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하… 저 진짜 소속사 뛰쳐나올까요?”
“진짜 씨넷 애들 지독하네. 내가 나중에 한번 혼내 줄까?”
“네.”
“숨도 안 쉬고 대답하는 거 봐.”
역시 이래서 내가 맘에 든다던 최 피디님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번 꺼도 아주 작정하고 자극적으로 내보낼 생각인가 봐.”
“그런 거면 윤 피디가 제격이긴 하네요.”
“걔는 참 애가 똑똑하기는 한데 말이지.”
“벌써 머리 아프네요.”
“그러게. 너는 윤 피디랑 벌써 두 번째 만나는 거잖아.”
“놀랍게도 세 번째입니다.”
“세 번째?”
“네, 저희 데뷔 리얼리티도 그분이 하셨어요.”
“씨넷 진짜 대박이다. 그냥 돌려 막는 수준이네.”
최 피디님께 듣는 윤 피디 얘기는 또 색달랐다. 걔가 막 나가기는 하지만 실력은 부정할 수 없긴 하다고. 같은 방송사는 아니지만 같은 학교 선후배라 전에는 꽤 친한 편이었는데, 애가 입봉하고 막 나가기 시작하고부터는 자기를 피해 다닌다고.
“피디님을요?”
“어. 내가 대놓고 한 번 뭐라 한 적 있거든. 그랬더니 삐진 게 분명해.”
‘삐진 게 아니라 무서운 거 아닐까요.’
최 피디는 기가 세기로 유명한 연예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편하고 나를 아껴 주는 분이라고 해도 그 위압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윤 피디가 날고 긴다고 해도 세월이 주는 차이를 이겨 내지는 못한 것 같았다.
“암튼 고생이 많겠네. 건강 잘 챙기고.”
“네, 피디님 덕분에 그래도 상황을 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네요.”
“나중에라도 궁금한 거 있으면 연락하고, 내가 후배들 잡아서라도 정보 구해 볼게.”
“감사해요, 피디님.”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정도의 감사함이었다.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렇게 이유 없이 나를 챙겨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게 참 사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 * *
최 피디님과의 만남으로 얻게 된 건 비하인드 스토리뿐만이 아니었다.
“승빈아, 제작자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알아?”
“…뭔데요?”
“펑.크.”
“펑크요?”
“어. 씨넷이 지금 원래 하려던 거 펑크나서 무리수 둔 거잖아.”
“그렇죠?”
“근데 그거까지 펑크나 봐. 어떻겠어?”
“난리가 나겠죠?”
“빙고!”
“그런데 저희가 펑크를 낼 수는 없지 않을까요?”
“물론. 이미 저렇게 티저 영상까지 낸 이상 어떻게든 참여는 시키겠지. 하지만 그 전에 겁을 한번 주라는 거지.”
“겁이요?”
“이리 와 봐. 내가 방법을 알려 줄게.”
그래서 지금 우리는 잠수 타는 중이었다. 애초에 씨넷의 연말 무대가 기나긴 연말 스케줄의 마지막이었던지라, 한동안은 공식적인 일정이 없었다. 심지어 매주 있는 나의 음악 방송 MC 스케줄도 연초 행사들로 인해 2주간 결방이었다. 지금이 딱 기회였다.
다른 멤버들을 설득시킬 생각에 아득했지만, 놀랍게도 모든 멤버가 계획을 듣자마자 바로 동의했다. 아무래도 씨넷의 이번 횡포가 모두에게 충격적이기는 했던 것 같다.
물론 우리라고 바로 잠수부터 탄 건 아니었다. 자그마치 3번에 걸쳐 씨넷과의 대화 시간을 요청했다. 매니저 형들을 통해 한 번, 코어 엔터 직원분들을 통해 두 번, 마지막으로 오해나 디렉터를 통해서까지 세 번. 삼고초려도 이런 삼고초려가 없었다. 바쁘다고 거절, 출장 갔다고 거절 그 이유도 참 다양들 하셨다.
최 피디님은 이미 이런 상황까지 예상하신 걸까. 소름 돋게도 피디님이 말해 준 대로 흘러가고 있었기에, 최후의 수단으로 잠수를 하게 된 거다.
