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163화 (163/346)

163화

“커버 무대요?”

여느 때처럼 연습실에 모여 있던 일곱 명 모두 매니저 형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응, 뮤직쇼 500회 특집으로 특별 무대 하는 거야.”

“노래는 뭘로 해요?”

“다들 발렌타인 알지?”

“발렌타인의 ‘키스 유’ 할 거야.”

“…네?”

어리둥절함이 정적으로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발렌타인은 2세대 탑 여자 아이돌 그룹이었다. 우리가 초등학생일 때 화려한 전성기를 보낸 그룹으로, 특히 대표곡인 ‘키스 유’는 전국민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숱한 커버와 패러디를 만들어 낸 곡이었다.

단순하지만 귀에 콕 박히는 중독성 강한 멜로디와 따라 하기 쉬운 포인트 안무로 큰 인기를 얻었고, 걸 그룹 최초 음악 방송 10주 연속 1위를 달성했다. 그리고 마침내 데뷔한 지 2년 차였던 신인에 가까운 발렌타인을 단번에 대상 가수로 만든 곡이었다.

“씨넷 측에서 편곡도 요청을 했어. 윤빈이가 좀 도와줘야겠는데.”

“윤빈 형, 키스 유 노래 알아요?”

“응! 학교에 케이팝 동아리가 있었는데, 애들이 그 노래로 공연해서 알고 있었어. ‘네 입술에 살며시 키스 유’ 이거 맞지?”

“맞아요! 다행이다-”

하지만 정작 걱정할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근데 내가 이 노래하면 너무 안 어울리지 않을까?”

지운이 형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 이 노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세상 둘도 없을 상큼함이었다. 발렌타인 모든 멤버가 고등학생일 때 발매한 곡으로, 멤버별로 쨍한 원색의 의상을 입고 귀여운 안무로 가득한 게 포인트인 곡이었다.

머릿속으로 지운이 형이 상큼한 표정과 함께 귀여운 콘셉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선뜻 응원의 말을 보낼 수 없었다. 그동안 무대 위에서 강렬한 이미지를 많이 보여 준 형이었기 때문에 팬들에게도 생소한 경험이지 않을까 싶었다.

“괜찮아요, 형! 저도 하잖아요!”

윤빈 형은 뭐가 문제냐는 듯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하긴 윤빈 형의 사정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저 떡 벌어진 어깨와 피지컬로 앙증맞은 안무를 소화해야 하니까.

“아니, 근데 어쩌다가 우리한테 걸 그룹 커버를 맡기신 걸까?”

재봉이와 선우 형이 평균 이상으로 귀여운 얼굴이고, 나도 말랑한 쪽으로 초반에 밀고 갔으니 그렇다 치고, 강도현도 백번 양보해서 나름 어울린다고 치자. 하지만 정유현과 윤빈 형, 지운이 형을 생각하면 귀여운 곡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아무래도 씨넷에 우리 팬분이 있으신 거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이번 기회에 색다른 모습을 보고 싶으신 게 아닐까.

정유현도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평소 오그라드는 거나 방송에서 애교를 요청받을 때도 가장 준비 시간이 긴 멤버였다. 지난번 라디오에서 애교 한번 보여 달라는 요청을 받고, 세상 비장하게 심호흡을 하고 생수통을 거의 한 병 비우고 나서야 애교 미션을 성공했다. 그러면서도 절대 빼지 않는 건 신기할 정도였다.

“으아아아아! 진짜 이 목소리로 어떻게 귀여운 걸 하냐고오오-”

뚫고 내려가는 저음으로 선우 형이 과장되게 우는 소리를 냈다. 생각해 보니 이 형도 얼굴은 귀여움 담당이지만, 180이 넘는 키와 지하 암반수 저음 목소리를 생각하면- 심란할 만도 했다. 다들 절망스러운 듯 엎드려서 얼굴을 묻고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일단 편곡부터 고민해 보자. 다들 일어나-”

널브러져 있는 선우 형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외쳤다. 이미 정해진 스페셜 무대인 만큼, 제대로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맞아요! 그리고 형들도 잘~ 아주 자세히 살펴보면 다들 귀엽다니까요?”

“재봉이 넌 귀엽게 생겼으니까…….”

“형, 귀여움은 외모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에요.”

