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보통의 선우 형이었다면 이미 특유의 눈과 입 둘 중 하나만 웃는 표정과 곱씹어야 기분 나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졌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니 내가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일부러 자연스럽게 형의 옆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내 등장이 갑작스러웠는지 방금 전까지도 열심히 입을 놀리던 선샤인 멤버들이 조용해졌다.
“저희 초면이죠?”
“아, 네.”
“실제로 보니까 더… 아기자기하시네요.”
X만 하다는 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한참 고민했다. 눈앞에서 보니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목 아프게 올려다봐야 하는 선샤인 멤버들이 애잔할 정도였다.
“형, 소개 좀 해 주세요. 같은 소속사분들이신 거 같은데-”
“아… 여긴 선샤인이라고, 나랑 같이 연습했던 동생들이야.”
“다들 정말 귀여우시네요.”
“감사합니다. 그런 말 자주 들어요!”
“그러게요. 저는 다들 저보다 동생분들인 줄 알았어요. 다들 잠도 안 자고 열심히 연습하셨나 보다.”
“뭐라고요?”
“우리 선우 형만 연습 열심히 안 했었구나! 형 혼자 키 크겠다고 잠잔 거야? 너무했네.”
“듣자 듣자 하니 지금 뭐라고 하시는-”
“만나서 반가웠어요. 근데 아시겠지만 저희가 좀 바빠서 형 좀 데려갈게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멍 때리는 선우 형을 끌다시피 데리고 나왔다.
“형, 정신 좀 차려 보시죠?”
“…….”
“형은 진짜 투마월 나오길 잘했다. 하마터면 쟤네랑 데뷔할 뻔한 거잖아?”
“내가 잘린 거야.”
“…뭐라고?”
왜 기죽어 있나 했더니 형 입에서 정말 상상을 뛰어넘는 소리가 나왔다.
“형이 안 하겠다고 한 게 아니라 잘렸다고?”
“어.”
“착각한 거 아님? 그게 가능해?”
“그러게 말이다.”
듣자 하니 진짜 가관인 소속사였다. 선우 형네 소속사는 애초에 귀여운 콘셉의 남자 아이돌 그룹을 론칭하려고 준비 중이었고, 연습생도 그 콘셉에 맞춰서만 뽑았다고 했다. 어린 선우 형이 오디션을 봤을 때는 변성기 전이기도 했고 키도 큰 편이 아니라, 그룹 자체가 형을 위주로 구성된 거다. 그러다 변성기를 겪으면서 형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변하더니 지금의 동굴 목소리가 되었고, 급작스럽게 키도 쑥 크면서 혼자 동떨어지기 시작한 거다.
“그때부터 완전 방치였지, 뭐.”
“아니, 진짜 형네 소속사 바보 아냐?”
선우 형이 혼자 데뷔해도 아까 본 걔네보다 잘될 거라는 걸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저기 지나가는 멍멍이마저 알 거 같은데, 형네 소속사만 모르는 게 신기함을 넘어 어이가 없었다.
“암튼 그래서 팀명도 내 이름에서 따서 ‘선샤인’으로 지어 놨던 건데, 정작 나만 빠진 거야.”
“미친. 어쩐지 이름 들었을 때도 형이 생각나긴 했는데, 그게 진짜였다니.”
“물론 나도 지금 크리드로 데뷔한 게 훨씬 좋은데 괜히 쟤네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왜 형이 어렸을 때부터 연습생을 하면서도 다양한 알바를 했는지가 이제야 이해됐다. 많이 불안했겠구나. 그 뒤에 이어진 얘기들은 더 가관이었다. 데뷔조에서는 뺐으면서도 형이 아까웠는지 다른 소속사에서 영입 제안이 오는 것도 쳐 내고, 형이 지쳐서 소속사를 나가겠다고 할 때도 위약금을 운운하면서 협박했다고 했다. 그나마 그때 투마월 시즌 2 지원을 받으면서 소속사에서 차라리 여기나 나가 보라고 한 게 형의 인생을 바꾼 거다.
‘앞으로도 시끄럽겠군.’
회귀 전 투샤인의 말로를 생각해 보면 제일 조심해야 하는 소속사가 분명했다. 개인 활동을 둘러싸고 제일 시끄러웠던 곳이 선우 형네 소속사였는데, 이런 얘기를 듣고 나니 지금은 아직까지 조용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 * *
[CR:ID ‘Ready’ Teaser – EDEN]
“헐, 야 티저 뜸!”
“월요일부터 코어 열일하네?”
“미친. 근데 이번에는 우리 재봉이, 아니 이든이가 처음이야.”
