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병실에 도착해 보니 소연이는 유현이 형이 준비한 선물을 품에 안고 있었고, 다시 미소를 되찾은 듯 보였다. 매니저 형은 영혼이 전부 빠져나간 듯 재잘거리는 소연의 앞에서 리액션 로봇인 양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 승빈 오빠도 왔다!”
“많이 기다렸어? 유현이 형 찾느라 좀 오래 걸렸지-”
“집에 간 줄 알았어요!”
아쉽게도 처음 매니저 형이 약속한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았다. 소연이는 아쉬워하면서도 금세 씩씩하게 말했다.
“저 사진 같이 찍어도 돼요?”
사진은 조금 난감하다는 반응이었지만, 유현이 형의 설득과 소연이의 간절함에 매니저 형도 허락했다.
“자 찍는다- 하나, 둘 셋!”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오늘 정말 꿈 같았어요. 죽을 때까지 절대 못 잊을 거 같아요.”
“치료 잘 받고 꼭 건강해져서 나중에 콘서트 하면 놀러 와. 알겠지?”
“네!”
해맑은 얼굴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병실을 나서는 순간까지 서로 손인사를 멈추지 않았다.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정영훈은 우리가 떠나는 걸 보면서도 묵묵히 병실을 지켰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유현이 형은 생각에 잠긴 듯 창밖만 보고 있었고, 나는 넌지시 말을 걸었다.
“소연이 정말 사랑스럽죠?”
“응, 얼른 나아서 진짜 콘서트에서 만나면 좋겠다.”
“반드시 그럴 거예요.”
“오늘 고마웠어. 혼자 왔으면 오늘처럼 좋은 시간 못 가졌을 거야.”
“에이, 저도 형 덕분에 클로버 만나고 오히려 제가 고맙죠.”
사실 단순히 동행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오늘 내가 형이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 것은 계속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저, 매니저 형.”
“응?”
“혹시 컴백 전에 하루 정도 본가에서 외박하고 와도 될까요?”
“그래, 너 연휴 때도 본가 안 내려갔었잖아. 일정 알아볼게.”
“고마워요, 형.”
숙소에 돌아오니 멤버들이 거실에 모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요?”
“어디 갔다 온 거야?”
“영화 재밌었어?”
“영화 무슨 내용이었어요?”
주인 반기는 강아지가 달려들 듯이 질문 세례가 쏟아졌고, 유현이 형은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영화 내용을 줄줄 읊었다.
“그래서 사실 진짜 빌런은 A였어. 됐지?”
“와, 그 영화 안 봐도 될 듯. 이미 다 보고 온 거 같아.”
“헐, 스포 당함.”
‘설마 저것까지 계산하고 줄거리랑 영화 관련 내용을 외워 둔 거야? 진짜 저 형도 보통내기가 아니라니까…….’
마지막까지 의심하던 멤버들도 정말 영화를 보고 온 게 맞구나 믿기 시작했다.
“늦었어. 들어가서들 자, 이제.”
“알았어요- 다들 굿나잇!”
다들 방으로 돌아가고, 나는 몰래 화장실로 나왔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 부모님과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부모님이 계신 미국은 지금 아침이어서 바로 답장이 왔다.
[아들 롱타임노씨^^ 잘 지내?]
[요즘 연락이 하도 없어서 어디 잡혀간 줄 알았잖아~]
[이제 데뷔했나? 활동하는 건 어때?]
‘역시 크게 관심이 없으시군.’
[뭐야? 안자냐?]
[용돈 필요해?]
[뭐래]
[뭐래? 누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명절 때도 못 만나서 연락해봤어.]
[맞다. 엄마가 보낸 음식은 잘 먹었냐? 존맛이던데.]
[ㅇㅇ멤버들이랑 같이 먹었어.]
[암튼 건강 잘 챙기고. 괴롭히는 애들 있으면 말하고.]
누나의 시답잖은 농담에 작게 실소했다. 애틋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우리 남매만의 편안함이 유독 따듯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 * *
지난 몇 주는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 주 토요일이 대망의 컴백쇼 촬영 날이었다. 컴백쇼에서는 선공개곡인 ‘카운트다운’을 시작으로 팬송인 [CL♡VER]와 데뷔곡 ‘신세계’ 등을 선보일 예정이었다.
