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바다?”
“네, 하루 정도만 애들하고 쉬고 와도 될까요?”
“헐, 저 바다 꼭 가고 싶어요!”
“안 될까요? 형…….”
순식간에 매니저 형 주변으로 멤버들이 몰렸다. 특히 선우 형과 박재봉은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최대한 불쌍하고 간절한 얼굴로 호소했다. 결국, 매니저 형이 두 손 두 발 들었다.
“아, 아니 일단 얘기는 해 볼 텐데…….”
“와!”
“너희 연말 무대 괜찮겠어?”
“방송국 연말 무대는 아직 일주일 정도 남지 않았어요?”
“꼭 하루가 아니어도 좋고, 진짜 잠깐만 갔다 와도 좋아요!”
“크리데이! 크리데이 콘텐츠 찍는 겸 갔다 오는 거여도 좋고요.”
숙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는 벌써부터 바다 여행이 정해진 것처럼 여러 가지 계획이 오갔다.
“가서 조개구이도 먹고”
“바다 구경도 하고”
“회도 먹고 싶어요!”
“근데 왜 갑자기 바다를 가자고 한 거예요?”
“우리 투마월 때부터 연말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잖아. 한 번쯤 리프레시하고, 여유롭게 대화도 하고…….”
“이 시대 최고의 리더로 임명할게요, 형.”
“강도현 또 오버하네-”
“오버라니요, 형? 저의 진심이 안 보이세요?”
들이대는 강도현에 유현이 형이 질색팔색하며 몸을 멀찍이 피했다.
“승빈아, 넌 바다 가서 뭐 하고 싶어?”
“저요?”
지운이 형의 질문에 잠시 멍했다.
바다라… 안 간 지 몇 년 됐다. VM에서 떨어지고 허탈함에 혼자 찾아간 바다 이후로 처음이다. 그날은 연습생 계약 해지를 당한 날이었다. 몇 년간의 흔적들을 모두 캐리어에 넣고 숙소를 떠나는데, 희한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냥 너무 피곤했고, 마음을 다스릴 장소가 필요했다.
미국에 있을 때도 바다에 자주 갔었고, 그때마다 좋은 기억뿐이었으니 이번에도 바다에 가면 마음이 좀 나아지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장 기차표를 끊고 가장 가까운 바다로 향했다. 내 몸만 한 캐리어를 낑낑대며 도착한 바다였다. 날씨도 좋고, 바다도 아름다웠다.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그래서 더 속이 상했다. 아무래도 이 장면과 나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모두 가족, 친구들과 함께 와서 물놀이를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이, 나 혼자 모래사장에 쭈그려 앉아 커다란 캐리어 뒤에 숨어서 엉엉 울었다.
VM에서 데뷔 못 하면 그냥 미국에 와서 학업을 이어 가려던 건 그때나 회귀 후나 똑같았으니까. 그때 기억이 너무 처량해서 그다음부터는 쉬는 시간이 생기거나 여행을 가도 바다는 잘 찾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내가 봤던 풍경들을 천천히 말했다.
‘바다 가서 하고 싶은 건 울지 않고-’
“바다에 발도 담그고 싶고, 라면도 먹고 싶고, 바나나 보트도 타고 싶고, 또…….”
“뭐야, 문승빈 바다 가서 놀 생각만 하고 지냈던 거 아니야?”
“시간 되면 다 하자-”
“근데 바나나 보트 타다가 얼어 죽는 거 아니야?”
VM에서 떨어진 늦봄을 기준으로 말했으니,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 했다. 어깨동무하는 지운이 형과 윤빈 형, 자신은 확신의 J형 인간이니 메모장에 적어 두겠다는 재봉, 가서 어떤 라면을 먹을지로 투닥거리는 강도현과 선우 형, 그리고 옅게 웃으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유현이 형까지. 이 사람들과 함께한 바다는 나에게 새로운 기억을 안겨 주지 않을까- 안심이 됐다.
* * *
“회사에 얘기해 본 결과…….”
“제발…….”
“일단 미안하다, 얘들아.”
“아…….”
