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형, 오늘도 스케이트 타러 가는 거야?”
“어, 잠깐 갔다 오려고-”
“와, 문승빈 체력 무슨 일이야.”
“너 혼자서 뭐 챙겨 먹냐? 어떻게 연습하고 또 스케이트를 타러 가냐.”
다들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이미 박재봉과 강도현은 연습실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지운이 형의 다리가 어느 정도 회복된 후부터 본격적인 연말 무대 준비가 시작됐거든.
각 방송사뿐만 아니라 온갖 시상식까지, 준비해야 할 무대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게다가 전부 조금씩이라도 다르게 무대를 구성해야 했기 때문에, 요즘 우리는 활동기보다도 바쁜 스케줄을 보내고 있었다. 차라리 활동기면 대기하면서라도 쉴 텐데, 이건 뭐, 연습에 끝이 없었다.
그렇게 극한의 연습 스케줄을 마치고 다들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데, 스케이트를 타러 간다는 내가 이해가 안 갈 만도 했다.
“타 보면 알아. 조만간 다 같이 한번 타러 가자.”
하지만 연습이 고되면 고될수록, 스케줄이 힘들면 힘들수록 더 스케이트를 타야만 했다. 스케이트를 타는 시간만큼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당장 내 눈앞에 다가온 무대도, 마주하고 있는 수많은 고민도. 시원하게 링크장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만큼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혼자 잠깐 다른 세계를 다녀오는 느낌이었다.
“승빈이 형, 오늘도 타러 왔네?”
“어, 정훈아. 지금 왔어?”
“응, 근데 형 밥은 먹었음?”
“아니, 아직.”
“오, 잘됐다. 나도 아직인데 같이 먹자.”
내가 연습하러 올 시간에 맞춰서 일부러 나온 걸 알고 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한동안 나를 감쌌던 우울감과 좌절감은 겉으로도 새어 나왔는지, 플레이 온 아이스 출연진들까지 나를 걱정할 정도였다. 특히 내내 붙어서 연습했던 정훈이한테는 더 크게 다가왔는지, 상태가 나아진 지금도 나를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처음 몇 번 마주쳤을 때는 우연인가 링크장에 상주하는 건가 했지만, 우리 매니저 형과 연락하고 있는 걸 발견한 후로는 이 어설픈 연기가 귀여우면서도 감동적이었다.
플레이 온 아이스로 얻게 된 건 단순히 인지도와 인기 정도가 아니었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취미를 얻었고, 소중한 사람들을 얻었다. 시크릿싱어 뒤풀이에서 최 피디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과거의 문승빈은 몰랐겠지. 용기 내서 말 한번 걸었던 게 이렇게 크게 돌아올 줄이야.
“그래, 오늘은 뭐 먹을래?”
“여기 근처에 돈까스 기가 막힌 곳 있거든.”
“오, 대박. 나 오늘 돈까스 끌리는 거 어떻게 알았대?”
“역시- 척하면 척이네. 후딱 먹고 와서 마저 타자.”
‘점심에도 돈까스 먹었는데-’
때로는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두 끼 연속 돈까스를 먹었는데도 느끼하기는커녕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 * *
“다들 오늘 체력 아껴 둬야 한다.”
“그럼요. 형, 저 오늘만 기다렸다구요-”
“재봉이도 스케이트 처음 타 본다 그랬나?”
“처음은 아닌데, 완전 어렸을 때만 타 봤어요.”
“지금도 완전 어린 거 아냐?”
“아, 도현이 형!”
그새를 못 참고 재봉이를 놀리는 강도현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피곤해 죽겠다 할 때는 언제고, 저 정도면 박재봉 놀리는 게 강도현의 퀘스트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놀릴 때마다 보상을 얻는 거지.
“윤빈이 형은 스케이트도 잘 탈 거 같은데-”
“잠깐 아이스하키도 해 봐서 탈 줄은 알아.”
“형, 진짜 인생을 어떻게 산 거예요?”
“진심. 하루 종일 운동만 했나 봐.”
“아마 그럴지도……?”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대답에 다들 빵 터졌다. 오직 윤빈 형만이 우리가 왜 웃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그 어벙한 표정에 두 번 터진 건 뭐,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하여간 본인만 모르는 웃수저였다.
“여기서 5시에 출발할 거니까 그때까지 다들 열심히 연습하자구요.”
“오케이. 깔끔하게 연습 끝내고 얼른 갑시다!”
