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159화 (159/346)

159화

“우리 승빈이가 복덩어리네-”

“그니까, 요즘같이 고정 하나 잡아 오기도 힘든 때에.”

“회식 가서 안 어색했어? 매니저가 같이 가긴 했어도 혼자 미성년자였을 텐데.”

“피디님들이 편하게 대해 주셔서 괜찮았어요.”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배운 사회생활이 이렇게 빛을 발할 줄이야.

“믿고 맡겨 주셨으니까 정말 열심히 할게요!”

“아유, 승빈이는 잘할 거 알지. 다치지만 마, 알겠지?”

“네!”

미션창이 미친 듯이 발광하기 시작했고, 곧장 보상을 수령했다. 체력 상승 3회라니, 앞으로 예능 촬영과 앨범 준비를 병행하게 될 나에게 딱 필요한 보상이었다.

연습실에 돌아오니 기다렸다는 듯 멤버들의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무슨 프로그램이에요?”

“언제부터 촬영 시작해?”

“어떤 피디님 프로그램이야?”

“하, 한 명씩 천천히 물어봐.”

뒷걸음질 치며 말하니 진짜 정유현을 선두로 쪼르르 줄을 섰다. 그 모습에 헛웃음이 터졌다. 귀여운 놈들 같으니라고.

“어떤 프로그램이야?”

“‘플레이 온 아이스’라고 최연호 피디님이 제작하는 피겨 예능이에요.”

“최 피디님? 대박, 나 그분 운동 예능 다 챙겨 봤는데!”

“우리 세대에 그분 예능 안 보고 큰 사람이 있나?”

“자자, 방금 답변으로 해결된 사람은 돌아가고.”

다음은 지운이 형이었다.

“촬영은 언제부터 해?”

“다음 주 월요일이래요.”

“오늘이 금요일인데?”

“맞아요. 제가 마지막으로 합류한 거 같더라구요.”

지운이 형의 말을 들으니 회식이 정말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캐스팅된 게 바로 나였겠지.

사실 원래 ‘플레이 온 아이스’는 이 시기보다 더 늦게 나온 예능이었다. 그래서 내가 최 피디를 보고도 바로 피겨 예능을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었지. 반년 정도는 더 뒤에 나왔던 거 같은데, 아마 그때도 캐스팅에 난항을 겪어서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피디가 그렇게 눈을 반짝일 만했네.’

계속 미션을 던지는 상태창이 짜증 나기는 했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려 주는 알림창 같기도 했다. 미션이 딱 떴을 때는 허무맹랑해 보이다가도, 어떻게든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들이 생기는 걸 보면 말이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는 상태창의 존재였다.

연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오랜만에 피겨 영상을 찾아봤다. 최 피디에게 추천한 이정훈 선수의 영상을 보면서 인연은 어떻게든 이어지는구나- 새삼 신기했다. 회귀 전에 작품과 관련하여 해당 선수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도 열정이 가득했고 밝은 에너지를 주는 선수였는데 지금도 같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오- 사전 조사 하는 거야? 역시 준비된 자세네~”

“놀리지 마라-”

“칭찬이다, 이놈아.”

“누가 칭찬을 그렇게 해.”

강도현 쟤는 참 모든 말을 놀리는 것처럼 하는 재주가 있단 말이지.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데 누가 저걸 칭찬으로 듣겠냐고.

“지운이 형, 저 둘 또 싸워요.”

“싸우는 거 아니…….”

“싸우는 거 아니…….”

어쩌다 보니 둘이 오디오가 겹쳤다. 지운이 형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왜 따라 하냐?”

“지가 따라 해 놓고.”

정유현은 익숙한 듯 조용히 귀마개를 귀에 꽂고 눈을 감았다. 선우 형과 박재봉은 그러거나 말거나 게임에 집중했고 윤빈 형은 허허 웃으며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 * *

공백기임에도 멤버들의 예능 출연과 사운드클라우드 업로드 등으로 심심할 틈이 없던 중, 크리드 공식 계정에 새로운 콘텐츠가 올라왔다.

[도와줘, 크리드! ep1. 코어를 도와줘!]

(링크)

“‘도와줘, 크리드’?”

처음 보는 콘텐츠 제목에 의아할 무렵, 모연은 시선을 사로잡는 썸네일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 이게 뭐야?”

모연이 놀란 이유는 도저히 소속사에서 만들었다고 믿을 수 없는 퀄리티의 썸네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림판만으로 모든 작업을 마쳤는지, 휘황찬란한 형광 무지개색 배경도 충격이었지만 글씨가 최고였다. 오른손잡이인 자신이 왼손으로 써도 저것보다는 덜 삐뚤빼뚤할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코어엔터 디자인팀 전부 퇴사함?

