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정연은 지정된 좌석에 앉으면서도 ‘이게 맞나?’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아이돌 덕질을 하긴 했지만 콘서트나 팬 미팅과 같이 확실하게 볼 수 있는 스케줄이 아니라면 무모하게 도전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덕질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멀어서 승빈이 면봉만 하게 보이는 시상식임에도 자신이 참여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왜 새우젓이라고 하는지 알겠네…….”
비록 멀리서 보이는 면봉 혹은 새우젓 중 하나일지라도 신인상의 순간을 함께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이곳에 온 거다.
“다음 무대는 올해 강력한 신인상 후보죠?”
“네! 올해 가장 큰 화제성을 얻은 프로그램 하면 바로 떠오르는 프로그램이 있죠?”
관객석 곳곳에서 투마월을 외치는 관객들이 많았다.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투 마이 월드에서 치열한 경쟁을 이겨 내고 데뷔한 7명의 소년들, 크리드의 무대입니다!”
“와아아!”
크리드가 준비한 무대는 신세계와 레디의 리믹스 버전이었다. 정연은 목이 터져라 응원법을 외쳤다. 거의 전광판으로 볼 수밖에 없었지만, 멤버들의 열정적인 춤과 완벽한 얼굴은 숨겨지지 않았다.
“연말이라고 헤메코에 힘준 것 봐요-”
“슈트 버전 신세계랑 레디는 또 새롭네.”
연말 시상식은 연예인도 연예인이지만, 담당하는 숍들 간의 대결이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자신의 가수들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노력이 평소에 서너 배는 된다는 것이다. 정연은 크리드의 헤메코에 감동을 받았다.
“근데 크리드 헤메코는 항상 좋은 거 같아. 지금 숍 마음에 들어.”
“맞아요. 숍 구리면 진짜 빡치잖아요. 저, 전 본진 헤메코 구린 거 못 참고 탈빠한 거거든요.”
“애들 슈트에 자수 포인트 멤버마다 다른 거 봐- 저거 다 수제일 거잖아.”
특히 승빈은 처음으로 머리 전체를 깔끔하게 넘긴 포마드 머리여서 정연은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앞머리가 있는 머리를 고수해 와서 완깐을 한다면 어떨까 항상 궁금했기 때문이다. 얼굴형이 예쁜 건 알았지만 이마 라인까지 예쁠 줄은 몰랐다. 이목구비도 한층 더 뚜렷해 보였다.
폭발적인 고음과 서로의 음색이 어우러진 화음까지 완벽한 리믹스 무대였다.
[눈앞에 펼쳐진
New world-!]
“미친, 승빈이랑 유현이 화음 무슨 일이야?”
“언니, 미쳤나 봐요, 쟤네…….”
옆자리에서 친해진 유현이 최애인 클로버와 서로 연신 입을 틀어막으며 무대를 감상했다. 원해 승빈 혼자 하던 고음 파트를 둘이 하게 되면서, 분명 몇백 번 들은 노래임에도 새로움을 느꼈다.
“목소리도 목소리인데… 계속 둘 얼굴 클로즈업되니까 좋네요.”
공연장이 떠나가라 응원법을 외치는 클로버에 현장 분위기는 최대치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신인상 수상자를 가릴 시간이 왔다. 나중에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문스트럭의 절규 가득한 메시지가 가득 와 있었다.
[이런 ㅅㅂ]
[포마드 실화냐?]
[아니라고 해줘 아니라고 해달라고]
[하 세상아ㅋ]
[(절규하는 짤)]
“그럼, 드림어워즈 신인상 수상 발표에 앞서서 후보 먼저 만나 볼까요?”
전광판에 후보 그룹들이 하나둘 소개되고, 포커스와 크리드의 순서에서는 현장이 떠나가라 함성 소리가 들렸다. 이 역시 팬들 사이의 묘한 기 싸움이 오갔다.
“정말 쟁쟁한 후보들인데요.”
