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이번 청백 대결의 주인공은 누구죠?”
“올해 화제의 신인 두 팀이 준비하고 있는데요! 바로 크리드와 포커스입니다!”
“와- 제가 살짝 알아본 바로는 선배들의 노래를 준비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네! 포커스는 가요계의 전설 루커스의 곡을, 크리드는 걸그룹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고 있는 블라썸의 노래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정말 쟁쟁한 대결이 되겠는데요?”
“그럼, 포커스의 선공입니다!”
포커스의 무대는 역시 예상한 대로였다. 멤버 개개인의 능력치도 괜찮았고, 합도 잘 맞았다. 하지만 모두가 우려했듯이 루커스에 비한다면 아쉬운 무대였다. 원곡자의 색이 강한 선곡이기도 했고, 대부분 대중의 머릿속에는 루커스의 무대가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잘하긴 했는데…….”
“확실히 아쉽네.”
“그래도 선배 노래라고 준비 많이 했나 봐? 나 병대가 실수 안 한 거 처음 봄.”
포커스의 무대가 끝나고 크리드 멤버들이 모두 반대편 무대로 달려왔다. 다른 무대에서 공연하는지라 세트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지만,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만큼 현장은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조명이 들어오지 않아서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문스트럭과 K는 재빠르게 멤버들의 의상을 스캔했다.
“애들 지금 가면 쓰고 있는 거야?”
“야, 턱시도에 가면이면 백 퍼센트 가면무도회 콘셉이다.”
“미쳤나 봐, 이건 누구 아이디어냐?”
“애들이 정하지 않았을까?”
그때 무대 전광판에 자막 하나가 올라왔다.
[모두가 떠난 무도회장, 비로소 시작된 우리의 왈츠
welcome to our flower magic]
잔잔한 피아노 멜로디와 함께 플라워 매직 무대가 시작됐다. 오르골 소리가 더해져서 묘하게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무대 가장자리에 위치한 오르골 위에 일렬로 서 있던 멤버들이 한 명씩 대각선 방향으로 걸어 나왔다.
“와, 무대 스케일 미쳤다.”
“이거 코어가 준비한 건가?”
“그런 듯. 씨넷도 아닌데 방송사에서 이 정도를 해 줬을 리가.”
“앞 팀 오토바이 보고도 놀랐는데, 여긴 완전 세트를 금칠해 놨네.”
멤버들이 등장하는 박자에 따라 무대 바닥에서는 꽃잎이 흩날리는 연출이 보였다. 맨 끝의 승빈이 걸어 나오며 첫 파트의 시작을 알렸다. 두 손을 꼭 쥔 채 걸어 나오는 모습은 청순함, 아련함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내 간절한 기도가
우리의 소중한 기억이
한여름 밤의 꽃잎처럼
흩어질지라도]
“미친, 승빈아!”
그러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꽃 한 송이를 좌우로 가볍게 털어 내는데, 마법처럼 꽃이 사라졌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생각도 못 한 마술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사라졌는데?”
[마법처럼 이뤄질
우리의 소원이
내 손끝에 닿아 있어
It’s a flower magic]
마지막 가사와 함께 멤버들 모두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천천히 벗어 던졌다. 가면에 걸린 머리를 털어 내며 정리하는 차지운에 K는 주변 시선에 아랑곳 않고 소리를 질렀다. 화들짝 놀란 문스트럭은 속으로 생각했다.
‘익룡인가……?’
전광판에 클로즈업되어 비친 정유현의 얼굴도 엄청났다. 본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갈색 생머리에 시스루 앞머리로 눈이 살짝 가려졌지만, 그래서 더 신비로운 아우라가 느껴졌다.
“와, X나 잘생겼다.”
“근데 옆에 문승빈 무슨 일임?”
웅성거리는 주변과 같이, 문스트럭이 놀란 것은 정유현 옆 승빈의 얼굴이었다. 정유현 바로 옆에 서 있음에도 전혀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레디 활동부터 미모에 물이 올랐다고 생각했고, 오프닝부터 잘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옆에 정유현이 있는데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확실히 활동을 하면서 살이 빠졌는지, 젖살이 조금 사라지고 턱선도 날카로워졌다. 살이 안 빠지는 게 이상할 정도의 극한 스케줄이기는 했지. 조금 마음이 아플 뻔했지만, 그걸 뛰어넘는 충격적인 비주얼에 그녀는 쓰린 마음을 바로 치료했다. 퍼스널 컬러에 찰떡인 흑발 쉼표 머리에, 버건디 메이크업은 투마월 몽환 콘셉 무대를 떠오르게 했다.
