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크리드 축하합니다! 앵콜 무대 준비해 주세요. 그럼 인사 드릴까요? 음악이 있는 곳에는 항상 뮤직~쇼!”
앵콜 무대를 준비하면서 출연진들의 축하와 인사를 받았다. 포커스 역시 우리 앞을 지나갔지만 대충 고개만 몇 번 까딱이다가 내려갔다. 특히 예전에는 옷깃만 스쳐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선배님, 선배님 하던 오재성도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다.
‘1위 못 해서 여간 자존심 상한 게 아닌가 보네.’
데뷔 앨범 때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2집까지 어느 정도 성공하니까 벌써 기고만장한 듯했다. 어쩜 저런 애들만 모아 뒀는지, 저것도 VM의 능력이다 싶었다. 강도현이 저기서 함께 데뷔했다면 꽤나 고생했을 거 같았다.
“클로버, 고마워요~”
“사실 저희가 오늘 여러분께 감사한 마음 전하고 싶어서 선물로 준비한 무대인데 이렇게 1위까지 하게 돼서 더 기뻐요!”
“와!”
다시 탈환한 1위의 기쁨은 팬들의 함성 소리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멤버들 모두 벅차는 마음을 가진 채 앵콜을 마쳤다.
아직도 벅찬 심장을 겨우 추스르고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에 오재성을 마주쳤다.
“오랜만이네?”
“겨우 한 주 안 나오셨는데 오랜만은 쫌…….”
“응?”
“아니에요, 오늘 1위 축하드려요.”
‘뭐지, 이 X끼?’
평소와는 전혀 다른 싸한 분위기였다. 오랜 연예계 생활하면서 얻은 노하우가 몇 가지 있는데 말이지, 인기에 따라 변한 사람들을 많이 봐서 그런가, 사람의 변한 분위기와 태도에서 오는 싸함을 감지하는 촉이 유독 발달했다.
아차 싶었는지 금세 표정을 바꾸고 다시 선배님, 선배님 하는 오재성이었지만 이미 한 번 느낀 싸함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오늘 정말 축하드리고, 다음 활동 때 또 뵀으면 좋겠어요!”
“어, 그래.”
여기서 끝났다면 그만이었겠지만, 더한 뒤통수가 남아 있었다.
“5주나 지난 곡으로 1위 하는 거 좀 웃기지 않냐? 그것도 다른 사람들 챌린지빨로.”
방송국은 생각보다 좁다. 게다가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곳은 거기서 거기였고. 1위 인증 샷을 찍기 위해 복도 구석 쪽 계단으로 향했는데, 거기서도 포커스를 마주쳤다. 이쯤 되면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었다.
“쟤네 지금 우리 얘기하는 거야?”
먼저 찍으러 온 게 강도현과 나라서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아니, 계약직들 주제에 왜 그렇게 나대는 거임?”
“그니까. 어차피 해체할 그룹이-”
“발악을 해요, 존X.”
‘얘가 정신이 나갔나?’
아무리 외진 곳이라고 한들 대기실 안도 아니고 밖에서 저렇게 입을 나불거리다니. 드디어 내가 아는 오재성의 모습이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티벡스 멤버들에게도 외부 사람들에게도 한결같이 재수 없던 인간이었거든. 회귀 후로는 처음 드러난 오재성의 본색이 반갑기까지 했다.
“그러게. 계약직한테도 벌써 밀리면 어떡하지?”
강도현이 도저히 못 참겠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성격도 급하셔라.
‘아씨, 찍어 두려고 했는데-’
툭-
소리를 듣고 꼴에 놀라긴 했는지 오재성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뒤돌아 있던 김병대는 뒤늦게야 상황을 파악하고 얼굴이 굳었다. 그럴 만도 하지, 뒤따라서 나타난 내가 캠코더를 들고 있었거든.
“1위 비하인드 찍으려다가 대어를 낚았네?”
일부러 더 재밌다는 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원래 화날 때 웃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이거든.
“선배님… 설마 지금 촬영 중이신 겁니까?”
다급하긴 했는지 다시 존댓말을 장착하는 오재성이었다. 존댓말이 무슨 탈부착도 아니고, 아주 제멋대로지.
“웅, 우리 재성 씨는 눈이 좀 안 좋은가? 여기 빨간불 안 보여?”
“…….”
