 뜻이겠지. 곡 선정 과정부터 이전과는 또 다른 부담감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게 갓 데뷔한 신인이거나 겨우 2년 된 그룹들끼리인데, 이미 수많은 연말 무대와 시상식에서 각자 데뷔곡을 써 버렸고 남은 경연 선곡도 고려해야 했다.

“그나마 우리는 2집까지 냈으니 다행이지…….”

“성재 형도 어이없어 하더라고요. 투샤인은 데뷔한 지 이제 2개월 되어 가는데 웬 서바이벌이냐고.”

아마 회귀 전과 같은 포맷의 프로그램이라면 타 그룹의 노래를 커버하는 미션도 있겠지만, 더 이상 미래를 확신할 수 없으니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 봐야 했다. 미니 앨범 2집까지 내면서 단독으로 할 수 있는 곡이 8곡 정도 된다. 그중 신세계는 이미 사용했으니 제외해야 했다.

“사실 자기소개라는 키워드에 데뷔곡만큼 적합한 것도 없는데.”

선우 형이 아깝다는 듯 말하자 박재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하지만 했던 곡을 또 보여 주는 건 너무 아쉽잖아요.”

지운이 형과 나도 의견을 덧붙였다.

“맞아. 그리고 이미 시상식이나 다른 무대에서 많이 보여 준 무대이기도 하고.”

“크리드는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준다는 걸 무대에 녹여 내고 싶어.”

다른 팀들과 대중들도 주제를 들었을 때 우리가 데뷔곡인 ‘신세계’를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남자 아이돌 최단 시간 1위 곡이고, 투마월 종방 이후 가장 화제성이 높았던 시기에 낸 노래였으니까. 하지만, 이럴 때 대중들의 허를 찌르는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했다.

머릿속으로 수록곡들과 타이틀곡들을 떠올려 봤다.

‘회귀 전 넥스트 레벨과 같다면 자기소개, 곡 체인지, 자유곡, 신곡 대결이야.’

가만히 얘기를 듣던 윤빈 형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많이 아는 노래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우리를 모르는 대중들도 있을 거 아니야.”

윤빈 형의 걱정도 이해가 갔다. 새로운 것을 보여 주는 것도 좋지만, 무리해서 모험만 하기에는 리스크가 클 수 있기 때문이다. 곰곰이 고민하던 중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그럼… 생소한 음악에 익숙한 퍼포먼스를 하는 건 어떨까요?”

“응?”

“그게 무슨 뜻이야?”

“주제가 자기소개잖아요. 만약 우리를 모를지라도 투마월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까요? 그래서 퍼포먼스에 투마이월드가 연상되는 퍼포먼스를 넣어 보는 게 어떨까요?”

서바이벌의 경연에 유기성을 넣고 싶었다. 각자 다른 노래와 콘셉을 가진 경연이지만 하나의 메시지를 완성하고 싶었다.

내 말을 들은 유현이 형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투마월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투마이월드를 또 활용한다면 지겹다는 반응이지 않을까?”

예상한 걱정이었다. 일부는 뇌절이라고 생각하겠지, 하기만 내가 의도한 바는 분명하다. 먼저 인정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바이벌을 통해 만들어진 그룹이고, 프로그램의 아성을 등에 업고 데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모두가 예상하는 수준과 적당한 성공에 만족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크리드가 추구하는 음악적 색깔과 방향 역시 투마이월드와는 다르다는 것을 선언하는 무대를 꾸미고 싶었다. 어찌 보면 투마이월드는 크리드의 서사를 위해 철저히 이용되는 셈이다.

“투마이월드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되, 이제는 완벽히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을 보여 주는 거죠.”

아직 완벽히 이해된다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다들 우선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 승빈이 아이디어는 언제나 성공했으니까.”

“대신 우리 말고도 설득해야 할 사람들이 많다는 거, 알고 있지?”

“당연하지.”

이제 누군가를 설득시키는 것에는 두려움이 없다. 설득의 과정은 내 머릿속의 무대를 더욱 구체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니까.