“응?”

지운이 형이 그게 무슨 말이냐며 고개를 갸웃하자 재봉이 말했다.

“형 팬들은 이미 형의 귀여운 순간을 나노 단위로 모아서 앓고 있을걸요?”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위튜브에 형 이름 딱 치면 나오는 팬튜브 영상들 한번 봐 봐요.”

“너 팬튜브도 다 찾아 봐?”

“그럼요! 가끔 팬분들이 만들어 준 영상 보면 저보다도 저를 더 자세하게 아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구요!”

박재봉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무보수로 오직 팬심만으로 영상을 제작하는 것은 보통 사랑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팬들은 아주 사소하고 전혀 매력 포인트가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한 것들에서도 매력을 발굴한다. 내가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행동을 했었나? 나조차도 가물가물한 기억을 팬들은 정말 선명하게 기억했다.

“애매하게 하면 더 우스워지는 거 알지? 대선배님의 노래니까 한번 제대로 해 보자.”

“각자 팬튜브 보면서 내면의 숨어 있는 귀여움을 찾아 보자고.”

“이것 봐 봐요. 팬들은 형이 밥 먹는 습관으로도 귀여움을 발견한다고요.”

당연히 지운이 형의 팬튜브를 보여 주는 줄 알았는데, 박재봉이 보여 준 것은 내가 주제인 영상이었다.

[승빈이의 사소하지만 귀여운 습관]

“왜 내 영상이야?”

[첫 번째, 왼쪽 오른쪽 공평하게 씹어먹기.]

“엥?”

“너 이렇게 먹어?”

“내가?”

영상을 보니 내가 어느 방향으로 몇 번 씹었는지 숫자가 카운트되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똑같거나 비슷한 횟수로 씹고 있었다. 오래된 습관인 건지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습관이었다.

-본격 이한테도 공평한 아이돌

-그냥 오물거리는건줄 알았는데 저런 비밀잌ㅋㅋㅋㅋㅋㅋㅋ

-04:24 여기 봤어?왼쪽으로 한번 더 씹으니까 오른쪽으로 두번씹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ㅁㅊ완전 매의 눈이네;;

└감사합니다…이런 모에포인트를 모르고죽을뻔했음

[두 번째, 당황하면 고장 나요!]

-도와줘크리드넼ㅋㅋㅋㅋ

-진심 고장나서 눈만 도르륵굴리는거 ㅈㄴ귀여워

└한입에넣고 굴려먹고싶음

└강아지코에 뽀뽀할거예요

-평소랑 갭차이 때문에 더 귀여워보임ㅋㅋㅋㅋㅋ

-10:37

└아앀ㅋㅋㅋㅋㅋㅋㅋ좌표만 남기고 가는거냐곸ㅋㅋㅋㅋㅋ

└더이상의설명은 거부한다는거지

자신감 없어 하던 지운이 형도 자신의 팬튜브를 하나하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연예인이 가진 행운 중 하나였다. 누군가가 대가 없는 애정만으로 시간과 정성을 다해 캐해를 해 주는 직업이 어디 있겠는가?

“자, 내면의 귀여움은 각자 끌어와 보고 편곡 방향부터 잡자.”

“맞다. 얘기가 산으로 갔네.”

“일단 원곡 무대들 좀 같이 보고 얘기해 보자.”

다들 둘러앉아 원곡 무대를 여러 개 이어 봤다. 원곡은 큐트 콘셉의 정석으로 빠른 템포에 통통 튀는 사운드가 가장 큰 특징이었다.

“템포는 적당한 거 같고, 중간에 랩 메이킹을 할까?”

“그래, 가사는 내일까지 가능하겠어?”

강도현과 선우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편곡 바뀌고, 랩도 추가하면 안무도 수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운이 형의 말에 모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래 안무는 기존의 것을 커버하려고 했는데, 안무 역시 자체적으로 만들어야 할 상황이 되어 버렸다.

“포인트 안무는 무조건 활용해야 하고, 동작을 조금 더 크게 해 보는 건 어떨까?”

“근데 안무는 짜려면 조금 시간 걸릴 거 같은데, 짜기 전에 콘셉 하나 제안해도 될까?”

“좋아, 어떤 건데?”

