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164화 (164/346)

164화

“푸… 풋사과요?”

사실 지운이 형과 우리가 사과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지운이 형의 근심을 더한 것은 바로 스타일리스트 누나 손에서 달랑이고 있는 사과 모양 머리끈이었다. 그런 우리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볍게 인사하고는 바로 다시 떠났다. 오로지 풋사과 한마디를 전달해 주기 위해 달려오신 게 분명했다.

‘사과 머리구나.’

저 머리 끈과 ‘사과’라는 말을 듣고 사과 머리를 떠올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운이 형도 같은 생각인지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지만, 입가가 불규칙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와, 와우-”

윤빈 형이 분위기를 풀어 보기 위해 과장되게 반응했지만, 여전히 조용했다. 그때 재봉이가 지운이 형에게 다가가 물었다.

“형, 머리 좀 만져도 돼요?”

“응?”

뜬금없는 부탁이지만 지운이 형은 별다른 거부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봉은 한참 지운이 형의 머리를 만져 보다가 가운데로 머리를 모아 잡았다. 그리고 어디서 가져온 건지 얇은 고무줄로 사과 머리를 만들었다.

“뭐야, 괜찮은데요?”

재봉의 말대로 생각했던 것보다는 이질감이 없었다. 지운이 형이 센 인상이긴 하나, 기본적으로 잘생김이 베이스이기 때문이었다. 잘생김은 다른 모든 걸 뛰어넘는 절대적인 가치니까. 다만 눈에 힘만 조금 푼다면 더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거울을 보자마자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목까지 빨개진 모습에 강도현이 말했다.

“형 사과 하기 잘했네- 지금 완전 인간 사과인데?”

“그러게. 풋사과 말고 그냥 사과해야겠다.”

지운이 형이 황급하게 끈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박재봉이 자신이 얼마나 공들여 묶은 건데 이렇게 풀어 버릴 거냐며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동정심을 유발하자 이도 저도 못 한 채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사과 머리를 유심히 보던 선우 형이 박재봉에게 물었다.

“근데 너, 왜 이렇게 머리를 잘 묶냐?”

“저 어렸을 때 하도 많이 하고 다녀서 이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죠.”

“맞아. 재봉이 어렸을 때 사진 보면…….”

“너무 깜찍하죠?”

뻔뻔한 재봉의 태도에 절로 눈이 가늘게 떠졌다. 하지만 이내 안심했다. 그만큼 트라우마에서 많이 벗어나게 되었다는 반증일 테니까.

“근데 약간 두렵긴 해. 스타일리스트분들 눈 봤어?”

“우리 데뷔 콘셉 의상 가져오실 때보다 더 빛나시던데?”

“내가 딸기라니…….”

나 역시 안심할 과일이 아니었다. 특히 아이돌 팬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쓰는 과일 모에화 중 하나가 복숭아였으니 볼 터치와 머리핀 정도는 각오하고 있는 중이었다.

헤메스 팀이 한바탕 휩쓸고 간 후 안무 연습을 마저 마치고 윤빈 형의 작업실로 향했다. 장비를 세팅한 형은 각 멤버의 의견을 물어보더니, 실시간으로 편곡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허허실실하고 약간은 허당인 모습만 보다가 편곡 작업에 집중하는 모습이 다른 멤버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듯했다. 나 역시 사운드 클라우드 녹음을 위해 한번 봤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모습이었다.

“나, 윤빈이 형이 저렇게 집중하는 거 처음 봐.”

“취미로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이건 완전 전문가 수준이잖아?”

“형, 왜 작곡 취미라고 했어요?”

“그니까. 완전 겸손도 이런 겸손이 없었네!”

형은 주변에서 무슨 말이 들려도 편곡 작업에만 몰두했다. 그러다 잠깐 작업이 막혔는지 고민에 잠긴 얼굴이었다.

“형, 뭔가 막히는 거 있어요?”

“막히는 거?”

영어로 설명을 하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응. 원곡의 느낌은 가지지만 너무 똑같은 건 싫어서. 어떤 사운드를 넣어야 좋을까?”