‘하지만 그때보다… 잘생겼어!’
문스트럭은 ‘내 최애가 최고주의’지만, 미적인 것에는 칼같은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 크리드 실물은 누가 최고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답하곤 했다.
[잘생긴 건 정유현, 그래도 우리 승빈이가 최고.]
비주얼이 아니더라도 승빈이 최애가 될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아이돌의 덕목은 잘생김이라고 확신하는 문스트럭이었다.
“근데 이게 플라워 매직이라고?”
비주얼에 압도당했던 그녀가 뒤늦게 놀란 이유는 기존의 플라워 매직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콘셉이었기 때문이다. ‘블라썸’의 플라워 매직은 꽃잎이 흩날리는 느낌의 전형적인 청순 콘셉의 곡으로, 처음 이 곡을 한다고 했을 때 모두 콘셉을 그대로 가져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청순 정도면 남자 아이돌도 소화 못 할 콘셉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고풍스럽고 신비로운 무도회장 콘셉을 가져올 줄이야.
우선 왈츠 템포와 오르골을 사용한 편곡이 큰 역할을 해냈다. 신비로우면서도 살짝 기묘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문스트럭은 편곡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뒤이어 박선우의 랩 파트, 몇백 번 들은 목소리지만 여전히 저 귀여운 외모에 묵직한 저음은 적응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박선우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얼굴을 몇 번이고 쳐다보게 되는 그녀였다.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여유롭게 걸어 나오는데, 지금껏 박선우에게서 보지 못했던 섹시함이 느껴지는 파트였다.
[발맞춰 한 템포
음표를 따라 움직여
달려가는 시계추를
붙잡아 It’s a flower magic]
“선우는 목소리가 진짜…….”
“독보적이지-”
하이라이트 파트에는 바이올린, 트럼펫 소리 등이 더해지면서 더욱 웅장한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 점점 빨라지는 템포에 맞춰 탭댄스를 추는 멤버들의 발도 바빠지고 있었다. 가운데에서 독무를 하는 승빈을 중심으로 나머지 멤버들이 대칭을 이뤄서 춤을 추고 있었다.
[꿈만 같겠지 눈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현실
But it’s not a dream
It’s a flower magic]
“……?”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러서일까, 끝음 처리가 불안했다. 평소 격렬한 안무와 라이브에도 흔들림이 없던 승빈이었기 때문에 문스트럭의 귀에는 바로 들린 것이다.
‘뭔가 승빈이답지 않은데…….’
하지만 큰 실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문스트럭 말고 알아챈 이들은 거의 없었다. K 역시 큰 이상함을 못 느끼고 무대를 즐겼다. 다행히 승빈도 빨리 페이스를 되찾고 무대에 집중했다.
멤버들의 군무를 보는 것도 큰 재미 중 하나였다. 형 라인은 모두 180cm가 넘고, 동생 라인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어서 피지컬이 잘 드러나는 의상이 잘 어울렸다. 최단신이었던 박재봉도 어느새 승빈과 비슷해질 정도로 폭풍 성장 중이었다.
“재봉이… 성장 속도가 엄청 빨라지지 않았어?”
“진짜 조만간 승빈이 넘겠는데?”
“에이, 설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문스트럭은 저 속도라면 최장신인 정유현과도 맞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무도회는
너와 나만의 secret
한여름 밤의 꿈
But it’s not a dream
It’s a flower magic]
엔딩은 승빈과 지운의 투샷이었다. 등을 맞대고 손바닥 위로 꽃가루를 불었다.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며 멤버들이 건네준 가면을 다시 쓰며 무대가 끝났다. 현장 반응은 크리드의 압승이었다. 주변의 포커싱 중 넋 놓고 크리드의 무대를 보다가 무의식적으로 환호성을 내지른 이들도 있었다. 물론 바로 주변 눈치를 보며 입을 막았지만.
“예상한 대로 정말 치열한 대결이었습니다. 현장에 계신 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K는 곧장 귓속말을 했다.
