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168화 (168/346)

168화

“승빈이 형 엄청 고생했네-”

“맞아. 엉덩이 안 아팠어요?”

“말도 마. 나 촬영하고 나서 멍 엄청 들었잖아.”

“부상 안 당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어쩌겠어, 내 몸이 안 따라준 걸.”

숙소에서 다 같이 ‘플레이 온 아이스’ 1화를 시청했다. 다행히 편집도 괜찮았고, 팬들의 반응도 좋았다. 방송이 나올 때까지도 믿으면 안 된다는 걸 4년간의 연예계 생활과 투마월 때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에, 죄송하지만 최 피디에 대한 경계도 늦추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피디님이 현장에서 보여 준 반응과 방영된 분량이 전혀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나는 몰랐던 이정훈 선수의 인터뷰를 보면서 더 큰 고마움을 느꼈다. 회귀 전과 같다면 4년 뒤에 국가 대표로 선발되어 메달 획득은 실패했지만, 한국 피겨 최고 순위를 기록하는 인간 승리를 이뤄 낼 것이다. 회귀 전보다 더 일찍 만난 인연인 만큼 꾸준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이렇게 회귀 전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과 다른 세계에서도 만나게 되는 몇몇 순간들이 있을 때마다 회귀한 것을 후회하기도 하고, 좋아하게 되는 나 자신이 신기했다. 4년이 지나서 회귀 전 그날까지 돌아간다면 그 이후로는 또 어떤 삶이 이어질지가 궁금하기도 했고.

“때마침 티저도 떴네.”

“오늘이 누구지?”

“나 다음이니까 지운이겠네.”

“맞네. 지운이 형 거다.”

“틀어 봐. 나온 김에 같이 한번 보자.”

“콜-”

플레이된 영상에서는 배턴을 넘겨받고 달리는 지운이 등장했다. 형광기 도는 쨍한 색감의 영상미가 청량감을 더하고 있었다. 파랑색 헤어 밴드와 흑발의 조합이 잘 어울렸다. 지운이 형이 박재봉 다음으로 공개되자 역시 공개 순서의 기준을 궁금해하는 반응이 많았다.

-엥 역순이 아니네?

-유현이 다음에 지운이?

-하긴 데뷔곡때도 등번호 순으로 나왔잖아.

-이번에도 뭔가 있나?

“오, 역시 지운이 형 잘 달리네.”

“제 거 영상 보셨어요? 달리기 못한다고 엄청 뭐라고 하던데.”

“근데 팬분들은 아직 티저가 어떤 순서인지 모르시더라.”

“맞아. 순서 가지고 엄청 궁금해하시고 다방면으로 궁예하시던데-”

“너무 본격적으로 해석하신 분도 있어서 괜히 민망했어.”

“이거 우리 나중에 비하인드 영상으로 풀리려나?”

“아마 그럴걸? 그때 우리 달리기 시합 할 때 크리데이 캠 찍는 거 봤어.”

“하, 제 팬분들 제가 제일 먼저 나왔다고 좋아하시던데…….”

“맞아. 재봉이가 또 처음이라 나이 역순이라고 생각한 분도 많더라.”

콘텐츠가 공개될 때마다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게 흥미로웠다. 가끔 보면 코어와 우리의 기획보다도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팬들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역시 애정을 이길 수 있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지운이까지 공개됐으니까 이제 남은 애들이 누구지?”

“승빈이, 도현이, 윤빈이.”

“순서를 도통 알 수가 없네.”

“와중에 오늘 정오에 뭐 또 공개되지 않나?”

“선공개곡 공개될걸?”

“진심 바쁘다 바빠 클로버 사회다.”

방금까지 문스트럭의 주접 가득한 통화를 들으며 ‘플레이 온 아이스’ 본방 사수를 마친 K와 A는 곧 공개될 서브곡 ‘Countdown’을 기대 중이었다.

“이 노래에 윤빈이 작사 작곡 참여했다고 했지?”

“응.”

“자작곡을 선공개로 냅다 공개하는 거 너무 좋다 진짜.”

“그니까. 자신 있다 이거잖아-”

얼마 지나지 않아 공계에 알림이 떴다.

[CR:ID ‘Countdown’ MV (링크)]

“떴다.”

“미친, 뭐야. 아예 뮤비까지 나오는 거임?”

