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그 후로도 며칠 동안은 지운이 형과 계속 어색했다. 형이 먼저 말을 걸려 했지만 내가 회피했다. 아직도 지운이 형의 얼굴만 보면 사고의 순간이 떠올랐으니까. 이상함을 느낀 건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박재봉이 나를 끌고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뭐야?”
“참나, 제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요? 형, 진짜 뭐예요? 왜 요즘 지운이 형이랑 냉전이에요?”
“냉전이라니?”
“며칠 동안 티 나게 지운이 형 피하잖아요.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런 거 아니야.”
박재봉이 눈치챌 정도면 어지간히 티가 나긴 했나 보다.
“형, 지금 지운이 형한테 미안해서 그러죠?”
“…네가 어떻게 알아?”
“그야… 저도 그랬으니까요.”
‘아, 투마월 지운이 형 사건이 있었지.’
“근데 저도 형이 조금 이해 안 가요. 그래도 저는 그때 제 트라우마 때문도 있었지만, 지운이 형을 마음대로 오해하고 싸가지 없게 굴었으니까 당연히 미안했죠.”
“싸가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아무튼! 근데 지운이 형이 다친 게 형 탓도 아닌데 왜 미안해하는 거지?”
‘그러게 말이다…….’
계속해서 빙빙 돌려 답하는 나에게 박재봉이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더니 말했다.
“형이 그랬잖아요. 혼자 다 이겨 내려고 하지 말라고, 말 안 하면 모른다고.”
‘저걸 다 기억하고 있었네.’
“무슨 세상 이치 다 통달한 사람처럼 말하더니- 형도 완전 바보네요, 바보.”
“허…….”
“이래도 말 안 해 줄 거에요?”
역시 어린 애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마시는 게 아니라고 했다. 내가 한 조언을 이렇게 활용하다니. 조금 당황했지만, 그때 내가 한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게 아니었구나- 고마웠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이제 좀 말할 생각이 들어요?”
“형을 보면 사고 때가 생각나서 그런 거 같아.”
“아…….”
“형이 떨어지던 그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
“그럼 지운이 형한테 얘기해요! 얼굴 보기 힘들면 문자라도 보내요.”
“뭐?”
“지운이 형도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안 그래도 다리도 다쳐서 몸도 답답할 텐데 마음까지 답답하면…….”
내 마음 편하자고 지킨 침묵과 회피에 지운이 형이 어떤 기분일까 애써 모른 척했다. 그런데 박재봉의 말이 백번 맞았다. 어쩌면 내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었다면 나도 똑같이 조언했을 것이다. 재봉이와의 대화를 통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차피 지금 내 감정을 완벽히 설명하기 위해선 회귀한 사실을 밝혀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나름대로 해결해 봐야겠지.
“알았어.”
“화이팅! 처음 다가가는 게 어려운 거지, 지운이 형은 이해할 거예요.”
“그래.”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언제 온 건지 지운이 형 앞에 음식, 한약, 과일 등이 쌓여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유현이 형이…….”
“…부모님한테 뼈 회복에 좋은 게 뭐냐고 여쭤봤더니 아예 퀵으로 보내 주셨어.”
“엥, 형 부모님 의사예요?”
‘이걸 이렇게 밝히게 되네……?’
“응.”
“대박, 근데 한약도 있네요?”
“…어머니는 한의사셔.”
“와우…….”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꼭 전해 주세요, 형.”
“짱이다, 진짜-”
다들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감탄만 하고 있었다. 유현이 형은 처음에는 머쓱해하다가도 멤버들 반응에 묘하게 뿌듯한 게 보였다.
‘그래도 가족들과 많이 좋아졌구나.’
다들 처음 가족 얘기를 꺼내는 유현이 형이 신기하다는 반응이었지만, 나 혼자 뭉클한 감정이 들었다. 그때의 내 선택이 옳았구나.
만약 내가 바꾸지 않았다면 재봉이는 다쳐서 서바이벌을 하차했을 거고, 유현이 형은 다시 가족과 가까워질 수 없었겠지. 무엇보다도, 크리드라는 그룹으로 이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머릿속이 조금 정리됐고, 미래를 바꾸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용기 내 지운이 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 제가 사실 아직 형을 보면 사고 때의 기억이 떠올라요. 그래서 자꾸 두렵고, 형에게 미안해서 형을 피하게 되는 거 같아요. 절대 형이 싫다거나, 다른 이유는 없어요.]
