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NEXT LEVEL]은 유명 걸그룹 5팀이 매주 경연 무대를 꾸미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다. 매주 자극적인 편집과 눈과 귀를 사로잡는 무대로 화제성 높은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금 남자아이돌로 넥스트 레벨을 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가는 타이밍이었다.
선배 그룹인 블라썸 역시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블라썸이 데뷔한 지 3년쯤 되던 시기였고, 다른 걸그룹들 역시 비슷한 연차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데뷔한 지 고작 1-2년 된 신인들로만 프로그램을 구성하다니, 씨넷의 머릿속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또 서바이벌에 나가라고?”
“우리한테는 아무 말도 없었잖아…?”
5팀 모두 우선 대기실로 돌아왔지만, 다들 멘붕 상태였다. 아무래도 씨넷이 모든 그룹에 얘기도 없이 준비한 게 맞는 것 같았다.
당황스러웠다. 회귀 전과 다른 사건들이 발생하긴 했지만, 이렇게 큰 변동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넥스트 레벨’은 걸그룹 서바이벌이어서 회귀 전 사건들을 정리할 때 넣을 생각도 안 했던 프로그램이었다.
‘무언가 자꾸 균열이 생기고 있어’
이게 진짜 게임이라면 오류가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 언질이라도 줄 텐데, 이 X가지 없는 상태창은 될 대로 되라 식이다. 현실이 게임보다 더 거짓 같다니.
“승빈아, 너는 알고 있었어?”
“그러게. 씨넷 소속이잖아요.”
성재 형의 질문에 대기실에 있던 모든 인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말은 안 했어도 다들 궁금한 눈치였다.
“아니, 우리도 지금 처음 봤어.”
“그게 말이 돼? 너희한테도 얘기를 안 해 줬다고?”
다들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이었지만, 충분히 이해했다. 나도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냐.
“진짜 몰랐어요? 대박이다.”
언제 왔는지 오재성이 또 눈치 없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특유의 그 재수 없는 웃음을 지으면서 물어보는 게 역시 오재수 다웠다.
“어.”
“우리는 알았는데? 크리드가 몰랐다는 거예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희는 알았다고?”
머리에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우리도 몰랐던 내용을 포커스는 알고 있었다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처음에는 오재성이 장난치는 줄 알았다. 지금까지의 전적을 보면 사람 긁으려고 거짓말하는 건 일도 아닌 인간이었으니까.
“응, MC도 루커스 선배님이 하시는데?”
하지만 이어지는 김병대의 말에 순간 맥이 풀렸다. 적어도 김병대가 강도현한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으니까. 오재성이 지껄인 게 사실이라는 소리였다.
‘씨넷이 대체 무슨 생각이지.’
서바이벌의 존재를 알려 주지도 않았으면서 단체 무대의 센터는 우리에게 준 것도 의심스러워졌다.
“진짜 이 정도면 씨넷이 버린 카드 아닌가?”
“뭐라고?”
“아니, 그렇잖아요. 무슨 서바이벌 출연을 소속 가수한테 말도 안 해 줘?”
“그러게. 어떻게 몰랐지?”
정도를 모르고 내뱉는 오재성의 말에도 대꾸할 의지가 사라졌다. 지금 눈앞에서 쟤가 뭐라고 하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씨넷 이 새끼들을 어떻게 족치지.’
“적당히 하지?”
“제가 무슨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강도현 선배님?”
생각에 잠긴 나를 대신해서 강도현이 제지했지만, 이제는 눈치 볼 것도 없다는 듯 오재성의 폭주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쟤 나중에 강도현이랑 같이 활동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일 없이 지껄이고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게 딱 회귀 전 오재성의 모습이랑 똑같아서 그럴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헛웃음이 나왔다.
“와, 이거 시작부터 재밌네. 대놓고 조작하겠다는 거 아닌가?”
“네?”
“아니, 여기 다 모르는데 왜 너네만 알고 있어. VM이 돈 먹이지 않는 이상?”