“그러게. 노래만 나오는 줄 알았더니-”

예상치 못한 뮤직비디오 공개에 놀라기도 잠시, 영상을 재생하는 순간부터 이미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한 그녀들이었다.

“지금 애들 흰 티에 청바지만 입은 거냐?”

“미친. 뮤비도 완전 단체 흑발이네.”

“흑발에 흰 티에 청바지까지? 작정했네, 진심.”

“역시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 애들 진짜 왜 이리 청순함?”

그라피티가 가득한 벽을 배경으로 시작된 뮤직비디오에서는 각자의 스타일로 흰 티와 청바지를 입은 멤버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나시를 입은 윤빈과 지운, 반바지를 입은 재봉과 승빈, 위에 흰색 셔츠를 걸친 유현 등 각자의 개성이 돋보이는 옷차림이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고 멤버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벽면에 적고 있었다. 물감과 스프레이로 흰 티가 얼룩져 가기 시작했지만, 멤버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라피티를 계속 그려 나가고 있었다.

“서로 얼굴에 물감 묻히는 거 봐. 너무 귀엽다, 진짜.”

“재봉이는 거의 뭐 눈을 못 뜨는데?”

완성된 그라피티에는 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물품이 그려져 있었다. 농구공과 축구공, 야구 배트와 스케이트화까지. 서로 다른 7가지 물품이 알록달록하게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엇다.

“설마 애들 진짜 운동부 콘셉인가?”

“그니까. 지금 저기 7개 각자 그린 거잖아.”

“이게 타이틀곡이랑 연관되는 건가?”

그녀들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전환된 화면에서는 편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멤버들이 등장했다. 다 같이 체력 단련이라도 하는 듯 산길과 도로를 일렬로 줄 서서 뛰는 모습이 연달아 나왔고, 지친 듯한 멤버들이 하나둘 바닥에 쓰러지듯 드러눕기도 했다.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크리드 멤버 전원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마치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처럼 뿌듯해하는 표정들이었다.

“애들이 각자 무슨 운동이건 연습하고 대회 준비하는 내용인가 봐.”

“영상미 돌았다. 완전 청춘 영화 한 편 아니냐.”

“아니, 다들 거의 쌩얼 수준의 메이크업인데, 얼굴 무슨 일이야.”

“달리기할 때 지운이가 잠깐 뒤처지니까 승빈이가 돌아와서 페이스 맞추는 장면 봤냐고.”

“그거 진심 내 최애 장면이다.”

노래는 점차 클라이맥스에 다다르고, 훈련을 이어 가던 멤버들이 마치 캠프파이어를 하는 것처럼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았다. 진지한 얘기를 나누는 듯한 장면이 이어지더니, 마지막에는 다들 파이팅을 외치며 의지를 불태웠다.

“미친, 이어지는 거 맞나 봐.”

“마지막에 나온 레디셋고가 계속 티저에 나오던 그 멜로디잖아.”

“그니까.”

“아, 설마. 그래서 제목이 카운트다운인가?”

“‘카운트다운’하고 ‘레디’에서는 이제 시작인 느낌?”

“뭐가 됐든 빨리 타이틀곡도 보고 싶다.”

“그니까. 승빈이 저기서도 피겨 할 건가 본데.”

선공개곡에 뮤직비디오를 준다는 것 자체로도 놀라웠는데, 타이틀곡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영상과 노래 퀄리티에 다들 흥분한 것 같았다.

-미친..... 이게 지금 타이틀이 아니라고??

-장난하나 당장 타이틀로 활동하라고ㅠ

-아니 이게 자작곡이라는 게 실화냐곸ㅋㅋㅋㅋㅋㅋㅋㅋ

-크리드 진심 뭐하는 그룹임??

-ㄹㅇ..... 진짜 얘네 뭐하는 그룹임???

-코어 진짜 크리드에 진심인 듯

-ㅇㅇ 진심 코어 외동아들이라고 아주 몰빵이네 몰빵이야

-이거 그냥 머글들 보여주면 독립영화인 줄 알 듯

-하다하다 선공개곡이라는게 아까워질 일이냐고ㅋㅋㅋㅋㅋ

“근데 안무가 없는 곡인가?”

“그러게. 안무 신은 하나도 안 나오는데.”