“맞습니다. 정말 누가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아요.”
“자, 그럼 발표하기… 에 앞서서 포커스와 크리드를 만나 볼까요?”
“뭔 소리야?”
정연은 어디서도 보지 못한 진행 방식에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했다. 누구 하나는 받지 못할 텐데 둘한테만 질문을 한다? 어그로도 이런 어그로가 없다. 갑작스럽게 이름이 호명된 두 그룹 멤버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클로즈업에 잡힌 정유현은 평온한 얼굴로 여유롭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유현이야.”
“제가 저 덤덤함과 올곧은 모습에 입덕한 거잖아요-”
“옆에 재봉이 봐, 완전 토끼눈이야”
평온한 정유현과는 달리 박재봉은 안 그래도 큰 눈이 쏟아질 정도로 놀란 눈을 했다. 둘의 얼굴이 대비되면서 현장은 앓는 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재봉 군이 많이 놀랐나 봐요?”
MC의 짓궂은 질문에 박재봉은 빨개진 귀를 붙잡고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그조차도 애교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지만.
“크리드의 리더 유현 군, 신인상 후보에 오른 기분이 어떤가요?”
“아직 얼떨떨하고… 영광입니다.”
“신인상 누가 받을 거 같나요?”
MC의 터무니없는 질문에 정연과 옆자리 클로버는 절로 이마에 내천(川)자가 새겨지고 있었다.
“질문 누가 정했냐?”
“어그로도 정도껏 해야지, 이건 무슨…….”
어떻게 답하더라도 어그로가 끌릴 질문이었다. 아무리 크리드와 포커스의 대결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진다지만, 이런 식으로 부추기는 것은 썩 내키지 않았다. 정연과 옆자리 클로버 모두 조마조마하면서도 어떤 답을 할까 기대했다. 정유현이라면 분명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암묵적인 믿음이었다.
“누가 받을지는 제가 알 수 없지만, 솔직히 저희가 받고 싶습니다! 그동안 우리 클로버들이 저희를 열심히 응원해 주셨는데, 욕심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죠. 그건 클로버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클로버에게 신인상을 선물해 드리고 싶습니다.”
“잘한다, 우리 리더!”
과연 정유현다운 답변이었다. 깔끔하면서도 충분히 패기로웠다.
“포커스의 리더 재성 군은 어떤가요?”
“크리드 선배님들과 후보가 된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하지만 신인상은 포기할 수 없죠.”
“훈훈한 선후배 사이네요~ 자, 그럼 정말 발표하겠습니다!”
정연은 MC와 자신이 알고 있는 ‘훈훈함’의 정의가 다른지 의문이 들었다. 정연은 옆자리 클로버와 손을 맞잡고 연신 크리드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종교는 없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신에게 닿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씨, 언제 발표해요? 너무 떨리는데”
“나 토할 거 같아, 진심…….”
금세 발표할 것같이 말하더니 스태프의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 다 보였다. 주변에서도 늦어지는 발표에 점점 불만이 늘어 가고 있었다. 그때, MC가 큐 카드를 꺼냈고 드디어 마이크로 향했다.
“영광의 신인상 수상자는…….”
“제발, 제발 우리 애들…….”
“축하합니다, 크리드!”
“와아아아!”
정연과 옆자리 클로버는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누가 보면 그녀가 신인상을 받은 줄 알 정도였다. 그동안 마음 졸이던 것들이 한순간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짜릿한 승리와 함께 축제 분위기인 클로버의 옆에서 포커스의 이름을 연호하던 포커싱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하지만 정연과 클로버는 아랑곳 않고 외쳤다.
“애들아, 축하해!”
축제의 시작이었다.
* * *
“우리야?”
“지금 우리 부른 거 맞지?”
크리드가 불리자마자 박재봉은 스프링처럼 튀어나왔고, 유현이 형은 몇 번이고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냥 이 모든 게 다 꿈같았다. 잠시 주변 소리가 모두 사라지고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신인상이라니, 미션 성공보다도 더 기쁜 순간이었다.
