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저 사람 이름이 지운이에요?”
“네, 저희 팀 메인 댄서 차지운입니다. 선배님이랑 동갑이에요.”
“와- 그 해에 뭔가 문제가 있었나?”
“네?”
“우리 둘 다 살벌하게 생겼잖아요.”
“자꾸 우리 형한테 뭐라 하지 마시죠?”
“이거 뭐, 형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자기 이름을 들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지운이 형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의아함이 담긴 눈동자에 별일 아니라는 듯 살짝 어깨를 들썩였다.
“무서운 사람끼리 인사 좀 해 볼까-”
“형한테는 무섭다는 얘기 절대 하지 마세요.”
“왜요? 후배님이 말해 준 거잖아요. 차지-”
“아, 선배님!”
미치겠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 고함이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튀어 나간 목소리는 제 주인 맘도 모르고 커지기만 했다. 형을 부르려는 유현재의 입을 나도 모르게 틀어막았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대?”
“유현이 형, 오랜만이다.”
다행히도 지운이 형한테는 안 들린 거 같았지만, 그 소리를 듣고 다가온 인물은 뜻밖에도 유현이 형이었다.
“형, 이 사람 알았어요?”
“이 사람이라니- 듣는 이 사람 서운하게.”
“하… 형 이분이랑 아는 사이였어요?”
“어, 현재랑 잠깐 같이 연습했었어.”
“와, 유현이 형 실망. 우리가 그냥 같이 연습한 사이는 아니잖아?”
“그럼 뭔데요?”
“같이 살았던 사이지-”
“어, 숙소에서 잠깐 룸메였어.”
“잠깐이요?”
“응, 얘 중간에 회사 옮겨서 데뷔한 거라서.”
“그때 유현이 형이랑 같이 나가자고 했는데, 형이 안 나왔지.”
“난 아쉬울 게 없었으니까?”
“나도 존버하고 투마월이나 나올 걸 그랬나?”
“네가 대체할 수 있는 자리가 없을 텐데.”
“또 모르죠, 형 자리라면.”
둘 다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새삼 연예계 참 좁다 싶었다. 어떻게든 다들 연결되어 있네. 둘이 같은 팀이 될 뻔했다니. 그랬다면 가요계가 또 한 번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세기의 비주얼이 둘이나 있으니. 어쩐지 하이드라는 그룹에 비해 유현재가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했더니, 데뷔 직전에 수혈된 인재였나 보다. 그러니 기존 멤버들과도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겠지.
* * *
개별 팀 무대는 색을 콘셉으로 진행됐다. 단체 연습이 끝나고, 피디는 모두에게 말했다. 각자의 팀은 빨강, 노랑, 초록, 파랑, 흰색 중 하나를 담당할 것이라고, 그리고 덧붙였다.
“우리가 원하는 건 하나예요. 여러분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무대를 보여 주는 것.”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빨강을 떠올렸다. 붉게 타오르는 불을 연상시키고, 가장 강렬한 색이며 어떤 색과 섞이더라도 잡아 먹히지 않는 색. 그만큼 빨강은 강한 색이니까.
“우리만의 ‘강함’을 보여 주는 무대를 꾸미고 싶어.”
“저도 동의해요!”
무대를 준비하기 앞서서 무대의 테마와 콘셉을 정했다. 우리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전쟁의 신 아레스를 모티브로 무대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빨강 조명에서 묻히지 않기 위해 의상은 하얀색 계열과 금색으로 포인트를 주기로 했다.
퍼포먼스는 지금까지 했던 것 중에 가장 난이도 높고, 체력 소모가 컸다. 거대한 무대 장치까지 활용해야 했기에 추가적인 연습도 필요했다. 오해나 디렉터에게 조언을 구하니 이번에도 나만큼이나 열정적으로 무대 기획을 도와줬다.
“승빈 군은 아이돌 안 했으면 이쪽 길 왔어도 됐을 거 같아.”
“디렉터님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솔깃한데요?”
“이번에도 무척 흥미로운 무대가 될 거 같아요.”
“저도 기대가 커요.”
무대에 쓰일 곡은 데뷔곡 ‘신세계’였다. 윤빈 형과 소속사의 프로듀싱 팀이 원곡보다 더 웅장하고, 강렬하게 편곡했다. 정말 금방이라도 전투에 참전할 거 같은 비장함이 느껴졌다. 둥둥거리는 드럼 소리와 호른 소리에 무대 위에서 듣는다면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기존의 고음도 3단으로 바뀌면서 에너지를 배로 터뜨리는 구간이 생겼다.