“지금 무슨 소리를-”
놀랍게도 그런 대화의 흐름을 끊은 건 유현재였다. 재밌다는 말과 달리 살벌한 표정의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재성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게. 재성 씨가 아는 게 많네. 뭐, 무대도 벌써 준비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 유현재의 말을 받아 비꼬듯 질문을 던졌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오재성의 방자함을 더 이상 지켜보고 싶지는 않았다. 설마 해서 던진 질문이었지만 오케이, 포커스 멤버들 표정 보니까 맞나 보네. 그 당당함은 다 어디 가셨는지 오재성도 순간 당황한 듯 보였다.
“그게 무슨…!”
“이야, 얼마나 대단한 무대를 준비하려고?”
“그 정도로 준비했는데 못 이겨도 재밌겠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뒤집혔다. 한 팀만 서바이벌의 존재 및 출연 사실을 먼저 알고 있다는 걸 들은 다른 팀들이 전부 분노하기 시작한 거다.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를 자극하려고 던진 말이었으나, 경쟁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니까. 모두의 따가운 시선이 포커스 쪽으로 향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치듯 먼저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성급함으로 일을 그르치는 건 여전했다.
“우리도 앞으로 자주 보겠네요?”
“…….”
“그래서 전투가 콘셉이라 그랬구나. 그것도 모르고 운동만 존X 했네.”
어쩐지 그새 몸이 더 좋아졌다 했더니, 전투 콘셉인 단체 무대를 위해서 몸을 더 키운 듯했다. 새삼 유현재가 이렇게까지 무대의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다. 쟤도 참 고생이네.
“골치 아프게 됐네.”
유현이 형의 한숨 섞인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이드 역시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선샤인도 우리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자리를 떠났다.
“이게 무슨 일이냐 진짜…….”
“형, 저희 어떻게 해요?”
“야, 왜 울려고 해-! 형 못 믿어? 형 투마이월드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야-”
“형만 믿을게요!”
급하게 멤버들을 달래는 성재 형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저기야말로 진짜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을 거였다. 데뷔하자마자 서바이벌이라니. 하지만 지금 남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던 유현이 형이 멤버들의 상태를 파악했다.
“다들 괜찮아?”
“서바이벌 자체는 괜찮은데… 좀 열받네요.”
“저도 도현이랑 같아요. 포커스 애들 말이 사실 틀린 것도 아니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씨넷 계열사인 저희한테는 아무 말도 없고, VM만 알고 있었다는 게 어이없기도 하고요.”
“맞아. 대체 무슨 생각이지?”
한구석에서 간식을 주워먹던 박재봉도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전 서바이벌도 싫어요. 아직 투마월 때 일로 악몽을 꾸는데.”
“재봉이 악몽 꿔?”
“가끔요.”
“말을 하지. 무슨 꿈인데?”
“아, 그냥 리프트에서 떨어질 뻔했던 거요. 지금은 거의 안 꾸긴 해요.”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더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선우 형의 말에 침울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환기되었다.
“근데 나도 가끔 눈뜨면 눈부셔 춰야 할 거 같아.”
“헐, 형 저도요! 뛰쳐나가야 할 거 같고!”
“맞아. 다들 똑같구나?”
우리를 만나고 데뷔시켜 준 프로그램이지만, 다시 투마월을 하겠냐고 하면 다들 망설일 게 분명했다. 그만큼 힘들었던 시간이었으니까. 서바이벌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기겁을 하던 사람들이었는데, 데뷔한 지 1년도 안 지나서 다시 서바이벌이라니.
‘진짜 이번 생도 뭐 하나 쉬운 일이 없다…’
* * *
씨넷이 대체 무슨 생각일까.
예상치 못하게도 그 답을 얻은 건 바로 최 피디님으로부터였다. ‘플레이 온 아이스’ 시즌 1이 끝나고 휴식기를 갖고 있던 피디님이 근처에 왔다는 연락에 소속사 인근 카페로 향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간 자리였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피디님이 꺼낸 건 의외의 주제였다.
