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162화 (162/346)

162화

첫 촬영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아니, 수월할 줄만 알았다. 각자의 실력이 천차만별이다 보니 아이스링크장에서 이뤄지는 간단한 실력 테스트가 오늘의 촬영 내용이었으니까.

“그럼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들의 진짜 기본 실력을 알아볼 거예요. 다들 제가 절대 스케이트를 미리 배워 오지 말아 달라고 요청드린 거 기억하시죠?”

“네!”

피겨 기술도 아니고 기본 스케이팅 정도는 전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케이트장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넘어졌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이게 뭐지? 민망함에 곧장 일어나려고 했지만, 오히려 한 번 더 넘어지는 꼴이 되어 버렸다.

“어머, 승빈 씨, 괜찮아요?”

“아프겠다. 쿵 소리 난 거 봐.”

아픈 것도 아픈 건데 창피함이 훨씬 더 컸다. 저 수많은 카메라가 전부 순식간에 나를 향했다. 완벽하게 박제된 거다.

춤은 그래도 연습생 때도 이미 췄던 거라서 회귀 전 능력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소화를 할 수 있었는데, 운동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지금의 내 몸은 태어나서 스케이트를 한 번도 타 본 적 없는 몸이었다는 걸 간과한 거다.

근데 내가 스케이트에 익숙했던 회귀 전 모습을 생각하고 너무 자신감 있게 첫발을 내민 게 문제였던 거다.

그 이후로는 거의 뭐 문승빈 수난 시대의 시작이었다. 대부분의 출연진들이 다 피겨를 처음 경험해 보는 거긴 했지만, 내가 워낙 스타트를 임팩트 있게 끊어서인지 포커스가 나한테 맞춰져 있었다. 방송분에 어떻게 편집되어 나갈지가 대충 예상이 갈 정도였다.

“승빈 씨, 갓 태어난 기린 같은데요?”

“아니, 승빈 씨 피겨를 정말 좋아만 했구나.”

“제가 말씀드렸죠. 저 진짜 완전 처음 타 봐요.”

“내가 그래서 일부러 절대 연습하지 말고 오라고 했거든. 근데 기대 이상인데?”

“피디님, 진짜 너무해요!”

최 피디의 프로그램 특성상 피디의 방송 출연이 잦았다. 그래서인지 중간중간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데 최 피디 표정이 아주 그냥 하회탈 그 자체였다. 나를 캐스팅하면서 원하던 그림이 바로 이런 거였나 싶을 정도로 투명한 반응이었다.

“근데 승빈이는 그냥 링크장에 서 있기만 해도 이미 그림이 나오는데?”

“사실 발만 안 움직이고 그냥 서 있으면 피겨 선수 같아.”

“맞아, 그런데 한 발자국 떼기만 하면…….”

“다들 지금 칭찬 아니고 놀리는 거죠?”

“에이~ 잘생긴 게 최고라는 거지, 승빈 씨.”

민망함에 숨고 싶었지만, 더 움직이면 또 넘어지는 불상사를 초래할까 봐 그냥 온 신경을 가만히 서 있는데 쏟았다.

“자, 오늘은 여러분들이 함께 피겨 무대를 꾸밀 파트너 선수분을 선정할 겁니다. 단! 여러분들이 선택하는 게 아니고 선수분들이 선택을 할 겁니다. 그러니 오늘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 드려야겠죠?”

이미 대본에 나와 있는 내용이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괜히 걱정이 됐다. 시작부터 넘어지는 모습을 보여 줬으니… 하지만 촬영을 하는 동안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선택받을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미션은 ‘넘어지지 않고 링크장 완주하기’입니다! 이정훈 선수 설명 부탁드려요!”

“지금요?”

“네!”

“피디님으로 시범 보여 드려도 돼요?”

모두 이정훈 선수의 말에 놀란 듯했지만 최 피디의 행동에 더 놀랐다. 언제 스케이트화를 신은 건지 모르겠으나 꽤 능숙하게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오늘 배울 내용은 이렇게 항아리를 그리면서 나아가는 거예요.”

“나 피디가 저러는 거 처음 봐…….”

“괜히 운동 예능 일인자가 아니라니까?”

출연진들도 촬영 중인 걸 잊고 멍하니 최 피디가 시범을 보이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자, 이제 누가 해 볼래요?”

망설이던 출연진들도 더 이상 망설일 핑계가 없었다. 그래서 먼저 손을 들었다.