“뭐야, 벌써 울면 어떡해요-”
벌써 울먹거리는 윤빈 형을 강도현이 달래며 시상대로 향했다.
“애들아, 축하해!”
“잘했어, 애들아!”
팬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마이크 앞에 섰다.
“인사 먼저 드리겠습니다. 하나, 둘, 본 투 샤인! 안녕하세요, 크리드입니다!”
평소보다 더 우렁찬 소개 인사였다. 유현이 형은 소감을 말하면서 여러 차례 눈물이 올라오는 걸 참는 듯 말이 끊겼다. 하지만 결국 눈물 한 줄기가 흐르고 말았다. 카메라 앞에서는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유현이 형이었기 때문에 현장은 클로버들의 함성 소리로 가득했다.
“그리고 부족한 리더지만 나 믿고 따라와 준 우리 멤버들, 너무 고맙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정말, 감사합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클로버!”
형의 소감을 끝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MC가 내 이름을 불렀다.
“승빈 군 소감도 들어 볼까요?”
갑작스러운 소감 요청에 두리번거리자 정유현과 박재봉이 나를 마이크 앞으로 밀었다.
“어…….”
“형, 빨리 말해요!”
“그… 감사합니다. 제가 소감을 따로 준비 못 해서요. 조금 횡설수설해도 이해해 주세요. 먼저, 인생에 한 번뿐인 신인상을 받게 돼서 너무 기쁩니다… 함께 고생한 우리 멤버들 너무너무 고마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희 투표해 주시느라 고생했을 클로버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꼭 전하고 싶어요. 여러분이 없었으면 전…….”
눈앞에서 예쁘게 빛나는 팬 라이트를 보면서, 어둠뿐이던 내 과거를 비춰 주는 한 줄기 빛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말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전 아무것도 아니었을 겁니다. 아직 부족한 것도 많고, 배워야 할 것도 많은 저희에게 과분한 사랑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주신 이 상에 걸맞은 가수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티벡스 시절에는 지운이 형과 숙소 티브이로 보는 게 전부였다. 나머지 멤버들은 남의 축제를 뭐 하러 보냐며 차라리 우리도 놀고 오겠다고 숙소를 비운 지 오래였다. 우리도 내년이면 나갈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존심도 상하고 속이 말이 아니었지. 그 짠내 나는 시간이 이렇게 바뀔 줄이야.
“진짜 꿈같아…….”
트로피를 쥐고 눈물을 훔치는 지운이 형을 보면서 더 울컥했다. 언젠가 최고의 아이돌이 되자고 했던 약속을 이렇게나마 지킬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남아 있던 죄책감의 응어리를 줄일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보니 유현이 형을 빼고 모두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었다. 그러면서도 머리 위로 오랜만에 하트들이 여러 가지 색깔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투마월 파이널 이후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하트창의 최고조 상태였다. 내 머리 위에서도 멈추지 않고 하트가 생겼다. 상태창 때문에 팬들이 실망하고, 그래서 나를 좋아하는 마음에 해를 입힌다면 어쩌지- 고민하던 날들을 한 번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자리에 돌아와서도 한참 동안 트로피를 쓰다듬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을 고르라고 하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 트로피를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눈을 떼지 못하네- 그렇게 좋아?”
“응. 좋다, 진짜 좋아.”
나는 자꾸만 흐르는 눈물도, 삐져나오는 웃음도 숨기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강도현은 내 어깨를 아프지 않게 치면서 괜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얘도 이미 한바탕 울고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문승빈도 울보 다 됐네!”
“너나 눈물 좀 닦고 말해, 임마.”
그 말에 강도현도 입을 크게 벌리고 와하하 웃었다. 눈가에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서로 얼싸안은 우리에게는 단 한 가지 감정밖에 남지 않았다.
좋았다, 너무 행복해서 무서울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