“그럼 노래는 어떤 곡이 좋을까?”

“눈부셔로 시작하려고요.”

“눈부셔?”

“투마이월드를 써먹으려면 제대로 써먹어 봐야지.”

강도현이 손을 들고 내 의견에 동조했다.

“이건 나도 찬성.”

눈부셔로 오프닝을 하면 사람들은 ‘결국 투마이월드팔이 하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내가 바라는 바다.

“그럼 아예 의상도 투마월 마린 룩으로 하죠?”

“좋아. 그리고 눈부셔 무대가 끝나는 순간 확 변화를 주는 거야.”

아이디어의 물꼬가 트이니 멤버들도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내가 머릿속으로 구상하던 무대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멤버들의 입에서 적재적소의 아이디어들이 모이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럼, 우리 곡은 뭐로 하지?”

“그게 고민이네…….”

그때 머리 위로 수록곡 하나가 떠올랐다. 이번 2집의 수록곡 중 하나인 ‘ENEMY’다.

“우리 이번 수록곡 중 Enemy 어때요?”

“Enemy?”

의외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리던 선우 형이 내게 물었다.

“너 오늘 진짜 예상을 빗나가는 말만 한다?”

“제가요?”

“응.”

“그래서 별로였어요?”

“아니, 뭐 그건 아니지만-”

“이번에도 들어 보자. 왜 ENEMY야?”

ENEMY를 떠올린 이유는 하나다. 한 번도 무대로 보여 준 적이 없고,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곡이기 때문이다. 적들에 맞서 항해를 이어 간다는 메시지를 담은 노래로, 빠른 비트와 자유로운 느낌의 곡이다. 밝고, 활기차지만 군무가 중요한 ‘눈부셔’와는 정반대의 퍼포먼스를 보여 줄 수 있는 노래다. 다른 타이틀곡과 시상식 등에서 보여 줬던 수록곡들과는 다르게 대중들이 생각하는 곡의 ‘이미지’가 정해지지 않아서 언제나 새로운 무대를 보여 주겠다는 크리드의 그룹 색과도 걸맞은 무대가 될 것 같다.

노래를 선정한 이유를 설명하자 이번에도 다들 납득하는 눈치였다. 윤빈 형은 벌써부터 눈부셔와 ENEMY를 어떻게 편곡할지에 대한 기대로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유현이 형도 턱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승빈아, 이번 무대 너무너무 재밌을 거 같아!”

“사실 ENEMY랑 눈부셔가 어떻게 연결될지 의문이긴 한데, 잘만 하면 신선하고 재밌는 무대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생각보다 더 진지한 나의 태도에 지운이 형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실망이라니, 부담 갖지 마. 게다가 너는 누구보다 우리 팀을 잘 알잖아.”

“맞아. 그리고 너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아쉬운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건 우리가 같이 짊어져야 할 일이야.”

선우 형의 말에 잠시 조용해졌다. 하긴, 1년에 몇 번 없는 형다운 모습이었으니까. 박재봉은 박수까지 치며 선우 형을 추켜세웠다. 물론 형답게 오래가지 않았지만.

“오- 선우 형이 웬일?”

“멘트 좋았어?”

“아, 지금 말만 안 했어도 100점이었을 텐데.”

“헐.”

“아무튼. 혼자 다 할 생각 하지 말고!”

“당연하죠.”

역시 이 사람들과 있을 때 가장 즐거웠다.

* * *

갑작스러운 미팅 제안에도 오해나 디렉터는 흔쾌히 시간을 만들어 회의에 참석했다.

“많이 당황했겠어요, 갑자기 서바이벌이라.”

“디렉터님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더 많아지게 됐네요.”

“상관없어요. 재밌는 일이 더 늘어난 거뿐이니까.”

역시 보통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일거리가 늘어났다고 싫어할 법도 한데, 정말 이 일을 본인의 재미를 위해 하는 사람다웠다.

“그래서 이번엔 또 어떤 재밌는 무대를 생각했어요?”