예고 없이 갑자기 뜬 티저에 놀란 레빗드림과 덕질메이트 B는 저녁으로 준비한 고기를 굽다 말고 집게를 던질 뻔했다.
“지금 약간 그 느낌이다. 너는 무슨 티저를 고기 굽다 보게 하니-”
“아, 인터넷 좀 그만하시라고요.”
“누가 할 소리-”
급하게 불을 끄고 각자 짹짹이를 켜기 시작한 그녀들이었다. 머지않아 컴백을 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대대적인 홍보 프로모션을 했던 데뷔 앨범에 비해서는 갑작스러운 티저 공개라 다들 놀란 기색이었다.
“근데 지난번에는 도현이가 첫 번째였나?”
“어, 이번에는 또 무슨 순서인 거지?”
“진짜 이렇게 티저 순서 예상 안 되는 그룹은 또 처음임.”
“근데 오히려 좋아. 나이순은 너무 식상했음.”
“왜, 너 전에 덕질하던 판에서는 유교 그룹이라면서 좋아했잖아.”
“그건 그때 우리 애가 첫째라 제일 먼저 나오니까 좋았지. 지금은 막내잖아.”
“어휴, 모든 사고가 최애 중심이지 너는?”
“와, 지는 아닌 것처럼 구시네.”
“승빈이는 언제 나오려나.”
“처음 나오는 목소리는 승빈이 같은데?”
“맞아. 승빈이 목소리 겁나 청량 그 자체.”
“재봉이 흑발 한 거 봐. 찰랑거리는 거 개귀여워.”
자연스럽게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그녀들이었다. 각자 자기 할 말만 하는데도 대화가 이어지는 게 신기했지만, 이 정도는 그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근데 마지막에 배턴 건네받는 게 다음 주자인 건가?”
“헐, 맞네. 저거 누구 손이지?”
공개된 티저는 ‘Ready Set Go-’라는 청량한 멜로디와 함께 배턴을 들고 달리는 박재봉의 풀 숏으로 시작됐다. 점차 클로즈업되기 시작하는 카메라는 박재봉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잡다가 초점이 얼굴로 바뀌었다. 타이트한 숏으로 얼굴을 잡더니 다음으로는 손에 들고 있는 배턴으로 옮겨 가고 그걸 다음 멤버에게 넘겨주면서 영상이 끝났다. 그리고 화면에 떠오르는 문구 “Are You READY?”. 물방울 모양의 글씨체가 보기만 해도 시원한 느낌이었다.
“승빈이는 아니야.”
“오, 그러다 승빈이면 어떡하려고?”
“그럼 내가 성을 간다. 진심 누군지는 몰라도 문승빈은 아님.”
“자신감 미쳤네. 근데 나도 승빈이는 아닌 거 같음.”
“뭔가 도현이나 윤빈이도 아닌 거 같고 유현이 아니면 선우?”
“하긴. 둘 다 손이 예뻐서 비슷해 보이긴 한다.”
“근데 나 벌써 노래 기대되는데?”
“야, 나도. 한 소절 나왔는데 벌써 명곡이다.”
“우리 승빈이 그새 또 노래가 는 거냐고. 완전 명창 강쥐야.”
다른 팬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ㅁㅊ 지금 티저 뜬 거임??
-크리드 찐으로 컴백이냐고ㅠㅠㅠㅠㅠㅠㅠ
-아니 근데 티저 색감 무슨 일이야......
┕진심ㅠㅠㅠ 아름답다고ㅠㅠㅠ 역시 자연광과 미남의 조합 최고다....
-근데 이번에는 재봉이가 처음이네???
┕그러게? 또 무슨 순서인 거지??
-지난번에는 애들 등번호 순서 아니었나?
┕ㅇㅇ 맞음. 그래서 도현이가 젤 처음이었음.
┕근데 이번에도 재봉이 옷 뒤에 등번호 써있긴 함ㅇㅇ
-아 운동복 진짜 너무 좋다ㅠㅠㅠㅠㅠㅠㅠ
-신인 때 이런 컨셉 많이 해줬으면ㅠㅠㅠㅠㅠ
무엇보다도 화제가 된 건 다음 티저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하는 점이었다.
-다음 타자 대체 누구인 거임??
-레알 손밖에 안 나와서 알아볼 수 있으려나?
-각멤버 프사들 좀 나와봐;; 일단 승빈이는 아님
┕도현이도 아닙니다.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가 봐도 도현이는 아님ㅇㅇ
-왜 도현이는 아니라는 거??
┕잡힌 손 피부색을 봐......