지운이 형이 메시지를 확인한 것은 1시간 정도 지난 후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연 지운이 형의 인기척에 뒤돌아보려 했지만, 형이 만류했다.
“그냥 그 상태로 있어.”
그러곤 등을 맞대고 앉았다.
“아직 내 얼굴 보는 건 좀 힘들 거 같아서.”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천천히 기다릴게. 대신 이거 하나만 약속해.”
‘뭐지?’
“다 네 잘못 같다는 그런 말, 다신 하지 마. 알겠지?”
그때나 지금이나 말 한마디로 눈물 핑 돌게 만드는 형이었다.
* * *
지운이 형이 없어도 연습은 계속 됐다. 특정한 무대를 준비하는 게 아니어도 다들 기본기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까. 여느 날처럼 연습실에서 다같이 모여 있었는데, 매니저 형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왔다.
‘형이 저 표정 지을 때마다 곰돌이 같단 말이지.’
“축하해, 승빈아. 이번에 뮤직쇼 후임 MC로 확정됐다고 연락 왔다.”
“우와, 승빈이 형 축하해요!”
“사전 미팅 날 걱정 많아 보이더니 엄청 잘하고 왔나 보네!”
“피디님, 작가님들이 좋게 봐 주신 덕분이죠-”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투마월 시즌 4 MC 경험도 있고, 4년간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사전 미팅을 발로 뛰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예능에서 패널 자리 하나라도 더 물어 올 수 있었으니까. 다행히 뮤직쇼 측도 ‘해피콘서트’ MC 자리에 캐스팅한 때부터 거의 확정을 지어 놓고 한 사전 미팅이었기 때문에 딱딱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럼 다음 주부터 첫 촬영인 거네?”
“스페셜 무대도 꾸미겠고?”
“상대 MC는 누구예요?”
“으아, 다들 천천히 물어봐요. 정신이 없네!”
언제나 그렇지만, 궁금하거나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하면 강아지 떼처럼 우르르 몰려든다.
“자, 천천히 답할게요. 먼저 다음 주 첫 방송이 맞고요. 스페셜 무대… 선곡 준비해야 해요. 그리고 해피콘서트 때처럼 된다면 상대 MC는 배우 김민영 님일 거예요.”
“나, 질문 하나 더.”
“넵, 유현이 형.”
“스페셜 무대 노래 뭐 할 거야?”
“진짜로 될 거라곤 생각 못 해서 아직…….”
“듀엣 곡이니까 혼성 그룹 노래는 어때?”
혼성 그룹의 노래를 하자는 아이디어는 꽤 쓸모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현재 활동하는 혼성 그룹이 거의 없다는 거였다.
‘그럼 예전 가수 중에서 찾아야 하나…….’
“형, 이 노래는 어때요?”
박재봉이 추천한 곡은 뜻밖에도 90년대 인기 혼성 그룹 ‘듀오’의 ‘반의 반’이었다. 제목을 듣자마자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떻게 이 노래를 잊고 있었지?
“네가 이 노래를 어떻게 알아?”
“요즘 90년대 가수들이 재조명받고 있잖아요. 그래서 그때 노래들 플레이리스트들도 많이 나오고 있는데, 거기서 혼성 그룹 노래하면 이 노래가 제일 많더라고요- 가볍게 안무도 만들어서 같이 부르면 어떨까요?”
얘가 가끔 정말 똘똘한 면모를 보일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때인 거 같다. 듀오의 ‘반의 반’은 이미 아는 곡이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노래를 어떻게 알았냐고? 이건 우리 부모님의 노래방 18번 곡이다. 평소에는 그렇게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도 아니고, 서로 마이웨이인 듯하면서도 이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세상에 둘도 없는 듀오였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이 곡에 마법이라도 걸린 줄 알았다.
