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지운이 형은 무대가 끝나고 곧장 정밀 검사를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승빈이는 MC 잘하고-”
“형도 잘 갔다 와요.”
“맞다. 나 없어도 오늘 준비한 거 잘 하고 오고.”
“알았어요.”
MC 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멘트를 이어 갔다. 속은 타들어 가는데 밝은 모습을 보여야 했고, 그래서인지 온몸의 에너지가 더 빨리 소모된 기분이었다.
“저희는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해피콘서트 MC 문승빈!”
“김민영이었습니다!”
“내년에 만나요~”
다 끝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다리에 힘이 풀렸고, 잠시 휘청거렸다. 멤버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있었다. 내 상태를 알고 있어서인지 다들 한 걸음에 달려와 내 주변으로 자리 잡았다. 박재봉이 가져온 슬로건을 내밀었다.
“형 슬로건도 제가 챙겼어요.”
“고마워.”
“지운이 형 몫도 형이 들래요?”
“…그래.”
그렇게 모두 양손에 준비한 슬로건을 꺼냈다.
[우리의 행운, Clo♡er]
팬라이트가 빛나는 곳을 향해 슬로건을 내밀었다. 공연장에서 슬로건을 들고 응원하는 팬들을 보고 준비한 이벤트. 삐뚤빼뚤한 디자인은 유현이 형의 작품이다. 놀란 얼굴로 기뻐하는 팬들의 얼굴을 보니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조금은 안정을 찾았다.
행사가 모두 끝나고 차로 돌아가니, 매니저 형이 방금 통화를 마친 듯했다. 그런데 어두워진 표정에 불안을 직감했다.
“지운이 형은 어떻대요?”
“살짝 삔 줄 알았는데 뼈에 금이 갔다고 하네…….”
“네?”
“일단 깁스하고 당분간 스케줄은 참여 못 할 거 같다.”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걱정과 동시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수술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어서 병원에서 치료하고 바로 숙소로 온다고 했어.”
자꾸만 지운이 형의 사고 당시 모습이 재생되면서 두통이 밀려왔다.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소속사 공식 계정에는 입장문이 올라와 있었다.
[차지운 건강 관련 공지]
[크리드의 멤버 차지운이 ‘해피콘서트’ 무대 중 리프트 사고로 발목뼈에 금이 가는 가벼운 부상을 당했습니다. 정밀 검진 결과 수술이 필요한 큰 사고는 아니지만, 당분간 안정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사 소견에 따라 추후 일부 스케줄에 불참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클로버분들의 너른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본사는 아티스트 건강 회복을 위해 전폭적인 관리와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ㅅㅂ 소잃고뇌약간고치기임?
-앞으로 지운이 없이 무대하는거야?ㅠㅠ
-가벼운부상인데 애가 왜 못걷죠?
└뼈에 금이 갔다매 미친놈들아;;
└가벼운부상 ezrㅋㅋㅋㅋㅋㅋ
-왜이래 코어 우리 좋았잖아;;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온통 지운이 형의 사고 얘기뿐이었다.
[크리드 차지운 리프트에서 추락…안전불감증이 낳은 사고]
[호전되기 전까지 활동 중단…]
[코어 공지 떴네 ㅅㅂ…]
아티스트 보호 이따위로 할거면 우리 지운이 내놔ㅅㅂ
코어 탈출하고 솔로하자 지운아
-ㅅㅂ알림떴는데 제목이 아티스트 건강 관련 입장인거보고 ptsd올뻔
-스케줄 굴리는것도 열받았는데 이런거 하나 제대로 케어못하면 소속사가 왜있는거임ㅋㅋㅋ
└안그래도 다리부상있는애인데ㅠㅠ
└진짜 왜 하필 지운이냐ㅠㅠ…
└다른애들은 괜찮다는 말인가?
-코어가 일처리 개같이한건 ㅇㅈ하는데 솔로는 뭐얔ㅋㅋㅋ 원래 하고싶었던 말은 막줄아니야?
└ㅇㅇ지운이 솔로 존버하는데 어쩌라고ㅋ
숙소에 도착하니 거실에 지운이 형이 보였다.
“어, 왔어?”
“형, 움직이지 말고 그냥 있어요!”
“맞아요, 우리가 갈게-”
그런데 지운이 형은 능숙하게 부목을 짚고 일어섰다.