-아니 코어 망했대??????

-이게 공식 컨텐츠라눀ㅋㅋㅋㅋㅋㅋㅋㅋ

-아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걸 컨펌했다고?제정신인가?

-이거 뭔가 애들이 한 거 같은데? 그게 아닌 이상 설명이 안되자낰ㅋㅋㅋㅋㅋ

-와.... 보기만 해도 정신이 어질해진다

-근데 누가봐도 한번 눌러보고 싶게 생김ㅋㅋㅋㅋㅋㅋㅋ

-ㄹㅇ 시강 오짐ㅋㅋㅋㅋㅋㅋㅋ

때마침 보현에게도 연락이 왔다.

[자컨 올라온 거 봤어요?]

[소속사에 디자인 팀이 없나……?]

[나 진짜 코어에 이력서 내야 하나?]

좌우대칭은 시원하게 무시하고 비율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디자인에 모연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결국, 모연은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가리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썸네일 만큼이나 조악한 비지엠과 애니메이션이 나왔다.

[도와줘, 크리드 1화 : 코어를 도와줘, 크리드!]

“코어는 소속사 이름 아니야?”

첫 화면은 크리드 멤버들이 회의실에 모여 있는 모습이었다.

[20**년 *월 *일 코어 사옥 회의실]

[이곳에 크리드 멤버들이 모여 있는 이유는?]

“‘도와줘, 크리드!’의 첫 의뢰자는 바로 코어 엔터테인먼트 직원분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크리드 여러분들은 하루 동안 코어 엔터의 직원이 되어 볼 겁니다.”

‘그래서 그런 거구나? 디자인 팀은 누구일지 얼굴 한번 보자.’

[특별히 해 보고 싶었던 업무는?]

[승빈, 도현 : 저는 매니저 형 업무 해 보고 싶어요.]

[재봉 : 저는 코디!]

[지운 : 촬영을 한번 해 보고 싶긴 해요.]

[윤빈 : 프로듀싱 관련 업무요!]

[유현 : 디자인 팀에서 하는 일이 궁금했어요. / 선우 : 저도 디자인!]

“디자인……?”

모연은 만약 저 썸네일을 유현이 만들었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하, 설마. 선우가 만들었겠지…….”

하지만 이런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는 컴퓨터 앞에서 그림판과 씨름하는 정유현이 나왔다. 모니터를 뚫어 버릴 기세로 노려보는데, 안타깝게도 화면에 나온 것은 삐뚤빼뚤한 글씨였다. 열정과 정확하게 반비례하는 실력이었다. 그 옆에 앉은 박선우는 놀랍게도 포토샵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뭐야?

-앜ㅋㅋㅋㅋㅋㅋㅋ

-정유현이었냐곸ㅋㅋㅋㅋ

-미치겠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현이 저렇게 진지한뎈ㅋㅋㅋㅋㅋ

-화면 뚫릴 정도로 집중했는데 결과물 무슨 일이얔ㅋㅋㅋㅋㅋ

-유현이도 사람이었어

-선우 포토샵 왤케 잘해?

-아니 선우는 포토샵을 왜 할줄 하는 건데??

때마침 보현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 새끼 포토샵도 잘해]

[미쳤다, 나보다 잘하는데? 천재 아니야?]

아주 불난 집에 부채질하기도 이런 부채질이 없었다. 선우에 대해 온갖 주접을 떨고있는 보현을 보자니 열불이 올랐다.

-아니 저렇게 고퀄로 만든게 있는데 왜 유현이꺼로 한거얔ㅋㅋㅋㅋ큐ㅠㅠ

-그게 제일 궁금함ㅋㅋㅋㅋㅋ

-그림판을 왜 골랐냐고ㅋㅋㅋㅋㅋㅋ

-저럴 거면 선우 포토샵 왜 켰어ㅋㅋㅋㅋㅋ

-근데 썸네일 진짜 임팩트 쩔긴 함ㅇㅇ

모두의 의문은 다음 장면에서 해소됐다.

“이제 두 분 다 완성했는데, 누구 걸로 1화 썸네일 할까요?”

정유현은 객관적으로 봐도 박선우의 썸네일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미련 없이 박선우의 것을 추천했다. 하지만 박선우의 반응이 의외였다.

“대박! 유현이 형 거 너무 유니크하지 않아요? 이걸로 썸네일 하고 싶어요!”