“오, 역시 막내가 패기 있네~”

나는 어설프게나마 선수와 피디가 보여 준 대로 다리를 바깥으로 벌렸다가 안으로 모으는, 말 그대로 항아리를 그리며 움직여 보았다. 두 번 정도 그리고 또 넘어졌다. 하지만 금방 일어나 몇 번 더 반복했고, 휘청거리는 걸 이정훈 선수가 잡아 줘서 넘어지는 건 면했다.

“잘하는걸요?”

“하지만 곧 넘어질 뻔했는걸요?”

“저도 처음 할 때는 엄청 넘어졌었어요.”

이정훈 선수의 말이 큰 힘이 됐다. 이정훈 선수의 설명에 맞춰서 다시 몇 걸음 내디뎠다. 다행히 몸이 가볍고 쉽게 체득하는 편이어서 연습할수록 금세 동작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촬영 막바지에는 딱 한 번 넘어지고 링크장을 왕복할 수 있었다. 다른 출연진보다는 더딘 속도였지만, 해냈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승선에 들어오자 이정훈 선수는 나만큼이나 기뻐했다.

“이제 선수분들의 선택의 시간입니다!”

선수들이 하나둘 출연진을 선정했고, 나는 이정훈 선수의 선택을 받았다. 왜 나를 뽑았냐는 질문에 이정훈 선수가 답했다.

“승빈 형 스케이트 타는 모습이 꼭 저 피겨 시작했을 때 같더라고요. 넘어지면서도 바로 일어나는 게 감동적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앞으로 더 많은 걸 알려 드리고 싶어서 뽑게 되었습니다!”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처음 해 본 운동에 온몸이 뻐근할 지경이었지만, 뭔가 뿌듯한 기분이었다. 앞으로의 촬영과 이정훈 선수와의 인연이 어떻게 진행될지 기대가 됐다.

* * *

[도와줘, 크리드! ep2. 2집 준비를 도와줘!]

(링크)

“도와줘 크리드 2화 올라왔다!”

“미친, 벌써 2집 준비라니.”

“하… 일하는 윤빈이 너무 자극적인데?”

수진과 수정이 오랜만에 함께 콘텐츠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에 취업한 언니 수정이 정신없이 바쁜 탓이 컸다.

“영상 재생한다?”

“잠깐만. 전자레인지 다 돌았다. 안주 가져올게.”

“오케이-”

영상을 플레이하자마자 보이는 건 1화와 같은 자체 제작 오프닝이었다.

“저건 다시 봐도 적응이 안 되네.”

“우리 애들도 사람이었다는 걸 저거 보고 깨달았잖아.”

“나 진짜 유현이가 처음으로 살아 있는 사람 같았어.”

“아니, 애를 왜 죽여요-”

“아니, 매사에 너무 완벽하니까 약간 실존 인물 맞나 싶은 느낌 있잖아, AI 같은.”

“인정~ 그래서 1화가 너무 귀여웠음.”

오프닝 후 가장 처음 등장한 멤버는 바로 윤빈이었다. 온갖 장비가 가득한 작업실 한가운데 앉아 고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처음 공개되는 윤빈의 작업실이었다.

“안녕하세요, 클로버 여러분. 윤빈입니다.”

피곤한 듯한 얼굴과 잠긴 목소리로 시작된 윤빈의 셀프 캠.

“미친, 윤빈이 목소리 잠긴 거 봐.”

“야, 화면에 시간 봐. 새벽 2시임.”

“지금 자기 다 컸다고 제때 잠 안 자는 거냐고, 우리 빈이 아직 애긴데.”

방금까지 윤빈의 색다른 모습을 앓던 수진이 시간을 보고 기함을 했다. 밥 못 먹는 거랑 잠 못 자는 거 두 개는 아무리 윤빈이라고 해도 용납할 수가 없었으니까.

“지금 거의 마무리 단계만 남았는데요, 기쁘게도 제 노래를 서브곡으로 보여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살짝만 들려 드려도 되려나? 이게 언제 나갈지를 잘 모르겠어서.”

-제발 들려줘ㅠㅠㅠㅠㅠㅠㅠ

-윤빈이 자작곡이라니ㅠㅠㅠㅠㅠ

-하,,,, 이 죄많은 남자.......

-윤빈이 능력치 무슨 일이야ㅠㅠㅠㅠ

-피곤해보이는데 그게 섹시해보이는 건 저뿐인가요...?

-ㅎ.... 나만 쓰레기인줄.......

실시간 라이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댓글 반응이 거의 라이브처럼 폭발했다.

“음, 안 되면 편집할 때 잘라 주겠죠? 이거 편집도 저희 멤버가 할 거거든요.”