“에이, 깁스 이미 해 봐서 괜찮아.”
그 말을 듣고 지운이 형의 얼굴을 보는데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리프트 사고를 당했던 장면이 눈앞에서 반복 재생 되면서 오싹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무대를 잘 마치고 왔냐는 지운이 형의 물음에 입도 뻥긋 못 하고 황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승빈이 왜 저래?”
“아직도 많이 놀랐나…….”
문 너머로 멤버들 목소리가 들렸고, 나조차도 이런 나의 반응에 당황했다.
‘내가 왜 이러지.’
그리고 이내 원인을 깨달았다. 직접적인 사고 장면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따지고 보면 지난 삶에서의 형이 더 위급한 상태였지만, 내가 본 건 오직 병실에 누워 있는 모습뿐이었다. 이미 벌어진 상황에 충격을 받은 거지, 상황 자체를 목격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바로 내 눈앞에서 형이 떨어졌다. 리프트에서 삐끗하는 모습, 떨어지는 순간의 형의 표정,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생생했다. 머릿속에 각인되어 버린 거다. 그래도 이렇게 신체적인 반응으로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도 충격이 더 큰 모양이었다.
심지어 다른 곳도 아닌 다리였다. 아무리 자책하지 않으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여기 있었구나?”
“…형?”
익숙한 목소리에 뒤돌아보니 지운이 형이었다.
“나 정말 괜찮다니까? 예전에 더 크게 다쳐서 그런가 이 정도는…….”
‘이 형은 그걸 지금 안심하라고 하는 말인가……?’
“죄송해요.”
“응?”
“그냥, 다…….”
“아까 전부터 답답했는데 네가 왜 죄송하고 미안하다는 건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
보기 드문 지운이 형의 단호한 눈이었다.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사실이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잘못한 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나는 그냥 그 현장에 있었을 뿐이고, 나 스스로도 사고를 막으려고 했을 뿐이니까. 결과적으로 원래 발생했던 선우 형의 사고를 막긴 했잖아.
나를 회귀하게 만든 상태창과 운명도 내가 무언가를 바꾸고자 한 노력에 딴지를 건 적은 없었다. 그게 영문 없이 4년 전으로 돌아온 나에 대한 마지막 자비였을 줄이야.
“그냥 다 제 잘못 같아요.”
“너, 그게 무슨.”
그 말을 들은 지운이 형의 얼굴이 지금 내 표정과 닮아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답함과 속상함이 동시에 담긴 눈이었으니까.
결국, 그날은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혼자 거실 소파에 누워 여러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막아야 할 일들이 더 남았는데, 과연 그걸 해결해야 할까? 만약 그러다가 또 지운이 형에게 위험이 생긴다면?’
그때, 선우 형이 거실로 나왔다. 아마도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기 위함이겠지.
“뭐야, 여기서 자?”
“네, 더워서…….”
횡설수설하다 보니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 말았다. 선우 형은 마시고 있던 물컵을 급히 내려놓고 물었다.
“더워서? 너 지금 11월인 건 알지?”
“…졸려서 말이 헛 나왔나 봐요.”
“그치? 아무튼 오늘 고생 많았다.”
“근데 형, 혹시 리프트… 잘 확인했던 거 맞죠?”
“응, 그때 분명 스태프분께 얘기했고, 무대 오르기 전에도 문제없다 그랬어.”
“하…….”
“다들 멀쩡히 올라오길래 안심했는데, 지운이 거가 그렇게 될 줄이야.”
선우 형의 말을 듣다가 또 다른 딜레마에 빠졌다. 만약 내가 지운이 형이 다칠 거라는 걸 알고 미래를 바꾸지 않았다면? 다친 사람은 원래대로 선우 형이 됐을 거다. 선우 형이 먼저 리프트를 타고 올라오는 거였으니까, 형이 다쳤다면 거기서 모든 무대가 멈췄겠지. 자연스럽게 뒷 순서였던 지운이 형은 리프트를 타지 않았을 거고, 다치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랬다면 또 바꿀 수 있는 미래를 바꾸지 못했다고 자책했겠지.
‘X발, 나보고 뭘 어쩌라고.’
누군가의 가치를 두고 저울질하는 것 자체에 회의감이 들었다. 과연 내가 타인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걸까. 너무 오만한 생각 아닌가.
“많이 놀랐을 텐데 푹 쉬어.”
