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정성스러운 이가리 메이크업에 페이스 페인팅으로 복숭아가 그려져 있었다. 단순히 물감으로 그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짝이들도 군데군데 붙여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헤어 역시 분홍색 브릿지를 넣어서 포인트를 줬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온몸에 복숭아색을 둘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헤메코를 보니 잠이 다 깼다. 여전히 약간의 민망함이 남아 있지만 역시 스타일리스트의 실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언젠가 화장품 광고 문구로 ‘세상에 같은 핑크는 없다.’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크게 공감하지 못했는데, 오늘 헤메코를 보면서 그 말이 옳았음을 인정했다.
다른 멤버들의 상태도 확인해 봤다. 대부분 나처럼 잠이 들어 있거나, 가수면 상태였다.
“이거 딸기 씨인 거예요?”
“역시 승빈이가 바로 알아보네-”
윤빈 형은 포도 콘셉답게 보라색 헤어스프레이를 사용했다. 우리 셋은 끝났지만, 재봉을 담당한 스타일리스트는 여전히 박재봉을 ‘인간 체리’로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우와, 진짜 체리가 된 기분이에요…….”
“오늘 재봉이로 역작을 남기겠어.”
“자, 이제 다음 세 명 오세요-”
지운이 형, 선우 형, 정유현의 순서가 왔고 꾸미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아,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냐?”
“형들도 저 하는 동안 보고 있었을 거잖아여-”
“자느라 아무것도 못 봤거든?”
“신나서 사진 찍던 사람이?”
“뭐야, 문승빈 너 안 자고 있었어?”
“스타일리스트님이 말해 주셔서 알았어요.”
“야, 근데 엄청 잘 찍었다? 보여 줄까?”
선우 형이 핸드폰을 불쑥 내밀었다. 갤러리에는 눈을 감고 메이크업을 받는 우리 네 명과, 소파에 널브러져서 졸고 있는 멤버들로 가득했다.
“형도 하나 찍어 줄게요.”
똑같이 당해 보라는 마음으로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얼굴 밑에 꽃받침까지 하는 신기한 형이다.
“형은 뭔가 좋아하는 거 같네요?”
“나 딸기 완전 좋아하는데, 딸기 그 자체가 된 거 같아서 신나는데?”
그런데 메이크업을 보면 신이 날 만하다. 선우 형은 딸기 콘셉에 맞게 블러셔가 포인트였고, 볼과 코를 이어서 주근깨가 그려져 있었다. 타고난 키라키라 아이돌 얼굴에 저렇게 대놓고 화려한 메이크업까지 하니 비주얼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 투닥거리며 대화하는 사이 옆쪽에서 탄성이 들렸다.
“지운아! 누나가 너 귀엽게 만들어 준다고 했지?”
“귀엽다-”
“머리 잘 어울리네!”
예상한 대로 사과 머리는 피할 수 없었다. 지운이 형은 박재봉이 묶어 줄 때처럼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려고 했지만, 메이크업 때문에 그조차도 어려웠다. 지운이 형이 움직일 때마다 사과 모양 머리 끈 장식이 흔들렸다.
“와, 커버력 엄청 좋은 거 썼나 보네? 지운이 목만 빨개 지금.”
“나 지금 너무 뿌듯하다, 지운아.”
“입사하고 한 메이크업 중에 제일 만족스러워 보인다, 야.”
“사진 하나 남겨야 하는 거 아니야?”
“제가 찍어 줄게요!”
“너는 머리 받아야 해, 선우야.”
결국 내가 사진을 찍게 됐다. 역시 잘생긴 얼굴이라서 그런지 위화감은 없었다. 다만 그때와 똑같은 문제점이 있었다.
“형, 눈에 힘 좀 풀어 봐요.”
“…응.”
안 그래도 무쌍에 가깝고 길게 뻗은 눈이라서 순해 보이기가 쉽지 않은데, 부끄러워서 그런지 눈에 힘이 더 들어갔다.
형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 듯 시무룩해하는 표정을 지었고, 순간 포착에 성공했다. 오히려 눈꼬리가 내려가서 그나마 온순해 보였다.
“와, 착하게 나왔네, 지운아!”
“착, 착하게요?”
“아니, 아니 지운이 착한 거 당연히 알지~ 너만큼 착한 애가 또 어디 있어?”
스타일리스트의 눈물 나는 해명이었다. 그사이 뮤직 쇼 작가가 대기실을 찾아왔다.
“오늘 인터뷰 대본이에요. 특히 유현 군은 따로 멘트 따 둔 거 있으니까 확인하시고요.”