타이틀곡인 ‘레디’는 음원 공개 전 유출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비공개로 진행된다고 해서 내심 아쉬웠다. 무대를 지켜보는 관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에너지가 달랐으니까.
그사이 유현이 형은 본가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왔다.
“부모님 잘 만나고 왔어요?”
“응, 오랜만에 집밥 먹으니까… 좋더라.”
“헐, 부럽다-”
“아,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에이, 장난이죠. 그리고 아직 숙소에 명절 때 보내 주신 음식 한참 남았어요.”
“뭐야, 둘이 무슨 얘기해요?”
“맞아. 요즘 둘이 부쩍 친해진 거 같다?”
확실히 유현이 형 일이 있던 후 대화를 하거나 교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데뷔하고 나서도 친해지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에이, 우리 원래 친했거든? 근데 다들 컴백쇼 세트장 사진 봤어요?”
“매니저 형이 단톡방에 올려 준 거? 당연히 봤지”
“우리 데뷔 무대보다 더 화려하던데?”
“내일 직접 눈으로 봐야 실감이 날 거 같아.”
“자, 자. 이제 집중하고 다시 연습 들어간다!”
“네!”
먼저 신곡 ‘레디’ 안무를 맞춰 봤다. 확실히 신세계만큼 빡센 안무는 아니지만, 발을 사용하는 안무가 많았다. 자잘한 스텝이 많아 발이 무대 위에 붙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특히 무대를 하나의 운동장이라고 생각하고 계주하듯이 양옆에 멤버들이 서 있고, 솔로 파트를 맡은 멤버가 그 사이를 달려가는 안무가 포인트였다.
[너에게 지금 달려가
Run to you
운명의 바톤을 쥐고
숨차게 Run to you]
[제목: 레디(READY!)]
-노래: ■■■■□
-안무: ■■■■□
‘둘 다 하나씩 모자라네…….’
확실히 상태창을 여러번 경험하면서 포인트를 올리는 데 익숙해졌다. 그리고 노래 포인트 자체를 높여서 가창력 상승을 만들어 내서 그런지, 노래 포인트는 상대적으로 빨리 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번 앨범을 준비하는 동안 상태창을 업그레이드할 만한 미션창이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하나 나오고 채우면 딱인데.’
이렇게 생각하면 드라마처럼 미션창이 딱 나올 거 같았지만, 상태창은 내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달려갈게’ 연습 도중 뜬금없이 등장했다.
[동료의 칭찬 0/2] +1
(제한시간: 5시간)
▶성공 시: 1 포인트 적립
‘동료의 칭찬?’
이런 애매한 미션은 솔직히 시스템 오류로 다시 송출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여간 제멋대로다. 일단은 연습에 집중하기로 했다. 연습을 열심히 하다 보면 누구 하나는 칭찬을 해 주겠지. 칭찬에 제일 후한 사람이 누굴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운이 형도 칭찬을 자주 하지만 뒤에서 조용히 칭찬해 주는 편이었다.
‘재봉이랑 윤빈 형을 노려야겠어.’
“빈이 형, 저 여기서 이 제스처할 때 어때요? 괜찮죠?”
“응? 아~ 근데 거기서 손목 각도 조금 더 신경 쓰면 더 좋을 거 같아!”
‘응? 이게 아닌데?’
잊고 있었다. 이 형이 생각보다 더 프로페셔널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렇게요?”
“응! 훨씬 좋네-”
‘이러니까 무슨 관종이 된 거 같잖아…….’
결국 칭찬을 받았지만 상태창은 요지부동이었다. 옆구리 찔러서 받아 낸 칭찬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건가. 쉽게 성공할 줄 알았던 윤빈 형에게서 뼈 아픈 실패를 맛보고 다음으로 누구를 노려야 하나 연습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모든 준비가 끝난 지금
달려가고 있어
3 2 1 너를 향한
마지막 카운트다운]
선공개곡인 카운트다운에서는 3, 2, 1 카운트다운을 세는 수신호가 포인트 안무인데, 이때 내가 원샷을 담당하게 됐다. 손가락으로 3, 2, 1을 하는데 어떻게 해야 시선을 끌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 각 숫자마다 표정을 다르게 하기로 했다.
“오~ 저 부분 분명 킬포라고 클로버들이 엄청 좋아하겠다!”