[NewWorld- Yeah-]
“승빈아, 너무 좋은데? 이걸 한 번에 오케이 만드네!”
“승빈이 실력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니까? 무서울 정도야-”
복구된 스텟이 제대로 힘을 발휘했다. 답답함 없이 원하는 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어서 부르는 동안 더 신이 났다.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다!”
“빨리 클로버랑 대중분들한테 보여 주고 싶어요! 우리가 이렇게 잘한다!”
아이돌에게 있어서 무대에 자신이 있다는 것만큼 큰 자신감이 없다. 새삼 우리 팀이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있고, 가질 만한 실력이 있다는 것이 뿌듯했다.
무대 당일, 헤메코를 받은 멤버들은 역대급으로 강렬한 스타일링에 서로 낯을 가리고 있었다. 짙은 화장과 옆구리 트임 등 지금까지 의상 중 가장 노출이 많았다. 나도 화려한 머리 장식과 평소보다 진한 메이크업을 했다. 그리고 어깨가 트인 의상이었는데, 뭔가 적응이 안 됐다.
모두 파격적인 변화가 있었지만, 특히 지운이 형은 그 형의 진짜 모습이 어떤지 다 알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포스에 가까이 가지 못했다. 오늘 무대를 위해 백금발로 탈색까지 하면서 흡사 뱀을 보는 듯했다. 물론 금방 적응됐지만.
“승빈이는 과일주스? 커피는 먹으면 목에 안 좋잖아.”
“네, 네!”
“…나 그렇게 무섭게 생겼어?”
“아, 아뇨! 전혀!”
팔자 눈썹이 되어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형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됐다. 무대 위에서 얼마나 강렬할까.
“크리드 스탠바이해 주세요!”
“네!”
“다 부수고 오자!”
선우 형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무대 위로 올랐다. 암전된 무대지만 관중들의 환호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 * *
“미친, 시작하나 봐!”
조명이 들어오고 센터에 우뚝 선 박선우가 바닥을 뚫을 묵직한 저음으로 외쳤다. 금색의 얼굴 장식이 반짝이면서 비현실적인 외모를 한층 빛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살벌한 눈빛이었다.
[승리가 아니라면 죽음만을!]
“야, 끝났다.”
“박선우 미친 거 아님?”
뒤이어 승빈의 파트가 시작됐다. 눈 밑에 붙인 파츠가 각도에 따라 반짝이고 있었다. 조명 테러를 걱정했지만, 다행이었다. 격렬한 안무가 이어졌지만, 음정 한 번이 흔들리지 않았다. 삑사리가 날 거 같다는 일말의 불안함도 없었다.
[두 발로 걸어가 미지의 세계
절대 쓰러지지 않아
두려움 따위 잊은 지 오래
신세계를 향해 달려가]
“미친… 내가 아는 강아지 중에 승빈이가 제일 노래 잘함.”
“라이브 안정적인 거 봐, 미쳤다.”
그리고 모두의 탄성을 자아내는 장면이 나왔다. 바로 차지운의 파트였다. 자신의 키만 한 창을 들고 센터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데 모두를 압도하는 포스였다. 전쟁의 신 아레스가 모티브라고 했지만, 하데스를 떠오르게 했다. 삼백안을 치켜든 차지운이 걸어 나오면서 양옆으로 윤빈과 정유현이 나오는데 말도 안 되는 비주얼이었다.
[NewWorld- Yeah-]
이어지는 승빈의 삼단 고음. 현장 가득 고음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고, 관중석에서도 진동이 느껴질 만큼 성량이 엄청났다. 승빈이 빨강색 크리드 로고가 그려진 깃발을 무대 중앙에 내리꽂으면서 무대가 끝났다.
“소름 돋아…”
* * *
단체 무대를 앞두고 멤버들이 개별 무대와 달리 긴장한 게 눈에 보였다. 아무래도 5개 팀 중에서 가장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겠지. 마침내 다가온 결전의 순간.
“다들 모여 봐.”
유현이 형이 멤버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다들 긴장한 거 같은데, 구호 한번 외치고 가자.”
모두 유현이 형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쳤다. 심장이 뛰는 속도는 무대 음향으로 둥둥거리는 진동과 맞먹었다.
“본 투 샤인!”
수많은 빛들 사이에서도 빛나야 하는 것, 그게 우리의 숙명이니까.