┕아....... 우리 쪼푸 아니구나...
-유현이 아닌가??
┕22 나도 유현이 한표
┕333
-선우에 올인합니다.
┕나도 이거 무조건 박선우임ㅇㅇ
┕저 손이 선우라고???
이거까지 노린지는 모르겠지만, 티저가 세로 영상으로 나온 터라 위튜브 쇼츠 알고리즘에 계속 등장했다. 레디 셋 고로 시작하는 청량한 영상 도입부가 사람들의 귀를 끌었고, 마지막에는 배턴을 넘겨받는 손으로만 끝나다 보니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게 뭐야???
-쟤는 왜 냅다 달리는 거지??
-이온음료 광고임??
┕운동복 광고 아님??
┕ㄴㄴ 이거 크리드 티저임
-겁나 못 뛰네;;
┕그니까ㅋㅋㅋㅋㅋㅋㅋ 열심히는 뛰는데 폼이 영-
-근데 마지막에 저 손은 누구인 거임?
┕그러게 바톤 넘겨받으면 다음 애가 또 뛰는 거?
-얘네 몇 명이길래??
┕7인조 아이돌 크리드입니다. 많관부~
-아이디어 좋다. 저렇게 한명씩 티저가 나온다는 거잖아.
┕ㅇㅇ 다음애가 누군지 괜히 궁금해짐
-영상이 이게 끝??
┕오늘 첫 멤버 공개된거라 내일 바톤받은 다른 멤 나올 듯ㅇㅇ
-와 이게 남돌 티저라고? 요즘 아이돌들은 티저도 신기하게 나오네
┕ㄹㅇ.... 우리 때는 걍 뮤비 일부 편집한게 끝이었는데
┕라떼는 티저라는 것도 없었음....
┕혹시 연세가....?
-근데 진짜 영상색감 너무 예쁘다ㅠㅠㅠㅠ
┕그니까ㅠㅠㅠㅠ 완전 청춘 그 자체ㅠㅠㅠㅠ
-하... 아이돌들은 이런게 제일 부러움
┕나도ㅇㅇ 돈보다도 자기 젊고 예쁜 시절이 이렇게 담긴다는 게ㅠㅠ
┕근데 이 영상은 진짜 자식한테도 보여주고 싶을 듯
* * *
“와, 진짜 기절하겠다.”
“저는 그냥 여기서 잘까 봐요.”
“나도. 숙소까지 못 가겠어.”
컴백이 얼마 안 남은 지금, 다들 막판 스퍼트를 내면서 연습하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데뷔 앨범에 비해 안무 자체의 난이도는 낮아졌지만, 이번에는 라이브에 더 중점을 둬서 무대를 준비 중이었다. 데뷔 앨범이 크리드의 정체성을 보여 주기 위해 힘을 줬다면, 이번 앨범은 조금 더 대중적으로 접근하고자 했으니까.
“아니, 문승빈만 멀쩡한 거 봐.”
“너 진짜 체력 무슨 일이야?”
“피겨 하면 체력이 좋아지는 건가?”
“그러기에는 승빈이 아직 한 번만 촬영했어요.”
“그건 또 그렇네.”
다른 타임 어택 미션 보상보다 별로인 게 아닌가 생각했던 과거의 문승빈은 멍청했다. 이보다 더 좋은 보상이 없었다. [체력 증진 200%]이 3회 주어졌을 때, 처음에는 이걸 언제 써야 하나 고민했다. 근데 다 쓸모없는 고민이었다. 사람이 죽을 거 같으니까 나도 모르게 보상실행 버튼을 누르게 되더라고.
본능에 따른 선택이지만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피겨 예능 촬영에서 하도 엉덩방아를 찧고 와서 연습을 하려니까 도저히 안 될 거 같아서 눌렀는데, 통증도 거의 사라지고 마치 게임 속 주인공의 HP가 차는 것처럼 상쾌한 상태가 됐다. 순식간에 차오르는 체력의 느낌은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한 경험이었다.
“그러니까 다들 운동도 좀 하고 그러세요.”
“형,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게 운동이 아니면 뭔데요.”
“맞아. 여기서 운동 더 하면 그냥 기절하는 거임.”
그건 또 맞는 소리였다. 차라리 춤을 더 빡세게 추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라이브 연습은 그 난이도가 엄청났다. 데뷔 앨범도 물론 라이브를 했지만, 이번에는 아예 AR의 비중을 낮춰서 생라이브 느낌을 내고자 했다. 데뷔 앨범과는 다른 분위기의 곡에 대중들과 팬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컴백 날이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