급하게 켠 거라 당연히 앞 장면은 하나도 안 담겼지만, 진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쟤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중요했지.
“내가 시크릿싱어 같이 찍으면서 재성 씨 목소리가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화내는 목소리 들으니까 딱 알겠네. 누가 들어도 이건 재성 씨 목소리라고.”
“다행이다, 그치? 얼굴은 마지막에만 나왔는데도 앞에 대화 소리가 너무 잘 들리겠어.”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뭐가 죄송해요. 맞는 말 했잖아. 우리 계약직 맞는데, 뭘? 그렇지, 도현아?”
“야, 연예인이 다 계약직이지. 누가 정규직이겠냐?”
“왜- VM은 정규직 시켜 주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가 봐?”
“나도 아닌데 고작 쟤네가 정규직이겠냐?”
이유 있는 자신감이었다. 회귀 전에도, 후에도 VM이 강도현보다 아끼고 밀어 주던 연습생은 없었거든. 지금도 어떻게든 빨리 강도현 겸업시키려고 물밑 작업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계시는지, 신경을 끄려고 해도 계속 소식이 들려올 정도였다.
“병대야, 넌 정신 좀 차린 줄 알았더니-”
“죄송합니다. 도현이 형! 근데 정말 형한테 그런 건 아니었어요.”
“우리 그룹한테 한 건데 어떻게 내가 빠진다는 거냐? 넌 지금 그걸 말이라고.”
“…….”
억울하겠지. 김병대의 말이 틀린 건 아닐 거다. 쟤가 강도현을 얼마나 우상시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얼른 크리드 때려치우고 포커스에 강도현이 합류할 날만 물 떠 놓고 기다리고 있을걸? 그래서인지 내가 이 상황을 찍었다는 것보다도 강도현의 날 선 말이 김병대에게는 더 크게 다가온 것 같아 보였다.
오재성만이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가 기회다 싶었다. 오재성을 떠볼 기회.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회귀 전 오재성이 맞았다. 쟤도 기억이 남아 있는데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근데 재성 씨는 나랑 피차일반 아니었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아… 요즘은 연기하고 싶어 하지는 않고?”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은근슬쩍 티벡스 시절 얘기를 꺼냈다. 잠깐 표정이 굳은 거 같기는 한데 내 착각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대답에 일단 일보 후퇴하기로 했다.
“아니, 이렇게 표정 하나 못 숨기는 거 봐서 연기는 그른 거 같아서-”
“…….”
“혹시라도 연기할 생각 있으면 그냥 빨리 접으라고 조언해 주는 거예요.”
몸을 돌려 여전히 망연자실한 표정의 김병대를 응시했다.
“병대야, 너도 조심해라. 이분 야망 있으신 분이야. 포커스도 금방 그만두실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도현이 합류를 기다릴 게 아니라, 너네 그룹 망하지 않게 조심하라고. 재성 씨가 하고 싶은 게 참 많으시던데, 포커스로는 만족 못 하실 거다.”
이제 저 인간이 회귀 전 오재성이건 아니건 상관없었다. 사람 쉽게 안 변한다고 어차피 똑같은 인간인 건 다를 바 없었으니까.
* * *
“아니, 뭐 했다고 벌써 2집 활동이 끝났냐?”
“진심. 공백기 실화냐고-”
“역주행 덕분에 한 주 더 활동했는데도 아쉬워.”
“지난주 이 시간만 해도 우리 상암이었는데-”
“그니까, 벌써 전생 같다.”
활동기에는 활동기라서 만나고, 공백기에는 또 공백기라서 만나는 그녀들. 이제 크리드가 만남의 목적인지 수단인지도 헷갈릴 정도로 친해진 레빗드림과 문스트럭이었다.
“아니, 근데 나 사진 정리하다가 너랑 처음 만난 날 사진 봄.”
“와… 제발 그날의 기억을 잊어 주시겠어요?”
“어떻게 잊겠냐, 그걸.”
둘의 만남은 정말 개판 그 자체였다. 크리드의 첫 쇼케이스 콘서트 출근길을 찍기 위해 일찍부터 자리를 잡은 둘은 나란히 제일 앞을 차지했다. 생각보다 질서정연했던 현장은 크리드가 등장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고, 신기루도 그 정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문스트럭은 회상했다.