역시 연말 무대를 앞두고 갑자기 휴가를 단체로 가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매니저 형의 뒷말을 듣지 않아도 모두 예상하는 눈치였다. 매니저 형이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만 허락받았다, 2박 3일은 안 되냐고 했는데”
“어쩔 수 없죠, 다음 기회에… 네?”
“하루요?”
“저희 바다 가는 거예요?”
“그래!”
너무 감쪽같아서 나도 매니저 형의 연기에 완벽히 속았다. 우리끼리만은 아니고 매니저 형과 동행하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어차피 아직 아무도 면허가 없었으니까. 윤빈 형은 미국에서 면허를 이미 땄지만, 한국 오고 운전을 한 번도 안 해서 자신이 없다고 했다.
“아침에는 사람이 많을 거 같아서… 오늘 저녁에 출발해서 내일 아침에 올라와야 할 거 같다.”
“그게 어디예요- 그럼 짐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 승빈아. 바나나 보트는 나중에 타자.”
“그냥 한 말이었는데, 기억해 줘서 고마워요, 형.”
저녁까지 남은 연말 연습에 매진했다. 모두들 저녁에 떠날 바다를 생각하며 역대급 집중력을 발휘했다. 워낙 말도 많고, 장난도 많이 치는 멤버들이라서 연습 중에 산으로 가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지금 많이 해 둬야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겠지.
“오늘은 여기까지!”
“와! 생각보다 일찍 끝났는데요?”
“응. 너희가 말도 안 되는 집중력을 보여 줬어.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자?”
안무 쌤의 감동받은 목소리를 뒤로 하고 모두 급히 짐을 챙겼다. 하룻밤 있다가 오는 게 전부여서 거창하게 무언가를 챙기지는 않았다. 작은 배낭에 다 들어갈 정도였다. 모두가 배낭이나 작은 캐리어를 챙길 때 박재봉은 제 몸만 한 캐리어를 가져왔다.
“이, 이게 무슨.”
“재봉이 이사 가니?”
“챙길 거 다 챙기라면서요~ 과자랑 게임이랑 다 여기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때는 정말 그런 줄 알았지,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기 전까진 말이다. 박재봉, 지운이 형과 같은 방을 썼는데 캐리어를 열자 온갖 인형들과 간식거리로 가득했다. 게다가 향초랑 디퓨저는 대체 왜 가져 온 거야?
“이거 인형들은 선우 형이 가지고 갈 거예요-”
“재봉아, 우리 일주일 아니고 하루 있다 가는 거 알지……?”
“당연하죠! 그러니까 더 원 없이 하고 싶은 거 하려고요.”
알고 보니 윤빈 형이 향초나 디퓨저 향을 좋아하지 않아서 관상용으로만 쓰던 것들을 챙겨 온 것이었다.
“이런 거 꼭 해 보고 싶었어요, 막 은은한 향초 불에… 완전 멋있고, 분위기 있을 거 같지 않아요?”
멋있어 보이면 일단 하고 보는 박재봉다웠다. 다행히 지운이 형이나, 나도 거부감이 없어서 허락했다.
“다들 짐 풀었으면 바다 가자!”
경쾌한 강도현의 목소리와 함께 모두 우르르 바다로 향했다. 밤바다는 고요했다. 늦은 시간이어서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그 고요함이 더 두드러졌다. 날씨도 좋아서 하늘에 뜬 별이 유난히 더 잘 보였다. 겨울바람이 살짝 차가웠지만,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우와아아아아-”
“위험하니까 바다는 들어가지 마-!”
“알았어요!”
이미 윤빈 형, 선우 형, 박재봉, 강도현은 모래사장에서 한밤의 질주를 하고 있었다.
‘제발 목격담 안 떴으면…….’
누가 볼까 두려울 정도로 초딩들이 따로 없었다.
“애들 진짜 신나 보이네-”
“오길 잘한 거 같아요.”
“응. 오랜만에 바닷바람 쐬고 좋다.”
나머지 셋은 나란히 모래사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CR:ID’를 적던 지운이 형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 앞으로 어떻게 될까?”
“되게 어려운 질문이다, 그거.”