형의 말을 듣고 노래와 과일 콘셉을 모두 충족시킬 장르가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머리 위로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노래와 콘셉 모두 상큼하고 청량한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그러니 여름이 연상되는 트로피컬 장르가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로피컬 사운드는 어때요?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이 과일 콘셉하고도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우와! 좋은데? 왜 트로피컬을 생각 못 했지?”

영감이 떠올랐는지 윤빈 형이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여러 사운드들을 추가하면서 전체적인 사운드가 점점 풍성해지고 있었다. 그사이 다른 멤버들은 가사를 숙지하거나, 안무를 맞췄다. 박재봉은 12시에 가까운 시간에 잠이 몰려오는 듯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빈 형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끝났다-”

“벌써요?”

“먼저 MR만 들어 볼래? 원래 노래에서 비피엠은 그대로 뒀고, 중간에 랩 파트만 살짝 더 빠르게 했어. 그리고 승빈이가 추천한 대로 트로피컬 사운드를 추가했어. 여름 느낌 나게.”

윤빈 형의 말대로 원곡보다 더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비록 초가을이지만 날은 여전히 무더웠기 때문에 청량함을 줄 수 있고, 지나간 여름을 추억하게 하는 데에도 효과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좋은데요?”

“완전 여름 느낌 나고 신나요!”

“그럼 내일 바로 녹음 들어가면 되겠다. 회사 프로듀싱 팀에 보낼게.”

“좋아요.”

일곱이 함께 숙소로 향했다. 습격 사건 이후 되도록이면 일곱 명이서 함께 퇴근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매니저 형이 아예 숙소에 들어오게 되면서 안전상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윤빈 형, 오늘 진짜 수고 많았어요.”

“아니야. 기다려 줘서 고마워. 그리고 승빈이가 아이디어 줘서 빨리 끝낼 수 있었어. 고마워!”

“에이, 저는 그냥 형이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거죠.”

“밥상?”

“밥 놓는 테이블.”

“아~ 근데 스푼은 너무 작지 않아? 승빈이가 준 아이디어 엄청 커.”

“그럼 고기 반찬 정도?”

“응, 그 정도는 되지~”

“근데 이번 녹화 때 포커스랑… 마주치겠죠?”

선우 형의 말에 다들 말이 없어졌다. 생각해 보니 딱 포커스가 데뷔하는 주의 방송이었다. 분명 껄끄러운 만남일 것이다. 하필이면 트레일러 논란이 있고 난 후여서 더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걱정하지 마.”

침묵을 깬 건 정유현이었다. 투마월 때도 느꼈지만, 정유현의 말은 언제나 무게가 있었다. 회귀 전 스물두 살의 나도 저렇게는 못 했을 거 같은데.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건지가 새삼 궁금해졌다. 뒤이어 선우 형도 주먹을 쥐고 말했다.

“맞아, 우리가 잘못했나? 이럴수록 우리가 당당한 모습을 보여 줘야지! 안 그래?”

“맞아요!”

“웬일로 형이 맞는 말을 하네?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도현아, 형은 언제나 맞는 말만 한단다. 내가 언제 틀린 말 한 적이 있었니?”

또 나왔다. 저 특유의 입과 눈 둘 중 하나는 웃지 않는 미소. 강도현도 위협을 감지했는지 지운이 형 뒤로 숨었다.

“맨날 싸워!”

“그니까~ 막내가 더 점잖아.”

내 말에 발끈한 둘이 다투다 말고 동시에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네!”

“지금도 봐. 둘이 똑~같이 말하잖아.”

둘은 머쓱해졌지만 지켜보는 우리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일부러 뒤에서 천천히 걸으며 그 모든 모습들을 눈에 담았다. 새벽 공기를 마주해도 이제 더는 짠내가 느껴지지 않는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하게만 느껴졌다.

* * *

이른 아침부터 커버곡 녹음 스케줄이 잡혔다. 다들 부스스한 상태로 평소보다 내추럴한 모습이었다. 맨얼굴이어서 마스크와 모자로 중무장을 했지만. 나는 아직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다들 잘 잤어요……?”