“최소 세 번은 시도하고, 안 될 때 잠수를 써먹는 거다.”
최 피디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잠수는 짧고 확실하게.’
그래서 대낮부터 뛰쳐나왔다. 오늘이 딱 ‘넥스트 레벨’ 제작진들과의 첫 만남이었거든. 건너 건너 얘기를 듣자 하니 이미 다른 소속사는 다 갔다 온 것 같았다. 성재 형한테도 어제 제작진이 소속사로 찾아왔다는 연락이 왔으니까. 우리 팀을 제외하고는 다들 서바이벌 참가를 확정 지었는지 본격적으로 홍보를 위한 보도 자료도 쏟아지고 있었다.
제일 가까운 우리 팀을 제일 마지막에 찾아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씨넷의 입장을 보여 주는 듯했다. 만나 달라는 우리의 요청은 죄다 무시한 채 프로그램 미팅이라니. 어디 한번 X 먹어 보라는 심정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지. 오전 단체 연습을 마치고 나가서 점심 먹겠다는 핑계로 소속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소속사 건물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다 같이 핸드폰 전원을 껐다.
물론 메시지 하나를 남기고.
[저희 안 나갑니다.]
그렇게 가출 아닌 가출을 감행한 우리는 지금 내 자취방에 모여 있었다. 숙소 생활을 하면서 정리한 줄 알았겠지만, 휴가나 가족들이 한국 들어올 때를 대비해서 남겨 뒀거든.
“근데 이걸 가출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나이가 몇인데 가출은 아니지.”
“저는 아직 어린데요?”
“야, 너랑 나랑 5살도 차이 안나.”
“누가 뭐래요?”
이 와중에도 투닥거릴 정신이 있는지 박재봉과 강도현의 유치한 대화가 끝이 없었다.
“우리 딱 2시간 후에 확인하기로 했지?”
“어. 그동안 뭐 하지?”
“그럴 줄 알고 제가 이걸 챙겨 왔죠.”
세상 뿌듯한 얼굴로 박재봉이 주머니에서 꺼낸 건 바로 화투였다.
“재봉아, 너 이런 것도 가지고 있었어?”
“이거 미성년자가 하는 건 불법 아냐?”
“고스톱을 성인만 할 수 있나?”
상상치도 못한 물건의 등장에 다들 입이 분주해졌다.
“저 이래 봬도 고스톱 조기 교육 받은 사람이라고요.”
“조기 교육?”
“네, 명절 때마다 할머니한테 특훈 받았거든요.”
하여간 여러모로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광란의 고스톱 대결.
돈 걸었으면 다들 파산했을 정도로, 박재봉의 완승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고스톱 판이 끝나고 켠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가득했고, 결과는 우리의 승리였다.
* * *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얻게 된 씨넷 측과의 대화 시간. 리더인 유현이 형과 내가 대표로 둘만 참석하기로 했다. 인원이 많아야 유리한 싸움이 아니었으니까. 약속 시간을 아슬하게 넘겨서 들어온 씨넷 기획팀 본부장과 직원들. 코어 엔터로 소속이 정해지기 전에 몇 번 보기는 했지만, 그때도 그다지 기억이 좋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봬도 저 뚱한 표정은 여전하시네.
“그래서 어쩐 일로 나를 보자고 한 거죠?”
“오랜만입니다, 본부장님.”
“넥스트 레벨 관련해서 몇 가지 문의 좀 드리고 싶어서요.”
“넥스트 레벨?”
“네, 당장 다음 달부터 촬영 시작한다는데 저희는 아직도 정식으로 캐스팅 얘기를 듣지 못해서요.”
“씨넷 프로그램인데 당연히 출연해야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것도 하나하나 알려 줘야 하냐는 환청이 들린 것만 같았다.
“아, 그런데 미리 말씀을 안 해 주셔서 지금 최 피디님이 다음 예능하자고 한 거 까이게 생겼는데요.”
“최 피디가? 윤 실장, 콘택 들어온 거 없지 않아?”
“네, 없었습니다.”
내내 동태 눈깔로 뚱한 표정이던 본부장의 표정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것만 같은 다급함이었다.