그렇게 몇 시간을 더 연습하고 드디어 아이스링크장으로 출발했다. 지칠 만도 한데 아이스링크장을 향하는 눈빛이 다들 초롱초롱한 게 귀여웠다. 헬멧과 보호대를 찬 모습을 보자니, 현장 학습 온 학생들 같았다.
“와, 대박. 생각보다도 더 넓네요?”
“근데 우리밖에 없는 거야?”
“어, 오늘 원래 휴무일인데 특별히 열어 주신 거야.”
“와, 승빈이 덕 톡톡히 보네.”
“하도 자주 와서 사장님이랑도 친해졌구나?”
“맞아요.”
다들 오랜만에 얻은 자유 시간에 들뜬 게 보였다.
“얼른 타 보자구요!”
“재봉아, 몸부터 제대로 풀어 주고 타야 해.”
“형, 근데 우리 지금 몇 시간이나 몸 풀고 온 거 아냐?”
“그건 그렇네……?”
“그래도 간단히 스트레칭은 해야 안 다쳐.”
“그럼 넌 그때 스트레칭 안 해서 넘어진 거야?”
“…조용히 해라.”
‘강도현, 지는 얼마나 잘 타나 보자.’
먼저 스케이트를 경험해 본 사람으로서 이들의 미래가 그려졌다. 분명 절반은 나처럼 넘어지겠지.
“으악!”
“잡지 마!”
“와, 형 지금 혼자 살겠다고!”
역시나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간단하게 스케이트 타는 법을 알려 주고 링크장 위에 올려놨더니, 잘 못 타는 와중에도 서로 이겨 먹으려고 난리도 아니었다. 대부분 갓 태어난 기린처럼 다리를 주체 못 하고 있는데, 윤빈 형은 벌써 뒷짐을 쥐고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역시 윤빈이 형은 프로네 프로야.”
“형, 형도 못 하는 운동이 있긴 해요?”
“선우 형 봐 봐.”
“와, 형 진짜 갓 태어난 기린 같다.”
다들 서로의 영상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 그래도 회사에서 이왕 놀러 가는 거 자체 콘텐츠를 같이 찍으면 어떻겠냐고 했는데, 그러면 맘 편히 놀지 못할 거 같아서 에둘러 거절했다.
‘근데 이럴 거면 그냥 찍어도 됐을지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알아서 콘텐츠를 찍고 있는 멤버들이었다. 이런 걸 보면 천상 아이돌이다.
“야, 강도현. 너도 장난 아니거든?”
“아니, 근데 희한하게 도현이는 넘어지지는 않는다?”
“지운이 형, 부럽죠? 이게 바로 기술입니다.”
“근데 도현아, 차라리 넘어지는 게 낫지. 그렇게 타고 싶지는 않아.”
“와… 지운이 형이 한 방 날렸네.”
사실이었다. 강도현은 거의 무슨 기인열전에 나올 법한 자세로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분명 넘어지지도 않고 앞으로도 잘 나가는데 자세가 정말 기이했다. 자발적으로 스쿼트를 하고 있는 느낌? 저걸 운동신경이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안 넘어지는 게 신기한 자세였다.
“도현이 찍은 거는 어디다 못 올리겠다.”
“형, 멋있게 좀 타 봐요.”
“그게 맘먹은 대로 되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와, 승빈이 형 대박.”
보란 듯이 강도현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거기에 이번에 배운 스파이럴까지 보너스로 보여 줬다.
“영광인 줄 알아, 도현아. 쉽게 보기 힘든 기술이다, 이거?”
“와, 문승빈 신난 거 봐.”
“신나다니- 난 그냥 기본을 보여 주는 거뿐인데?”
“와- 나 앞으로 스케이트장으로 매일 출근한다!”
잔뜩 약 오른 강도현이 나를 잡으려고 쫓아왔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추격전을 제대로 담아 내고 있는 건 바로 윤빈 형이었다.
“도현아, 영상까지 찍는 형이 너보다 빠른 거 봐.”
“도현이는 초보니까 괜찮아. 그럴 수 있어.”
“형이 더 나빴어요!”
온화하게 뼈를 때리는 윤빈이었다. 바로 타깃을 바꿔서 윤빈 형에게 달려드는 강도현이었지만, 역시나 그쪽도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형은 이제 아예 뒤로 타면서 쫓아오는 강도현을 정면에서 촬영하고 있었다.