덩치 큰 대리 찍사들에게 밀려서 넘어질 뻔했던 문스트럭을 잡아 준 게 바로 레빗드림이었다. 그렇게 처음 안면을 튼 그녀들이 다시 만난 건 놀랍게도 바로 1시간 뒤, 쇼콘 스탠딩 현장. 우연히 같은 구역이었던 둘은 서로 대포 카메라를 숨겨 온 걸 보고 바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다음부터는 수월했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연륜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 둘은 몇십 년을 함께한 노부부인 양 완벽한 합을 자랑했다. 문스트럭이 경호원에게 들킬 뻔하면 레빗드림이 슬로건으로 막아 주고, 레빗드림이 들킬 뻔하면 문스트럭이 카메라를 넘겨받아 숨겨 주고는 했다.
쇼콘이 진행되는 두 시간가량을 함께한 둘은 어차피 앞으로 자주 볼 사이라며 그날 바로 번호를 교환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지금까지 거의 모든 현장을 함께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이나 영상을 공유하기도 하며 상부상조하는 관계가 된 거다.
“미친, 크리데이 떴다.”
[CR:IDAY: 역주행은 처음이라-♫]
“제목부터 벌써 귀엽다.”
“얼른 켜 봐.”
영상을 켜자마자 나오는 건 들뜬 표정의 박재봉이었다.
“헐, 우리 애기-”
“그래, 재봉이는 진짜 애기긴 하다.”
“하, 우리 봉봉이 지금 쌩얼인 거지?”
“그런 듯? 어려서 그런가, 피부 미쳤네.”
누가 봐도 신난 박재봉이 카메라를 조정하더니, 대뜸 레디를 추기 시작했다. 레디 챌린지의 그 안무였다.
“여러분, 다들 레디 챌린지 보셨나요? 저 진짜 몇 번을 돌려 본 지 몰라요.”
“그런데 제가 따라해 보려고 해도 이미 안무가 익숙해서 안 되더라구요.”
“뚝딱거리기 힘들었다는 건가요?”
“아이, 얘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요~”
빈틈을 놓치지 않고 강도현이 박재봉을 놀리기 시작했다.
“쟤네 둘은 투마월 때부터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는 거 같아.”
“완전 톰과 제리잖아.”
소란스러운 대기실이 한순간에 집중되는 외침이 들렸다.
“얘들아, 우리 1위야!”
“네?”
“레몬차트 1위래!”
“진짜요?”
“대박!”
멤버들은 곧장 매니저의 곁으로 모였다. 멤버들은 믿기 힘들다는 듯 입을 틀어막고 몇 번이고 새로 고침을 했다.
“헐, 애들도 음원 1위할 때 보고 있었구나!”
“저때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에 소름 돋는다니까?”
“나 회사였는데 소리 지를 뻔했잖아-”
특히 승빈은 한참을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른 멤버들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하면서 기쁨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오늘의 일일 리포터 재봉입니다! 승빈이 형, 역주행하니까 어때요?”
“와… 이게 진짜 되네요……?”
“승빈이 형, 아까부터 화면만 보고 있어요!”
“클로버가 진짜 짱인 것 같아요…….”
문스트럭은 그동안 총공 팀에게 보낸 음원 선물과 사회적 지위를 버리며 온갖 SNS 배경 음악으로 설정했던 자신의 노고가 한 번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밤새 스트리밍이 끊길까 봐 전전긍긍하던 시간도 스쳐 지나갔다.
“우리 진짜 개같이 고생했어…….”
“진심. 이번이 제일 힘들었어. 그래도 챌린지 나오고 대중 픽 되면서 음원 순위도 확 오르고 다행이었지.”
다른 멤버들이 카메라를 보면서 소감을 말할 때도 승빈이만 일시 정지 시켜 놓은 것 같았다. 작은 미동도 없이 핸드폰 화면만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찰나였지만 문스트럭은 포착했다, 승빈의 눈물을.
“미친, 승빈이 울어.”
“운다고?”
“잠깐 멈춰 봐. 10초 뒤로- 어, 거기!”
느린 배속으로 다시 확인하니 더 확실했다. 화면을 응시하던 승빈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다른 멤버가 발견하기도 전에 닦아 냈지만, 문스트럭은 찡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와, 너도 대단하다. 저게 어떻게 보였냐?”
“그러게, 나도 신기하다.”
“진짜 찐사랑이다.”
정말 찐사랑이었다. 그렇게 오래 덕질을 했던 그녀조차도 처음 마주하는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