무대를 보면서 계속되는 원색의 향연에 떠오른 게 있었다.

“과일 어때?”

“과일?”

“무슨 과일?”

“선배님들 의상이 전부 쨍한 느낌이고, 무대도 통통 튀는 느낌이잖아. 근데 저 의상을 우리가 그대로 입지는 못할 거니까, 아예 멤버별로 원색의 과일을 콘셉으로 잡으면 어떨까 해서.”

“오, 괜찮은데?”

“의상도 과일 콘셉으로 준비해서 입고, 소품도 같이 활용하면 좀 덜 부담스럽게 귀여움과 상큼함을 보여 줄 수 있지 않을까?”

“전 좋아요!”

“그러면 안무 짜기도 훨씬 수월하겠다.”

“맞아. 과일을 소품으로 쓰거나, 아니면 각자 해당하는 과일 맛의 사탕을 준비해서 나눠 드려도 될 거 같고.”

“오, 나 그 얘기 들으니까 랩 가사 영감이 떠올랐어!”

원곡 무대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었는데, 다들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큰 틀의 콘셉이 정해지니 이후로는 다들 작업 속도가 빨라졌다.

아니, 그런데 과일 콘셉을 듣고 제일 좋아한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리스트, 줄여서 헤메스 팀이었다. 재밌겠다고 하시더니 이렇게 본격적으로 준비하실 줄이야. 스페셜 무대 의상 피팅을 하려는데 스케일이 거의 뭐, 데뷔 앨범 재킷 사진 급이었다. 저 휘황찬란한 아이템들을 차고 무대를 한다는 생각에 멤버 모두 목울대가 요동치고 있었다.

“누나, 이게 다 뭐예요?”

“너희가 언제 또 이런 상큼한 콘셉을 해 보겠니.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한번 준비해 봤다.”

스타일리스트로 10년 넘게 일하시면서 원래 걸 그룹 위주로 담당하셨다고는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형형색색의 액세서리와 소품이 가득했다. 남자 아이돌에게 거의 해 볼 일 없는 콘셉이라 그런지 다들 신나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내가 오늘 문승빈 인간 복숭아 만들어 준다.”

“저는 그럼 재봉이 체리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도현이가 오렌지였나?”

“지운이가 바나나? 에이, 지운아 자고로 과일을 하려면 더 상큼한 걸 해야지! 더 좋은 과일 고민해 볼게. 괜찮지?”

“네?”

지운이 형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뭐라 반박하려 하는 듯했지만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였어도 저 자신감과 열정에 가득한 스타일리스트의 눈을 보고 아무 말도 못 했을 거 같다.

“지운아, 내가 오늘 네 입에서 나는 귀여운 게 안 어울린다는 소리 다시는 못 나오게 해 줄게.”

결의에 가득 차 온갖 분장 도구와 액세서리를 들고 나가는 모습이 사뭇 두렵기까지 했다.

“누나, 제 과일은…….”

“이따가 보자, 애들아!”

지운이 형의 물음을 듣지 못한 스타일리스트 분들이 떠났고, 지운이 형은 허망하게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운이 형 지금 비련의 남주인공 같아요…….”

재봉의 귓속말을 듣고 나니 형이 뻗은 손이 더 애처로워 보여서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하긴 어떤 과일을 하는지 알기라도 했다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꼼짝없이 리허설 날이 되어야 과일 헤메코를 맞이하게 생겼다.

“아이템은 뭐가 좋을까?”

“아까 보니까 과일 사탕 있던데. 사탕으로 할 수 있는 안무를 넣어 볼까요?”

“오, 아이디어 좋다.”

“역시 승빈이가 센스 있네.”

원래는 팔만 사용하는 안무였는데 확실히 사탕을 들으니 포인트가 더 살아나 보였다.

“앞에 찌르고, 빙그르르! 하트 만들었다가, 가운데로 모여-”

지운이 형의 구령과 함께 안무를 맞췄다. 사탕 하나 들었을 뿐인데 멤버들도 더 재밌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원곡 영상을 보고 막막해하던 처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연습이 한창이던 때, 문을 열고 스타일리스트 누나가 들어왔다. 그리고 아주 해맑은 얼굴로 지운이 형이 경악할 소식을 전했다.

“지운아, 너는 풋사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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