“응, 너는?”

“뭐야, 문승빈 녹음한다고 긴장되어서 잠 설친 거야? 설마?”

그새 놀리려고 시동을 거는 선우 형의 모습에 곧장 해명했다. 그게 더 이상했지만.

“악몽 꿔서 그래요.”

“악몽? 무슨 악몽?”

“멤버들이 갑자기 과일이 되질 않나, 근데 저도 잡히면 과일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멤버들을 바구니에 넣고 전력 질주하는 꿈이었어요…….”

말하고 나니 개꿈 중의 개꿈이었다. 멤버들의 입꼬리가 점점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참지 못한 지운이 형을 시작으로 녹음실 가는 차 속이 웃음으로 가득해졌다. 운전하던 매니저 형의 어깨도 작게 들썩이고 있었다.

“바구니가 너무 웃겨-”

“그래도 우리 안 버리고 간 게 어디야?”

“감동받아서 눈물이 다 나네, 승빈아.”

내가 생각해도 웃음이 나왔다. 그 와중에도 자아는 있어 가지고 개별적으로 도망치려는 과일이 되어 버린 멤버들을 필사적으로 바구니에 집어넣던 장면이 뇌리에 박혔다.

녹음실로 향하는 중에도 작게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엎지른 물이고, 덕분에 멤버들의 긴장감도 적어진 게 눈에 보였다.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윤빈 씨가 보내 준 파일 잘 받았어요. 저희가 뭐, 새로 손봐야 할 부분은 없는 거 같던데요? 실력 있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프로듀싱 팀의 칭찬에 우리 모두 뿌듯했다. 자체 제작이 아이돌 산업에서 하나의 키워드가 되어 버린 현재, 팀에서 프로듀싱을 할 수 있는 멤버가 있는 것만 한 축복은 없었다.

“그럼 승빈 군 메인 보컬 파트 먼저 볼까요?”

“네!”

상큼한 트로피컬 사운드가 들려오고 첫마디를 시작했다.

[매일 매일 하고 싶은 말

네가 너무 좋아 미치겠어

팝콘처럼 팝팝 튀어오르는 마음

네 입술에 살며시 키스 유]

평소에는 자주 사용하지 않았던 귀여움 자아에 손발이 오그라들고 있었지만, 성대에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방금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가사에 조금 더 강세 차이가 있으면 더 좋을 거 같아.”

전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곡인 만큼 대중들의 귀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프로듀싱 팀의 요청대로 강세에 집중하며 녹음했고, 곧바로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노래 스텟 자체가 높아지면서 스킬적인 면에서 이해도가 높아진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후 다른 멤버들의 녹음도 수월하게 종료되었다. 완성된 음원을 듣고 모두 감탄했다. 원곡의 느낌과 사람들이 향수를 느낄만한 요소들은 살려 두고, 트로피컬 사운드와 랩 파트로 신선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다른 멤버들도 기대보다 더 좋은 결과물 때문인지, 무대에 대한 의욕이 가득해 보였다.

* * *

드디어 500회 녹화 날이 되었고, 모두 분주하게 무대 준비를 시작했다. 리허설은 실수 없이 완벽하게 마쳤다. 현장 피디와 작가, 스태프들의 반응도 성공적이었다. 홀가분하게 무대를 내려왔지만, 곧 마주하게 되는 과일 콘셉에 모두 긴장했다.

“무슨 옷 가져오실까?”

“제발 무난해라…….”

“짜잔-”

대기실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휘황찬란한 옷들에 순간 정신이 어질해질 지경이었다.

“자자,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까 각자 담당 스타일리스트분한테 갈게요-”

모두들 비장하게 자리에 앉았다. 1시간 뒤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하지만 리허설이 끝나고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금세 잠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비몽사몽한 정신을 깨운 건 스타일리스트의 상기된 목소리였다.

“어떡하지? 승빈아, 너 너무 귀엽다!”

“…네?”

눈을 떠 보니 이런 생각만 들었다.

‘진짜 영혼을 갈아 넣으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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