“당연히 없죠. 최 피디님 캐스팅 직접 하는 거 모르세요? 저 피겨 예능도 피디님이 직접 결정하고 나서 소속사에는 인사차 온 거였잖아요.”
“…….”
“전 이제 MC 말고는 정해진 고정 스케줄도 없고 최 피디님 예능이라 당연히 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갑자기 서바이벌 일정이 생겨서 지금 굉장히 난감해진 상황이거든요.”
피디님이 자기 마음껏 팔아먹어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제대로 이용해야지. 듣자 하니 씨넷에서 지난 몇 년간 꾸준히 피디님을 캐스팅하려고 했다는데, 내가 하는 말에 제법 당황스러워 보였다. 당장 내가 최 피디의 다음 예능에 참여 못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최 피디가 씨넷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거였다. 정확히 그 부분을 노린 거였고.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건가?”
“안 물어보셨잖아요.”
“아니, 지금 최 피디 예능을!”
“당장 다음 달인 서바이벌도 모르는 저희도 있었는데요?”
“…….”
“심지어 다른 참가자인 포커스도 알고 있던 내용을요? 저희가 모르는 사이 저희 소속이 바뀌기라도 했나 보죠?”
유현이 형이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언제나 차분한 형은 이런 순간에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본부장과 차분한 표정의 형을 번갈아 바라보니, 형 쪽이 좀 더 임원진 같아 보였다.
‘나중에 한자리 차지하는 거 아냐?’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원하는 거요? 제가 원하는 게 있을 리가요. 시키면 해야죠~ 슬프게도 최 피디님과는 이제 빠이겠지만.”
“우리한테 대화를 요청했던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
“아, 알고 계셨어요? 저는 그것도 모르시는 줄 알았죠. 매번 바쁘셔서-”
“…….”
일그러지는 표정이 꽤 볼만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아이돌 멤버한테 이런 취급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모르셨겠지. 뭔가 윤 피디보다도 쉽게 느껴졌다. 문어대가리 정도? 회사 임원쯤 되면 다 이런 건가.
“두 가지만 들어주시면, 넥스트 레벨에 참여하겠습니다.”
“두 가지? 어디 한번 들어나 보지.”
“우선 첫 번째로 저희의 무대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는 표정이었다.
“두 번째로는, 저희가 우승하면-”
오로지 두 번째 제안을 위한 자리였다. 그렇기에 두 번째 제안을 듣자마자 본부장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게 지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서 하는 말인가?”
회의가 시작되고 가장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유현이 형의 눈동자도 처음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겐 회심의 아이템이 있었다.
“곧 가능해질 겁니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설득의 힘 활성화.’
이내 본부장의 머리 위로 설득의 힘이 활성화됐다는 문구가 보였다.
[보상 수령! ‘설득의 힘’ 활성화 1%…….]
“그게 무슨 말이지?”
“충분히 우승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드리는 제안입니다.”
[보상 수령! ‘설득의 힘’ 활성화 99%…….]
“저희 투마이월드에서도 살아남은 거 다 보셨잖아요.”
[보상 수령! ‘설득의 힘’ 활성화 100%]
“그래, 우승한다면 그렇게 하지. 우승을 한다면 말이지.”
아슬아슬했지만 제대로 먹혔다. 아니 근데, 우리가 우승할 일이 없을 거라는 반응이라니. 대체 얘네는 누구 편인 거지?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유현이 형이 답지 않게 고조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어떻게 한 거야? 완전 벽 보고 대화하는 기분이었는데 갑자기 수락을 하고…….”
“다 저의 진실된 눈빛 덕분이죠.”
“그게 뭐야-”
‘뭐긴 뭐야, 설득의 힘이지’
물론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시도였다. 신인상 퀘스트 보상으로 받게 된 ‘설득의 힘’이 없었다면, 이렇게 쉽게 협상을 할 수 없었겠지. 처음 보상으로 떴을 때는 이게 뭔가 싶었는데, 이렇게 쓰일 줄이야.
보상 수령을 누르자마자 바로 다음 미션창이 떴지만, 감당할 만큼 유용한 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