“형도 잘 자요.”
깜깜한 창문 밖이 다시 환해질 때까지도 한숨도 자지 못했다.
* * *
지운이 형이 잠깐 활동을 중지했어도, 아무리 그 사건에 충격을 받았어도 일상은 멈추지 않고 돌아갔다. 지금 내가 아이스링크장에 서 있는 것처럼.
“자, 여러분. 오늘도 신나게 스케이트 탈 준비가 되셨나요?”
“최 피디님, 오늘은 또 무슨 콘셉이세요?”
“그러게요. 옷은 얌전한데 안경만 추가하셨네요.”
“오늘은 심플하게 잘나가는 피디 컨셉입니다.”
“피디님이 생각하는 잘나가는 피디가 뭔지 궁금해지는데요?”
“바로 저죠. 그래서 제 모습 그대로 나왔습니다.”
“와…….”
“피디님, 승빈이 표정 굳은 거 봐요.”
“승빈아, 미안하다. 어린 애한테 못 볼 꼴 보여 준다.”
오늘도 역시나 티키타카가 장난 아닌 플온아 팀이었다.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평소와는 다르다고들 느꼈는지 차분한 내 모습마저도 캐릭터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아니요, 저는 피디님이 완벽하게 콘셉을 잡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와- 문승빈. 사회생활 잘하는 거 봐.”
“다들 보셨죠? 저는 승빈이 말만 믿습니다.”
“피디님, 제가 뭐라고 했죠? 분명 지적인 천재 피디 느낌이 난다고 했던 거 같은데요?”
그 배려에 보답하기 위해 나도 얼른 텐션을 올렸다. 다행히도 내가 한 마디만 해도 열 마디가 붙는 촬영장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오프닝 녹화를 마칠 수 있었다.
“형도 많이 놀랐겠어요.”
“어?”
“멤버분이 다친 걸 봤다면서요.”
“아…….”
“저도 예전에 앞 순서였던 선수가 크게 넘어져서 다친 걸 봤었거든요.”
“…….”
“그때 내가 다친 게 아닌데도 순간적으로 과호흡이 와서 경기 못 했어요.”
“아예 경기를 못 했다고?”
“네, 그때는 진짜 내가 약해빠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동안 힘들었거든요.”
“그런 적이 있었구나…….”
“저는 그냥 얼굴만 알던 선수인데도 그랬는데, 형은 같은 팀 멤버잖아요. 기사 보고 많이 놀랐겠다 싶었어요.”
“너, 내 기사도 찾아봐?”
“당연하죠! 형은 제 거 안 찾아봐요?”
“…….”
“와, 대박. 저는 크리드 기사도 다 찾아보는데!”
실망이라며 방방거리는 이정훈 덕에 오늘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희미하지만 미소를 띈 나를 보고 더 오버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것조차도 고마웠다.
“됐어요. 얼른 스케이트나 탑시다.”
“그래, 오늘은 뭐 해 볼 거야?”
“일단 스파이럴을 한 번 해 볼 거에요.”
“오, 나 그거 알아. 한 다리 들고 쭉 나가는 거 아닌가?”
“맞아요! 정식 경기에서는 이제 점수 때문에 잘 안 하는데, 저희는 갈라쇼 하는 거니까.”
“해 보고 싶었는데!”
“한번 해 보면 속이 다 시원해질걸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정훈은 훈련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다리를 들고 중심을 잡기도 힘들었지만, 넓은 링크장을 시원하게 가르고 있으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해방감이었다. 게다가 넘어지지 않게 보조 기구까지 달고 연습하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냥 내가 가고 싶은 대로 달리기만 하면 된다니. 손끝까지 짜릿했다.
“어때요? 제 말이 맞죠?”
“응!”
“뒤에 한번 봐 봐요. 형이 얼마나 열심히 탔는지-”
뒤돌아보니 스케이트 날이 지나간 흔적이 가득했다. 내가 움직인 모든 궤적이 한데 모여 마치 그림을 그려 놓은 것 같이 보였다.
“신기하죠? 얼핏 보면 전부 다 똑같은 거 같아도 지나온 길이 다 보인다니까요?”
잘 참고 있었는데 마지막 한마디에 울컥했다. 정훈이가 왜 오늘 스파이럴을 알려 줬는지 알 것 같았다.
“고맙다.”
짧지만 모든 감정을 담고 있는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