‘두 분이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셔서 나랑 누나는 뒤에서 멍 때리고 있었지… 겨우 유치원생이랑 초등학생이었는데 말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 대학 장기 자랑에서 즉석으로 뽑힌 사람끼리 노래를 부르는 코너에서 부른 곡이었다. 두 분이 연애도 하기 전이라서 어색함으로 가득했지만, 노래를 부르는 짧은 시간 동안 스파크가 튀었다나 뭐라나. 아무튼, 부모님의 영향으로 나도 누나랑 이 노래를 많이 부르곤 했다. 가사의 뜻을 알고 난 후부터는 절대 둘이서 부른 일이 없었지만.
“고맙다, 재봉아!”
게다가 상황도 맞아떨어졌다. 재봉이가 말한 대로 90년대 가수와 노래들이 재조명받고 있다면 이 노래로 이전 세대에게는 추억의 곡의 향수를 자극하고, 현세대의 대중들에게는 새로운 감성의 무대를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정해진 것도 아니었지만, 이 곡으로 보여 줄 무대가 벌써 기대됐다.
* * *
“헐, 승빈이 기사 떴네?”
“어떤 거?”
“뮤직쇼 mc 확정 기사-”
“얘기 돌더니 진짜였네?”
[대세 크리드 문승빈, 뮤직 쇼 차기 mc로 낙점……]
7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 크리드의 문승빈이 뮤직쇼의 새로운 mc로 발탁되었다. 뮤직쇼 측은 ‘크리드 문승빈의 건강하고 전 세대에 사랑을 받는 이미지가 뮤직쇼의 이미지에 알맞기 때문에 캐스팅하게 됐다-’고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문승빈은 최근 크리드 2집 ‘READY’를 통해 초동 60만 장을 기록하며 신인 아이돌 초동 기록을 세우고, ‘READY 챌린지’를 통해 각종 음원 사이트 역주행을 이뤄 냈다. 또한, 운동 예능 ‘플레이 온 아이스’를 통해 10-50대 화제성 1위를 차지하는 등, 전 세대에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상대 MC로는 지난 ‘해피 콘서트’를 함께 진행한 신예 배우 ‘김민영’이 캐스팅되면서 이들이 어떤 케미를 보여 줄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관계자는 ‘눈과 귀를 사로잡을 스페셜한 무대를 준비하고 있으니 많은 기대와 응원 부탁드린다’며 기대감을 표했다…]
“스페셜 무대 뭐 할까?”
“듀엣 곡 하려나?”
“근데 여자 MC도 원래 아이돌 연습생이었다잖아. 잘하면 댄스곡 할 수도?”
“크리드 곡 하면 좋겠다.”
“그러게-”
벌써 음악 방송 MC를 맡다니. 생각할수록 승빈이 기특한 문스트럭이었다. 안 그래도 갈수록 음악 방송 MC에 대한 아이돌 팬들의 욕망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MC 자리가 공석이 나면, 누가 그 자리를 채울지를 가지고 인터넷에서 싸움이 날 정도였다. 매주 정기적으로 보장된 떡밥과 MC를 챙겨 주는 방송사, 그리고 콘셉에 맞춰 달라지는 의상까지. 그야말로 모두가 좋아할 만한 완벽한 떡밥이었거든.
“하, 승빈이 매주 새로운 의상 볼 생각하니까 벌써 떨린다.”
“난 진심 제복 기대한다.”
“나도, 거기에 한복도 제발. 설날 언제 오냐고.”
“일단 스페셜 무대 뭐 할지부터 기대해 본다.”
문승빈의 MC 소식을 가지고도 밤을 새울 수 있는 그녀들이었다.
“아오, 근데 이 머저리 같은 놈들 또 날뛰네-”
-여미새 문승빈 좋겠넼ㅋㅋㅋㅋㅋ 크리드 첫 열애설 주인공 되는 것도 승빈이 커리어에 업적으로 남을듯ㅇㅇ
└응 오늘부터 작두타고 니 최애한테 살 날리는 살풀이 할거임
└여자남자 같이 서있기만해도 사귄다고 하는 찐따같아ㅠㅠ
-승빈아 엠씨된거 축하해!
“야, 됐어 신경 쓰지 마. 원래 1군의 삶은 험난한 거야.”
“하긴, 어쨌든 우리 승빈이는 MC 하는데 저 정도는 달달한 수준이지.”
진정한 스타는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한다고 했던가. 이제 이 정도 견제는 우스운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