“네!”
대본을 확인해 보니 각자 맡은 과일에 대한 멘트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정유현의 멘트를 확인하고 멤버 모두 배를 쥐고 웃었다. 정유현은 귀까지 빨개지고 있었다.
“대박이다, 팬들이 엄청 좋아하겠는데?”
“유현이 형 멘트하다가 기절하는 거 아니야?”
“형, 파이팅!”
정유현은 머리가 아파 오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준비가 모두 끝나고 마지막으로 라이브와 안무 동선을 체크했다. 그러던 중 노크 소리가 들렸고, 포커스가 들어왔다.
“엄청 상큼하시네요?”
김병대가 입가를 씰룩이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오재성이 김병대를 저지하며 인사했다.
“병대야, 인사가 먼저지.”
다른 사람이 한 말이었으면 귓등으로도 안 들었을 놈인데, 웬일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아씨, 또 이러네.’
신기함도 잠시, 갑작스러운 두통에 머리가 아파 왔다. 이상하게도 오재성을 마주할 때마다 경험해 본 적 없는 통증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지금까지는 우연의 일치인가 했지만, 오늘로써 확신이 들었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페이 어텐션! 안녕하세요, 포커스입니다!”
‘설마 오재성이 리더야?’
이 세계 오재성은 정말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된다. 티벡스 시절 오재성은 절대 먼저 무언가를 도맡는 인간이 아니었다. 최대한 자신의 손에 피 묻히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팀을 이끄는 리더라니.
‘티벡스는 저런 애를 그렇게 만들 정도로 노답이었구나…….’
포커스의 등장에 대기실 공기 자체가 달라졌다. 다들 형식적인 대화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묘한 신경전이 느껴졌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희도 크리드 선배님처럼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저희 부족해도 많이 응원해 주세요!”
포커스의 다른 멤버의 말에 작은 목소리가 딸려 왔다. 언뜻 들린 바로는 ‘부족한 건 아니지?’였다. 그런데 주변이 소란스러워서 확실히 듣지 못했다.
‘김병대인가?’
“여기 저희 데뷔 앨범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오재성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앨범을 내밀었다.
‘너도 참 고생이다, 이번 생에는 김병대랑 같은 팀이라니.’
괜히 갖고 있던 경계심을 조금 풀고 오재성이 내민 앨범을 받았다. 포커스가 떠나고 강도현이 말했다.
“병대 저 녀석, 투마월 끝나고 정신 차린 줄 알았는데 다시 기고만장해졌네.”
“그래도 오재성? 걔 말에는 꼼짝 못 하는 거 같은데.”
“리더라더니 초반에 기강을 잘 잡아 놨나 보네.”
다들 오재성에 대한 칭찬을 하는 동안 지운이 형만 묵묵부답이었다. 뭔가 말하려는 눈치였지만 인터뷰 녹화가 시작된다는 스태프의 말 때문에 확인할 수 없었다.
* * *
“아, 미친. 애들 헤메코 미쳤나 봐.”
문스트럭은 크리드가 뮤직 쇼 500회 스페셜 무대를 준비한다는 공지를 보자마자 곧장 뮤직쇼로 채널을 돌렸다. 그리고 마주한 승빈의 비주얼에 이마를 치며 감탄했다.
“저게 인간이야, 복숭아야?”
-ㅁㅊㅁㅊㅁㅊㅁㅊ
-승빈이 이가리메이크업… 다 이뤘다
-페이스페인팅 개이쁘다
└승빈아 스티커 정보좀
└ㄴㄴ직접 그린거일듯ㅋㅋㅋ크리드 헤메코쌤들 방향으로 절할거임
“저는 달달한 목소리로 여러분들에게 달콤함을 선물하는 복숭아가 되어 보았습니다!”
“미친 거 아니야? 이거 그냥 승프들 다 죽으라고 복숭아 시킨 거 아니냐고!”
-과일 자기들이 고른걸까?
-ㅇㅇ인터뷰 앞에 크리드가 직접 고른거라고 했어
└얼굴보느라 그런말 듣지도못함ㅋㅋㅋㅋㅋㅋㅋ
-복숭아를 선택했다니 천재아님?
-숨참고 복숭아다이브
-오늘부터 사전에 복숭아 치면 문승빈나와야함
└마트 과일코너 가서 문승빈 달라고할거임ㅇㅇ
댓글 반응을 보고 승빈이 스스로 고른 것을 알아챈 문스트럭은 오늘도 자신이 최애 하나 기깔나게 잡았다며 스스로 칭찬했다.