“연습생 때는 데뷔가 목표였고, 데뷔하고 나서는 1위가 목표였고, 평생에 한 번뿐인 신인상까지 받았어. 이렇게 목표를 하나하나 이뤄가는 게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목표의 끝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항상 덤덤해 보이는 형이지만, 분명 고민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고민에 백번 공감한다. 티벡스의 영입 제안을 덥석 물은 것도 데뷔만 하면 내 인생의 목표를 달성한 거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데뷔 이후에 내게 다가온 것은 그저 현실이었다. 거기서부터가 또 다른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떤 목표를 세워야 이루고 나서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하곤 했지만, 결국 이렇다 할 답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떤 답을 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연말 무대가 떠올랐다.
“일단 다음 주에 연말 무대 하고, 클로버 만나지 않을까요?”
“응?”
“승빈이 말이 맞아. 당장 눈앞의 일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자는 뜻이지?”
“네.”
“치밀하게 세운 계획들도 쉽게 틀어질 수 있잖아요. 운명이 늘 좋은 일만 하는 건 아니니까. 아무리 작은 일이어도 하나하나 해내다 보면 뜻밖의 성과를 얻을 수도 있고.”
이렇게 진지한 얘기까지 할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미래와 미션 실패를 겪으면서 이거 하나는 확신했다. 내가 아무리 4년이라는 시간을 미리 살았다고 한들 당장 내일 일은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 유현이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래를 툭툭 털며 말했다.
“누가 보면 인생 2회차인 줄 알겠어-”
‘아무래도 진짜 2회차니까…….’
지운이 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들으니까 위로가 되네. 그리고 어쨌든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멤버들은 내 옆에 있을 거잖아.”
“당연하죠.”
“물론이지.”
“되게 든든해지네.”
내가 좌절할 거 같은 순간에도 형은 늘 내 옆에 있었다. 회귀 후에는 멤버들이 있었고. 그들이 나를 지켜 줬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갚을 때였다. 밤바다의 풍경과 훈훈해진 분위기가 잘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비록 한밤의 질주를 하는 어떤 놈들 때문에 와장창 깨졌지만.
“아! 살려 줘요, 형, 제가 잘못했어요!”
“내려 줘!”
윤빈 형이 이미 선우 형을 어깨에 걸치고 강도현을 잡으려고 뒤쫓고 있었다. 강도현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지 전력 질주 하고 있었고, 박재봉은 관람객이 되어 까르르 웃고 있었다.
“…든든한 거 아직도 유효해요?”
“그냥 귀엽다 정도로 하자.”
“얘들아! 들어가자!”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거 같은데요?”
“가서 회 먹어야지!”
‘회’ 단어에 달리던 강도현도, 뒤쫓던 윤빈 형도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곤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나부터 내려놓고 가라고! 이 미친…….”
“와! 회 진짜 맛있겠네!”
혹시나 선우 형의 입에서 비방용 단어가 나올까 봐 일부러 더 호들갑을 떨었다. 혹시나 목격담이 뜨더라도 욕설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곤란해지니까.
“야, 이 곰 같은 놈아!”
버둥거리는 선우 형의 엉덩이가 애처로웠다.
* * *
밤을 새워서 놀 거라고 자신만만하던 박재봉은 야식을 먹는 중에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결국 매니저 형에게 연행되어 양치를 겨우 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른 멤버들은 애초에 늦게 잘 생각이 없었기에 각자 방으로 향했다.
의외로 박재봉이 가져온 향초가 효과적이었다. 요 몇 주 연말 무대 준비와 여러 가지 사건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는데, 오랜만의 숙면이었다.
이른 새벽 일어나 조개구이 맛집을 찾아갔다. 아침 일찍 가서 그런지 사람이 얼마 없었다. 다들 세수만 하고 나와서 묘하게 따끈따끈한 상태였다. 하품을 쩌억 하던 박재봉이 말했다.
“와… 저 어제 기억이 안 나요. 완전 기절했어.”
“눈이나 제대로 뜨고 말해-”
“아이고, 잘생긴 총각들이 무더기로 왔네~”
“아, 감사합니다.”
“어, 근데 혹시…….”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던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 순간적으로 긴장이 됐다. 설마 우리를 알아보신 건가 싶어 모두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