-?????

-이번 화는 영상도 자체제작임???

-크리드 이정도면 취업사기 당한 거 아니냐며;;

└아 미친ㅋㅋㅋㅋㅋㅋㅋㅋ

└코어엔터 다니고 시키는 거 다 해요ㅇㅇ

-편집 너무 깔끔한데 누가 한 거지??

다들 의아해했지만 그것도 잠시, 바로 이어진 자막에 주인공이 등장했다.

[스포 요정 윤빈 형, 제가 대신 허락 받아 왔습니다. (승빈: 18세, 1일 편집자)]

-미친 이거 승빈이가 편집한 거야??

-자막 개귀여워ㅠㅠㅠㅠㅠㅠ

-승빈이는.... 대체 못하는 게 뭐임?

└창녕김씨 37대손인 나를 가지지 못한 거?

└승빈이 열심히 살았는데 왜 그래ㅠㅠㅠㅠㅠ

“짧게만 한 소절 들려드릴게요.”

[3 2 1 시작되는 카운트다운

너를 향해 달려가]

“아, 이러면 제목까지 스포인가? 모르겠다. 편집자님, 잘 부탁드립니다?”

피곤한 와중에도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였다.

[네네 노래 잘 만드셨으니까 용서해 드림]

“와, 대박이다. 왜 이게 타이틀이 아닌 거지?”

“그러게. 잠깐 들었는데도 거의 타이틀 감인데?”

“우리 빈이 진짜 천재 아닐까? 나 어쩌면 천재를 덕질하고 있는지도?”

“어휴, 이수진 또 벅차올랐네.”

“근데 승빈이도 진짜 대박이다. 요즘 바쁠 텐데 편집까지 했다니.”

“그러게. 그리고 윤빈이가 편집자님 하면서 장난치는 거 보면 삔즈 진짜 서로 편한가 봐.”

“맞아. 난 윤빈이가 승빈이랑은 가끔 편하게 영어 써서 너무 좋음. 삔즈 내 최애될 거 같아.”

윤빈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화면이 전환됐고, 등장한 건 차지운과 강도현이었다.

“오늘 두 분만 연습실에 온 이유가 뭐죠?”

“승빈 씨까지 셋인데요?”

“저는 오늘 촬영 팀이라서 크리드로 온 게 아니거든요~”

“넵,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문 피디님.”

“도현 씨 하는 거 봐서요. 그래서 오늘 무슨 일이시라고요?”

“저희는 윤빈 형이 방금 막 완성한 따끈따끈한 신곡의 안무를 만들기 위해 모였습니다.”

-도현이 지운이가 같은 팀 한적 없지않나?

-둘이 안무라니 개같이기대됨;;;

“근데 안무 영상이면 신곡 공개되는 거 아니야?”

“그래서 동요 나오는 거 봐-”

-파워댄스추는데 곰세마리가 웬말임ㅋㅋㅋㅋㅋㅋㅋㅋ

-나중에 노래 공개되고 보면 쾌감오지겠다

-어쩐지 안무를 벌써 보여준다 했다ㅋㅋㅋㅋㅋㅋ

이어서 박재봉과 정유현은 작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팬송 : CLO♡ER]

비지엠으로 10초 정도 공개되었는데 귀를 사로잡는 멜로디와 멤버들의 목소리가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수록곡이 이 정도 퀄리티라니, 클로버들의 기대감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팬송이 벌써 나오는 거야?

-여기 가사를 재봉이가 쓴거야?

-유현이 이제 작사까지 잘하는 거냐고;;;

-이 노래들을 이기고 타이틀이 된 곡은 얼마나 띵곡인거야?

“처음 도전해 보는 건데 클로버들이 많이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작곡 배운 지 얼마 안 됐지만 만족스러운 결과 나온 거 같아서 저도 기대가 많이 돼요.”

“팬 송인 만큼 클로버들한테 선물 같은 곡이 됐으면 좋겠어요!”

[새싹 작곡가님들]

-애들 머리 위에 새싹 넣어준거봨ㅋㅋㅋㅋㅋ

-그래도 코어가 작곡공부도 시켜주고 좋네

[2집 곳곳에 크리드 멤버들의 흔적이 남아 있답니다. 기대 많이 해 주세요!]

“취업해서 다행이다…….”

“진정한 덕질은 직장인이 된 후부터라고 하더라.”

“재봉아, 누나 총알 장전해 둘게.”

곧 다가올 첫 월급날이 기대되는 수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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