“괜찮았어?”
“어. 전부터 느낀 건데 너 진짜 표정 잘 쓴다.”
“오, 강도현이 칭찬을 다 하고?”
강도현이 칭찬을 하고 난 후 처음으로 상태창에 변화가 생겼다.
[동료의 칭찬 1/2] +1
‘예상대로 자발적인 칭찬만 카운팅되나 보군.’
뜻밖의 인물에게서 첫 칭찬을 받았다. 강도현도 멤버들의 반응에 머쓱해졌는지 말을 덧붙였다.
“전 잘하는 건 잘한다고 하는 사람이거든요?”
“도현이 멋지네~”
“원래 멋진 사람은 다른 사람 칭찬도 잘하는 거래요-”
강도현의 칭찬이 익숙하진 않았지만, 기분은 좋았다. VM 시절부터 아닌 척했지만 강도현의 재능을 부러워했으니까. 그런 애한테 인정받는 건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재봉아, 나 이 부분 봐줘 볼래?”
“왜요~ 유현이 형한테 봐 달라고 하세용. 둘이 요즘 완전 친하던데~”
“아, 뭐야-”
“맞아, 둘이 영화도 보러 가고~”
단체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건지 유현이 형만 언급하길래, 결국 형에게 부탁했다.
‘아직 1대1로 피드백을 받기에는 민망한데-’
“한번 해 봐.”
내가 맡은 파트와 댄스 브레이크 부분을 보여 줬다. 그러자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던 유현이 형이 입을 열었다.
“너…….”
안 그런 척했지만 긴장해서 절로 꿀꺽하고 침이 넘어갔다. 이 형도 절대 거짓말이나 빈말을 못 하는 형이니까. 까이지만 않아도 성공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춤 진짜 많이 늘었다.”
“네?”
“뭘 그렇게 놀라? 춤선도 많이 정리되고 플레이 온 아이스 준비한다고 운동하더니 힘도 많이 길렀네.”
“와… 나 유현이 형이 저렇게 칭찬하는 거 처음 봐.”
“형, 저도 칭찬해 줘요!”
갑자기 유현이 형 주위로 멤버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유현이 형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하나하나 칭찬을 해 주었다.
[동료들의 칭찬 2/2] +1
채워진 미션창보다 더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 * *
정연은 맥주와 안주를 챙기고 모니터 앞에 앉았다. 원래라면 친구인 문스트럭과 함께 본방을 시청하려고 했으나, 가족 행사로 시간이 안 맞아서 취소됐다.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플레이 온 아이스’ 불판을 켜 두고 다른 팬들과 함께 달리기로 한 그녀였다.
지난 1화는 시청률 7%로 운동 예능계의 마이더스 손인 최 피디의 역대 프로그램 중 가장 높은 첫방송 시청률을 기록했다. 예능 프로그램 화제도 역시 1위를 기록했다. 황금 시간대에 배정되고 출연진들이 유명한 이들이었기 때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승빈의 공이 가장 컸다.
방송이 끝나고 한동안 승빈의 이름은 검색어 상위권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개인 화제도 역시 1, 2위를 다투고 있었다. 이정훈 선수의 팬들 또한 선수와의 케미를 보여 준 승빈에게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방송 효과인지 피겨 스케이팅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급격히 상승했다. 이정훈 선수는 각종 SNS에서 ‘훈남 피겨 선수’라는 수식어로 불렸고, 그의 지난 경기 영상들의 조회수도 꾸준히 오르며 인기를 실감했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 팬들끼리 채팅방을 통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승빈이 완전 대박이지 않아요? 브랜드평판지수도 엄청 올랐잖아요
-플온아로 대중인기도 완전 잡아갈 수 있을거같음ㅇㅇ
-진짜 안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의 의인화 문승빈ㅠㅠㅠㅠ
-이번주는 어떤 내용일까요? 정훈선수랑 케미 너무 기대됨
-근데 너무 자주넘어져서ㅠㅠㅠㅠㅠ맴찢임
└진심ㅠㅠㅠㅠ 승빈이 무릎 나가는거 아니냐며ㅠㅠㅠ
-문승빈 관절 지켜ㅠㅠㅠㅠㅠ
그사이 2화 오프닝이 시작됐다. 이번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로 모니터 앞에 앉은 최 피디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