“무슨 소리야?”

“왜~ 너무 귀엽지 않아요? 완전 내 취향인데.”

모연은 순간 의심이 들었다.

‘얘가 지금 유현이 놀리나?’

-유현이 엿멕이는거임?

-왜 썸네일해준다고 해도 ㅈㄹ임

-누가봐도 박선우꺼가 잘했는데 저러니까 멕이는거같잖앜ㅋㅋㅋ

-아니야 근데 선우 평소 사복이랑 인테리어한 거 보면…

└맞아 얘는 찐으로 마음에 들어한 거일수도 있다곸ㅋㅋ큐ㅠㅠㅠ

“형, 이런 스타일로 하나만 더 그려 주라. 나 폰 배경으로 하고 다닐래!”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 누구도 이해 못 하는 선우의 취향]

원작자인 정유현조차도 의심에 가득한 눈으로 물었지만, 박선우는 꿋꿋이 그림을 받아 냈다.

“이, 이거면 됐어?”

“너무 마음에 들어- 진짜 고마워, 형!”

그리고 댓글창은 박선우 팬들의 해명으로 가득했다.

-와 저거 진짜 선우 배경화면이잖앜ㅋㅋㅋㅋㅋㅋ

-하.... 우리 애는 그냥 취향이 독특한거라고ㅠㅠㅠㅠㅠ

-어쩐지 배경화면 그림 누가 무슨 그림인가 궁금했는데ㅋㅋㅋㅋㅋㅋ

-맞아 맨날 배경 바꾸는 애가 계속 저거길래 자기가 그린 건가 했다곸ㅋㅋㅋㅋㅋㅋㅋ

-(배경화면이 찍힌 사진) 이거보라고ㅠㅠㅠ나쁜 의도로 그런거 아님ㅠㅠㅠ

-와..... 찐이네.......

-서누 배경화면 중에 제일 오래 버틴 듯ㄷㄷ

모연도 사진을 보고 나서야 오해를 멈췄다. 박선우의 배경 화면은 정말 유현이 그려 준 조악한 그림판 그림이었다. 그것도 일회성도 아니고 최소 2주일은 저 배경 화면을 유지했다는 건데, 모연은 자신도 저렇게는 못 한다고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디자인에 재능은 있지만… 보는 안목이 꽝이네, 우리 선우.”

[누나, 정유현이 저 그림으로 배사하라고 하면 할 거에요?]

‘아니’라고 적으려던 모연은 신나서 강아지처럼 붕방거리는 박선우를 보며 묘하게 뿌듯해하는 유현을 발견하곤, 바로 답을 바꿨다.

[응, 잘 보면 괜찮지 않아? 예술에 정답이 어디 있니? 저렇게 재밌는 것도 나와야지.]

[와… 정유현이 누나 예술관까지 바꿨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방에 정유현의 디자인을 걸거나 배경 화면이 정유현의 그림인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정신이 어질해지는 기분이었다.

[선우 군 반응 보고 어땠어요?]

[유현 : 아… 역시 평범한 애가 아니다]

[디자인은 계속하실 건지?]

[유현 : 아뇨(단호)]

-유현이 개단호햌ㅋㅋㅋㅋ

-잘하는거 하자 유현아

-유현이 그림실력 본인이 제일 잘안다곸ㅋㅋㅋㅋ

-자기객관화 미쳤냐며ㅋㅋㅋㅋㅋㅋ

-유현아.... 아이돌 해줘서 고마워.....

-아이돌 해줘서가 아니라 디자인 안해서 고마운거 아니냐몈ㅋㅋㅋㅋ

-아 진짜 정유현 웃수저라곸ㅋㅋㅋㅋㅋㅋㅋ

모연은 피곤한 듯 영상을 잠시 멈추고 침대로 향했다. 천장을 보며 모연은 생각했다. 예술관까지 바꿔 가며 덕질을 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견고하게 쌓아 온 예술관이 무너진 것, 보현과의 연애가 전부였던 그녀에게 정유현의 등장은 마른하늘의 날벼락과도 같았다.

사실 덕밍아웃을 하기까지도 많은 고뇌의 시간이 있던 그녀였다. 아직까지도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하면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럴수록 유현의 환상적인 무대와 해맑은 미소가 떠오르면서 덕질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한숨과 함께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내 예술 세계가 깨지는 게 아니라 확장되는 거라고 생각하자고.”

보현이 들으면 자신을 그렇게 지독하게 사랑해 보라고 일주일은 토라질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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