“치열은 개뿔, 우리 애들이 압승이지, 이건.”
“당연하지!”
결과는 이변 없이 크리드의 승리였다. 시청자 투표도 압도적이었지만, 현장 투표 점수도 큰 차이로 이겼다. 축제와 장례식이 한 곳에 이뤄지는 분위기 속에서 문스트럭과 K는 뒤이은 차지운의 합동 댄스 스페셜 무대까지 보고 기분 좋게 방송국을 빠져나왔다.
“근데 오늘 승빈이 컨디션이 최상은 아니었던 거 같아.”
“엥? 얼굴은 최상이었는데?”
“그건 인정. 근데 뭔가… 달라. 오늘 끝음 처리나 중간중간 음정도 그렇고”
“야, 당연히 춤추면서 라이브 하는데 그 정도 실수도 없으면 사람이 아니지- 이제 관심법도 하겠다? 문승빈 한정이지만.”
“그치? 너무 궁예하는 거 같긴 하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승빈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탓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 *
“다들 수고 많았어!”
“형도 편곡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무대를 마치고 다들 홀가분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미션 실패로 노래 포인트가 깎일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무대 직전에 적용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그리고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이전에 비하면 퇴보한 기분이었다.
‘집중력이 조금만 흐트러졌으면 삑사리라도 났을 거야.’
무대 위에서 차라리 가사를 놓칠지언정 삑사리 만큼은 절대 나서는 안 된다. 티벡스 시절 단 한 번 삑사리가 났는데, [시원하게 삑사리 내는 남돌]로 영상이 돌아다니면서 조롱을 당한 기억이 있다. 단언컨대 활동하면서 딱 한 번 났던 삑사리였다. 그럼에도 나는 망돌인 데다가 실력도 없는 아이돌로 온갖 조롱을 받았다. 대중들이 망돌인 우리 무대를 더 찾아보는 친절을 베풀 이유 따윈 없었다.
“승빈아, 무도회장 아이디어 진짜 잘 정한 거 같아!”
“…응.”
“뭐야, 무대 잘하고 왜 이렇게 시무룩하냐?”
“오늘 컨디션이 조금 안 좋네. 그래서 실수도 좀 있던 거 같고…….”
“실수?”
“형이 실수를 했어요?”
“티 안 났어?”
“응, 전혀 몰랐어.”
“유현이 형이 모를 정도면 아무도 몰랐을걸요?”
그렇게 들으니 괜히 안심이 됐다. 그래, 한번 떨어진 포인트는 다음 미션에 다시 채우면 된다. 상태창 변화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크리드와 포커스의 대결 이후 바로 댄스 스페셜 무대가 있던 지운이 형이 뒤늦게 대기실로 돌아왔다.
“형, 무대 잘 봤어요!”
“그렇게 걱정하더니, 거봐- 잘할 거라고 했잖아.”
“고마워. 실수 없이 마쳐서 다행이야.”
빠르게 단체 의상으로 환복한 지운이 형이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았다. 멤버들의 격려를 받고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형의 눈은 속일 수 없었나 보다.
“맞다, 이거 먹어.”
“이게 뭐예요?”
“도라지즙. 목에 좋대. 전에 유현이 어머니께서 챙겨 주신 거에 있더라고.”
“그건 뼈랑 관련이…….”
“그치? 그래서 유현이한테 물어보니까 그냥 몸에 좋은 건 다 보내 주셔서 그런 거래.”
“하여간, 유현이 형이 누구 닮았는지 알겠다니까요. 잘 먹을게요.”
“응, 너 오늘 목 컨디션이 최상은 아닌 거 같아 보이더라고.”
‘어떻게 알았지?’
“뭐, 아닐 수도 있는 건데 그래도 먹어서 나쁠 건 없잖아?”
고마우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완벽주의자에 눈도 귀도 밝은 정유현도 의식하지 못했는데, 지운이 형은 어떻게 바로 안 걸까? 형이 보는 앞에서 도라지즙을 원샷했다.
“형.”
“응?”
“저, 형이랑 같이 데뷔하기 진짜 잘한 거 같아요.”
거창한 말에 지운이 형은 말없이 웃었다. 회귀한 첫날,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할 거라던 그 다짐은 4년 뒤에도 유효할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