* * *
이어진 단체 무대는 강렬한 밴드 사운드에 맞춘 군무였다. 앞에 각 팀의 메인 댄서를 필두로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뒤에는 각자의 색과 문양을 가진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마치 다섯 개의 국가를 대표하는 신들의 싸움을 보는 듯했다.
“독기 미쳤다.”
“의상부터가…….”
K의 말처럼 메인 댄서들의 의상만 봐도 엄청났다. 개별 무대와 의상이 살짝 바뀌었는데, 각 그룹의 샵에서 경쟁이라도 붙은 건지 헤메코에 영혼을 갈아 넣은 게 적나라하게 보였다. 하이드의 유현재는 아예 상탈에 자켓 하나만 걸쳤다. 두 곳이 모두 보이면 안 된다는 심의 때문인지 한쪽만 고정되어 있었다.
“지운이 크롭 미친 거 아니냐고-”
“승빈이 어깨 트임 아이디어 누구냐?”
“와중에 재봉이만 꽁꽁 싸맨 것도 귀여워.”
그래도 역시 씨넷의 아들이라고, 센터는 크리드의 차지였다. 다른 팀들의 실력과 비주얼도 쟁쟁했지만, 밀리지 않고 무대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새롭게 열려 It“s a REVOLUTION
잠들어 있던 본능을 깨워
전쟁 같은 이 정글에서 살아남아
모든 걸 I’ll take it all-]
하이라이트 고음 파트 역시 승빈이 맡았다. 그 많은 인원 중에서도 최전방 센터에 서서 파트를 소화하는 모습에 문스트럭은 등줄기부터 소름이 돋았다. MR과 밴드 소리가 엄청났음에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이전 연말 무대에서 어렴풋이 느꼈던 불안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락 장르에 도전하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밴드 사운드에 맞춰 평소보다 더 거친 발성으로 노래하는 것이 느껴졌다. 까도 까도 새로운 매력을 보여 주는 승빈에 문스트럭은 절로 중얼거렸다.
“이 양파 같은 남자야…….”
각 그룹 센터 클로즈업 엔딩으로 한바탕 폭풍과 같은 무대가 끝나고 현장은 암전이 되었다.
“미쳤다. 오늘 레전드 개 많이 나왔을 거 같아.”
“이제 어느 부분 시상하지?”
“다음 무대는 없나?”
그 순간 밝은 조명이 들어오면서 VCR이 등장했다. 단순히 다음 무대를 예고하기 위한 VCR인가 생각했던 문스트럭과 K를 비롯한 현장의 모두가 경악했다.
“내가 뭘 본 거냐……?”
“…미친 거 아니야?”
전광판에 뜬 로고에 문스트럭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 * *
단체 무대가 끝나고 모두 대기실로 돌아와 남은 시상식을 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VCR 하나가 뒤이어 나왔다.
[5개의 태양, 그중 하늘을 지배할 자 누구인가?]
“…이게 뭐야?”
“씨넷에서 뭐 해요?”
“설마…….”
그리고 그걸 본 모두가 말을 잃었다.
[Who can go up? NEXT LEVEL-]
넥스트 레벨 글자가 점차 확대되더니, 프로그램 로고로 바뀌었다.
아, 한동안 우리 소속사라고 방심했다. 씨넷이 또 씨넷 했네. 어쩐지 남자 아이돌만 왜 5팀이나 모아서 스페셜 무대를 준비시키나 했다. 크리드나 포커스, 투샤인은 올해 데뷔한 신인 그룹이라고 하더라도 선샤인과 하이드는 작년에 데뷔한 그룹이었는데 말이다.
서동요도 이런 서동요가 없었다. 일단 던져 놓고 캐스팅하겠다, 이건가? 포커스는 그렇다 치더라도 성재 형까지 별 얘기가 없었던 걸 보면 그쪽도 몰랐던 게 분명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저 표정을 보면 모르는 게 당연해 보였다. 놀라서 떡 벌어진 성재 형 입에 주먹도 거뜬히 들어갈 거 같았거든.
게다가 씨넷 산하 소속인 우리에게도 말도 안 한 걸 보면 이미 우리는 출연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투마월 끝난 지가 일 년이 뭐야, 겨우 반년 지났는데 벌써 또 서바이벌이라니. 머리가 지끈했다.
그리고 원래 저 프로그램, 걸그룹들의 대결이었다. 미래가 또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