“첫 번째 주제가 WHO AM I, 말 그대로 그룹 소개와 같은 무대예요.”

“크리드를 소개하는 무대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투마이월드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좋아요.”

‘이렇게 바로?’

“투마이월드를 이용해 보려는 거죠?”

“…역시 디렉터님 눈은 못 속이겠어요.”

“저도 그런 무대를 기획해 보고 싶었거든요.”

“무슨 뜻이죠?”

“투마이월드 속 여러분과 크리드 속 7명은 완전히 다른 색을 가지고 있죠. 생각해 봐요. 100명이 똑같은 춤을 추고, 똑같은 노래를 하고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같은 표정만을 짓고 있어요. 동작 하나 자신의 색을 보여 주면 튀어 버리는 곳이었죠. 하지만 크리드는 달라요. 각자의 색이 분명하고, 자유롭잖아요. 우린 그걸 이번 무대를 통해 확실히 보여 주는 겁니다.”

어쩌면 독심술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내 머릿속에 있던 모든 메시지가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씨넷에 한 방 먹이는 무대 만들어 보자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게 있는데요…….”

그 후로도 오해나 디렉터는 시종일관 눈에 빛을 내며 내 아이디어를 경청했다. 조금 산만하다 싶을 때면 적절한 조언을 주었고,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크리드가 데뷔하고 꽤 많은 무대를 기획했지만, 이번 무대가 제일 마음에 들 거 같아요.”

“그럴 수 있게 죽을힘을 다해 해 보겠습니다.”

“기대할게요.”

회의를 마치고 연습실로 향하는 길, 상태창에 변화가 생겼다.

[이름: 문승빈]

외모: A

끼: A

보컬: A+

댄스: B-

프로듀싱: B → B+

‘프로듀싱 스텟이 올랐네?’

가장 오르지 않은 스텟 중 하나인 프로듀싱 스텟이 올라 있었다. 이번 무대가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는 것을 확인받는 순간이었다.

* * *

“하필이면 촬영장이 여기야?”

“진짜 오랜만이네.”

“원래 여기에 연습생들 자리 있었지?”

“응, 앞에 심사 위원분들 자리 있었고.”

넥스트 레벨 촬영장에 제일 먼저 도착한 팀은 우리였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함에 몸서리치는 멤버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덕분에 오늘 준비한 무대가 더 의미가 있어질 것 같았다. 시작한 곳에서 끝을 보는 것이 되니까.

“애들아!”

“성재 형?”

“야, 여기 진짜 얼마 만이냐? 나 도착하자마자 소름 돋아서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니까? 이거 완전 PTSD 자극하는 거 아니냐? 어휴, 많고 많은 촬영장 중에 하필이면 여기를 골라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순식간에 조용했던 촬영장이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투마월 때도 느꼈지만 오디오 비는 틈을 주지 않는 형이다. 이렇게 긴장될 법한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모습이 형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는 잘됐어? 잘했겠지, 승빈이가 있는데. 아니, 근데 진짜 제작진들한테 저희 데뷔 2개월 차예요, 가진 노래 4곡밖에 없어요- 빌 뻔했다니까?”

‘아니, 근데, 진짜 없이 말 못 하는 거 보면 진짜 한국인이야…….’

“형은 여전히 목소리가 크네요?”

“아이고, 우리 포커스 오셨네-”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분이… 나잇값 좀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여기 제작진분들 다 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김병대였다. 나이 공격에 잠시 주춤하던 성재 형을 두고 보기만 할 순 없었다.

“입 가벼운 누구 덕분에 씨넷이랑 제작진분들도 난감했다고 들은 거 같은데.”

“…….”

가자미눈으로 보는 김병대와 포커스를 가볍게 무시하고 투샤인과 함께 대기실로 돌아갔다.

“고마워.”

“에이, 뭐 이런 거 가지고. 그리고 자기들은 형 나이 안 된대? 나이 가지고 저러는 게 제일 치사한 거예요.”

“에이씨, 나도 저렇게 파릇파릇한 때가 있었다고!”

복도 가득 성재 형의 울분 가득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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