마지막으로 정유현의 차례가 왔다. 앞선 멤버들이 소개할 때도 묘하게 눈치를 보는 느낌이었는데 자신의 차례가 되자 정유현답지 않게 긴장한 것이 눈에 보였다.
“저는 살구가 되어 보았습니다. 클로버 나랑 살, 살구 싶어?”
“응? 내가 잘못 들었나?”
-?
-지금 뭐라고 한거임?
-우리애가지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이 극악무도한 놈들아
게시판 반응은 초토화가 되었고, 크리드 멤버를 포함한 엠시들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정유현은 체념한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래도 잘생겼네…….”
정유현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정말 희귀하기 때문에 클로버판은 거의 뭐 축제 분위기였다. 뒤이어 무대가 시작됐고, 사탕 소품과 상큼한 무대에 문스트럭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네 입술에 살며시 키스 유
풍선처럼 부풀은 내 마음!
복숭아처럼 빨개진 내 볼]
‘복숭아처럼 빨개진 내 볼’ 가사에 맞춰 볼 하트를 하는 승빈을 보며 문스트럭은 뭐라도 부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개사도 했어? 미친놈아…….”
-원래 사과처럼 빨개진 인데 복숭아로 바꾼건가봐ㅠㅠㅠㅠ
-투마월 조랭이다ㅠㅠㅠㅠ
[내 입술에 살며시 키스 미
팝콘처럼 터지는 내 마음
사과처럼 빨개진 내 볼]
2절 후렴은 사과를 맡은 차지운 파트였다. 가사에 맞춰서 수줍게 양손으로 볼 하트를 하는데, 처음으로 차지운이 순해 보였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귀여운 콘셉에 전화 너머 K의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사과… X발 지금 사과 머리를…….”
“문장 구사가 아예 안 되시는데요?”
“사과 머리하고 사과처럼 빨개진 내 볼 파트는 반칙 아니냐? 진짜 말이 안 나옴. 코어 놈들아, 정정당당하게 돈 벌어라.”
-사과머리 딸랑거려ㅠㅠㅠㅠㅠㅠㅠㅠ
-붕방여우야ㅠㅠㅠㅠ
-차지운 이런이미지였음? ㅈㄴ무서운줄;;
└우리 애 생긴것과 달리 순둥이라고요ㅠㅠ
[떨리는 네 입술에 키스유!]
손 키스를 날리며 무대가 끝났고, 문스트럭은 곧장 편집 프로그램으로 짤을 만들었다. 타임라인에는 이미 몇 번이고 글이 밀릴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모두 자신의 아이디 옆에 각 멤버들이 맡았던 과일 이모티콘을 붙이는 게 유행처럼 진행되고 있었다. 문스트럭 역시 강아지 이모티콘 옆에 복숭아 이모티콘을 붙였다.
* * *
방송을 마치고 팬들의 반응을 확인하는데, 예상보다 더 뜨거운 반응이었다. 준비했던 시간들이 아깝지 않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민망해하던 지운이 형도 팬들의 반응을 보고 나서는 자신감을 되찾은 듯 셀카를 찍고 있었다. 그러고는 찍은 사진들을 보여 주며 물었다.
“어때? 뭐가 제일 착하게 나왔어?”
“형 착하게 생겼어요- 다만 눈이 조금 강, 강렬한 거지!”
‘어쩌다 저 여린 영혼에 저런 비주얼을…….’
“클로버들이 엄청 좋아하는 거 같지?”
“맞아요. 특히 유현이 형 멘트 때문에 난리던데… 악!”
정유현은 인터뷰의 악몽이 떠오르는 듯 강도현의 어깨를 힘주어 주물렀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싶었고, 주변을 둘러보니 선우 형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싶어 찾아가 보니 복도에서 선우 형이 보였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던 찰나, 선우 형 앞에 보이 그룹 ‘선샤인’이 있었다. 선우 형의 소속사에서 나온 그룹으로 평균 연령이 낮은 그룹으로 유명했다. 소속사 사장의 취향인 건지 모르겠으나 덜 자란 소년 콘셉을 고수하는 그룹이고, 선우 형 앞에 서니 고등학생과 초등학생을 보는 듯했다. 근데 선우 형 성격에 군기를 잡으려는 건 아닐 테고.
“형, 이러면 자기가 귀여운 줄 아나 봐?”
“그러게? 그때 이렇게 해 놨으면 데뷔했으려나?”
“에이~ 선우 형 목소리로?”
‘이게 뭐지?’
상황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더 낯설었던 것은 저 같잖은 말에 아무런 반박을 못 하는 선우 형의 뒷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