‘작품 하나 나오겠네.’
“근데 지운이 형이 의외로 못 타네.”
“형, 분명 잘 탈 거 같은데 지금 겁먹어서 그렇죠?”
“…….”
“맞네, 맞아. 승빈아, 지운이 형 손 좀 잡아 드려라.”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잘 타는 사람은 잘 타는 대로, 못 타는 사람은 못 타는 대로 재밌어 보였다. 기대한 그대로였다. 내가 느꼈던 자유로움을 멤버들에게도 경험시켜 주고 싶었는데, 그 이상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 뿌듯했다.
“승빈이 형이 왜 그렇게 매일 나갔는지 알겠다.”
“나도, 나도!”
“이거 완전 스트레스 확 풀리네!”
“더 대박인 거 알려 줄까요?”
“뭔데, 뭔데?”
“저기 라면 기계도 있거든요?”
“와… 미쳤다.”
“스케이트 타고 라면 하나 딱 먹으면 그냥 끝장남.”
꿀꺽. 누군지 모를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렸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유현을 쳐다봤다. 장화 신은 고양이도 이렇게 간절하게 쳐다볼 수는 없을 거였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마침내 입을 뗀 유현이 형,
“우리 활동기 아니잖아, 안 그래?”
와아! 공간이 울릴 정도의 함성이 링크장을 가득 채웠다. 6명이 한꺼번에 내뱉은 함성의 위력은 엄청났다. 순간 귀가 얼얼해질 정도였다.
“와… 유현이 형, 사랑해요.”
“나 무슨 지금 영화 보는 줄?”
“얼른 라면 먹자.”
정신 못 차리고 스케이트화를 그대로 신고 달려 나가려는 강도현을 겨우 붙잡고, 신나서 들썩거리는 박재봉의 헬멧도 벗겨 줬다.
“하여간, 다들 손이 많이 간다니까.”
핀잔주듯 말하는 내 얼굴에도 분명 미소가 가득했을 거다.
* * *
“포커스랑 대결 무대요?”
연말 스페셜 무대를 준비하면서, 한 번쯤은 포커스와 부딪힐 일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다. 재수 없지만 명실상부 올해 가장 이슈가 된 신인들이니까. 하지만 서로 합동 무대를 하는 것도 아니고, 노골적으로 소속사 선배들의 곡으로 대결 무대를 할 줄이야.
“응. 포커스는 루커스의 노래를, 우리는…….”
“블라썸 선배님 노래요?”
거기다가 걸그룹 선배의 노래로 무대를 준비해야 했다. 아무래도 남자 아이돌 노래를 커버하는 것보다는 어려운 길이었다. 하지만 승산이 있는 싸움이다. 그리고 이런 내 생각에 확신이 들게 만든 것은 지금 내 눈앞의 김병대와 오재성이었다.
“블라썸의 플라워매직… 걸 그룹 전문 그룹인가 봐요?”
“무슨 배짱으로 루커스 선배 노래를 하게 됐나 했더니, 소속사 선배여서 어쩔 수 없었겠구나?”
“무슨 뜻이에요?”
“잘해 보라는 뜻이지-”
데뷔한 지 3개월도 되지 않은 신인 그룹이 지금 남돌판 부동의 1군 루커스의 노래를 커버한다? 게다가 최고 히트곡인 ‘BONUS’를 선곡했다. 이건 좋게 말하면 신인의 패기고, 나쁘게 말하면… 객기 부리는 것이라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아무리 잘해도 ‘선배 무대 열심히 준비한 후배’ 소리 듣는 게 최선이다.
분명 루커스 팬덤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아쉬운 점들을 찾아낼 것이다. 안 그래도 이미 루커스 팬들은 포커스가 데뷔하고 나서 VM의 일 처리가 느슨해진 걸 열받아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블라썸의 ‘플라워 매직’은 아예 크리드의 색에 맞춰서 곡을 편곡할 수 있다. 타이틀곡도 아니고, 수록곡이기 때문에 원곡이 대중들에게 깊숙이 각인 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큰 장점이었다. 자신들의 예상과는 달리 여유로워 보이는 내가 어이없었는지 둘은 말없이 대기실로 돌아갔다.
‘누가 이기는지 두고 보자고.’
그렇게 의기양양해하던 순간, 머리 위로 상태창이 반짝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 설마……!’
기다렸다는 듯 미션창이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