“땜빵용 기획이라고요?”
“어. 씨넷이 최근에 투마월 같은 걸 하나 더 런칭하려고 했나 봐.”
“투마월은 2년에 한 번씩만 하잖아요.”
“그니까! 근데 이번에 너희가 너무 잘되니까 남자로 하나를 더 하려고 한 거지.”
알고 보니 오늘 만난 지인이 씨넷 소속이라 얘기 듣자마자 내 생각이 나서 연락하신 거라고 하셨다. 어쩐지 왜 이런 대낮부터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으셨나 했더니, 상상도 못 했던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잠깐이라도 피디님이 연예인병 걸리셨나 의심했던 걸 혼자 속으로 사과드렸다.
“아… 투마월 다음 시즌은 걸그룹 차례니까요?”
“어, 맞아. 근데 괜찮은 애들이 너무 없었나 봐.”
“참가자가요?”
“어. 너네는 원소속사가 각자 있었잖아. 너는 아니지만-”
“그렇죠?”
“그래서 아예 소속사 없는 애들을 모으려고 했나 봐. 그래야 계약하기 유리하니까.”
“아…….”
“근데 좀만 잘생긴 애들은 이미 다 길거리에서 캐스팅당했을 건데, 그게 구해질 리가 있나. 그래서 급하게 그거 땜빵으로 이미 데뷔한 그룹끼리의 서바이벌을 짠 거야.”
어쩐지 얼마 전부터 매니저 형이나 회사 분들이 주변에 같이 연습생 하다가 그만둔 친구 없는지 물어보기는 했다. 연습생도 아니고 하다가 그만둔 사람을 찾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게 다 서바이벌을 위한 캐스팅 때문이었다니. 어느 정도 쓸 만한 애들을 미리 캐스팅하고 남은 인원만 공개 오디션으로 뽑을 생각이었겠지.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요?”
“지금 투마월 다음에도 음악 서바이벌 두 개나 나왔는데 다 망했잖아. 초조해진 거지.”
그럴 만도 했다. 서바이벌에 미친 씨넷에서는 그사이에 보컬과 밴드 관련 서바이벌을 방영했지만, 둘 다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조용히 끝났다. 주주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콘텐츠가 없자 급하게 남자아이돌 서바이벌을 기획했다는 게 이야기의 결론이었다.
“너희랑 포커스 걔네만 나와도 이미 게임 끝난 거니까. 얼마나 방송 만들기 쉽겠냐?”
내가 아예 서바이벌 참여하는지도 몰랐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인지는 몰라도, 최 피디님도 썩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난 그렇게 아무런 고민 없이 프로그램 만드는 인간들이 싫어.”
“고민이요?”
“어.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신념 없이 그냥 자극적인 것만 다 때려 박는 거잖아.”
“피디님도 대결 좋아하시잖아요.”
“그래서 1등 한 너랑 꼴찌 한 출연진이랑 뭐가 달랐어?”
“제가 우승하고 상품 받은 거 말고는 크게 다르지는… 않았죠?”
“그거 봐. 나는 대결을 재미 요소로 삼기는 하지만, 진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거든.”
“근데 씨넷은 서바이벌에서 탈락하면 아예 인생 자체를 패배자로 만들어. 사람 멘탈을 아주 쥐어 짜내는 거지.”
맞는 말이었다. 플레이 온 아이스 모든 편을 다 돌려 봐도 낮은 등수를 받았다고 좌절하는 출연진은 없었다. 연습했던 동작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는 아쉬워했어도, 준비한 무대를 다 해낸 사람들에게 등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그렇네요. 역시 피디님이 짱이에요.”
“그건 나도 잘 알아. 암튼 승빈이는 또 윤 피디 보겠네?”
“윤 피디요?”
내 리얼한 반응에 최 피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 이것도 못 들은 거야? 그거 윤 피디가 맡는다던데.”
하, 아무래도 씨넷을 죽여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