“서브 곡으로 활동하는 거면 안무가 없지는 않을 텐데.”

“하, 뮤비까지 던져 줬는데도 아직 배고프다면?”

뮤직비디오가 방금 막 공개되었음에도 미친 듯이 늘어나는 조회 수가 크리드의 화제성을 대변하고 있었다.

* * *

피겨 예능 촬영에 컴백 준비까지 정신없는 스케줄의 연속이었다. 컴백 일정에 맞춰 순차적으로 공개될 콘텐츠 촬영에 이어 오늘은 가장 큰 스케줄 중 하나인 공중파 예능 촬영 날이었다.

“내가 살다 살다 ‘떠나볼까?’에 출연하게 될 줄이야.”

“맞아. 그것도 우리가 완전체로 나올 줄은 몰랐음.”

오늘 촬영하는 ‘떠나볼까?’는 토요일 밤을 책임지는 장수 예능으로, 힐링 예능으로 유명한 프로그램이었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게스트와 직접 식사를 준비하는데,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잔잔한 매력으로 마니아층을 보유한 예능이었다.

“이거 나간다고 하니까 우리 엄마가 엄청 좋아하시더라.”

“맞아. 우리 아빠도 이게 최애 프로그램이셨는데-”

오늘 우리가 향하는 곳은 남양주 쪽에 위치한 캠핑장이었다. 인근에 계곡이 위치해서 캠핑족들에게는 이미 유명한 캠핑 명소라는 설명 정도만 들었는데, 도착해서 보니 상상 그 이상의 황홀한 풍경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게다가 촬영을 위해 아예 장소를 대여한 건지, 촬영 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점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미쳤다. 오늘 여기서 촬영을 한다고?”

“지금 들리는 거 진짜 새소리인 거죠?”

“저기 계곡도 있어!”

“와, 생각보다 훨씬 큰데? 수영도 가능할 듯.”

“대박이다, 진짜.”

몇 주간 연습실과 숙소를 전전하는 스케줄의 연속이다가 오랜만에 야외로 나오니, 다들 신난 게 눈에 보였다. 물론 그럴 만한 풍경이었지만 말이다. 신나서 캠핑장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멤버들을 겨우 진정시킨 건 프로그램 주인의 등장이었다.

“안녕하세요, 크리드 여러분.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오랜만에 인사드리겠습니다. 본투샤인, 크리드입니다!”

우리가 이 프로그램을 더 기대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떠나볼까’의 호스트는 바로 아이돌쇼의 MC였던 김성진이었다. 아이돌쇼 촬영 때도 잘 챙겨 주셨던 분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라니. 촬영은 시작도 안 했지만 다들 잔뜩 기대 중이었다.

“내가 그때 크리드 여러분들이랑 촬영한 게 인상적이라 우리 피디한테 추천했어요.”

“감사합니다!”

“근데 마침 이번에 컴백한다며? 일정이 잘 맞아서 다행이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어쩐지 보통 아이돌 게스트가 나오더라도 일부 멤버만 나오고는 했는데, 이렇게 완전체로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MC분이 직접 우리를 추천했다는 얘기가 그 어떤 말보다도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우리 프로그램은 본 적 있죠?”

“네, 물론입니다! 저희 부모님이 제일 좋아하셔서 진짜 매주 챙겨 봤어요.”

촬영은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다들 난생처음 해 보는지라 처음에 텐트를 치는 과정에서 조금 난관이 있었지만, 요리는 그래도 자신 있었으니까. 일차로 점심을 간단히 만들어 먹은 후 이어진 홍보 시간. 아직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타이틀인 ‘Ready!’를 어쿠스틱으로 편곡한 버전과 선공개곡 ‘Countdown’을 준비했다.

“와, 역시 이 친구들 실력파라니까?”

“감사합니다!”

“내가 승빈 씨 시크릿싱어 나온 것도 몇 번을 돌려 본 지 몰라.”

“영광입니다, 선배님!”

“진짜 요즘 친구들은 힘들겠어. 잘생겼는데 실력까지 좋아야 하니까-”

이후로도 촬영은 예상한 대로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캠핑장 마스코트인 진돗개 멍돌이와도 뛰어놀고 계곡에서 물장구도 치고, 몇 시간째 촬영 중이었지만 촬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때 캠핑장 한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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