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옆에서 집중해야 하는데 매너 무슨 일이냐?”
“은메달도 잘한 거지…….”
“사실 상대가 VM만 아니어도 괜찮은 성적인데.”
화면 너머로 긴장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승빈은 침착하게 멤버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망설임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시끄러웠던 현장도 팽팽한 긴장감에 조용해졌다. 드디어 화살이 그의 손을 떠났고 경쾌한 파열음이 들렸다. 뒤이어 토끼 눈이 된 승빈의 얼굴이 전광판에 잡혔다.
“뭐야?”
“몇 점이야?”
“방금 전에 무슨 소리였어?”
곧 흥분에 가득 찬 해설진들의 외침이 들렸다.
“퍼, 퍼펙트 골드예요!”
“아이돌 운동회 사상 최초의 퍼펙트 골드입니다!”
“카메라를 정확하게 맞췄습니다!”
“헐!”
“금메달이야?”
“응, 금메달!”
흡사 올림픽 양궁 금메달의 순간처럼 세 명은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나눴다. 화면 너머 크리드 멤버들도 승빈에게 달려들어 금메달을 축하했다. 미리 자축을 하던 VM 팀은 머쓱한 듯 널브러져 있는 크리드 뒤에서 인사를 하고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아이돌 운동회 퍼펙트 골드의 주인공! 크리드 문승빈 군을 만나보겠습니다. 퍼펙트 골드, 예상하셨나요?”
“아니요… 정말 지금도 안 믿겨요. 사실 앞서 10점을 쏴서 가망이 없는 건가 생각했습니다. 하자만 어차피 지더라도 은메달이라는 마음으로 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미쳤다, 진짜. 내 새끼 하다 하다 양궁까지 잘해.”
크리드 멤버들이 각자 목에 금메달을 걸고 팬석으로 향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강아지들같아ㅠㅠ
└진심 강아지들이 칭찬받으려고 주인들한테 뛰어가는거같음ㅋㅋ큐ㅠㅠ
* * *
추석 연휴 첫날이라 멤버들은 모두 본가로 내려갔고 나와 윤빈 형, 정유현은 숙소에 남았다.
‘정유현은 명절에도 본가에 안 가네…….’
명절에 가족을 만나지 못해 아쉽기도 했지만, 미국에서 부모님이 보내 주신 명절 선물과 지운이 형 부모님이 보내 주신 명절 음식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전 진짜 맛있다.”
“어머니, 아버님께 감사하다고 말씀 전해 줘.”
“넵, 둘 다 맛있게 먹어요.”
세 명이서 거실에 모여 ‘아이돌 운동회’를 본방 사수 하는데, 양궁 경기는 결과를 알고 봐도 흥미진진했다. 50m 달리기는 강도현의 활약으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도현이 축구했었다고 했지?”
“응.”
“어쩐지 잘 달리더라-”
“도현이 애들한테 장난치고 도망치는 폼만 봐도 잘 달릴 거라고 생각했어.”
“이제 계주 남은 건가?”
계주로는 나, 강도현, 정유현, 윤빈 형이 출전했다.
“근데 왜 선우 형 나가지 말라고 한 거였어?”
윤빈 형의 질문을 들었지만 모른 척 대답하지 않고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근데 형은 미국에서 달리기도 했었어요? 엄청 빠르던데-”
“육상은 따로 안 했고, 대신에 거의 모든 훈련이 운동장 돌기부터였어.”
“형이 마지막에 역전할 때 소름 돋았어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윤빈 형의 말에 답하지 않은 이유는 회귀 전 선우 형이 계주에 나왔다가 인대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과거가 반복될 거라는 확신은 없지만,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그리고 놀랍지 않게도 대부분의 경기 결과가 비슷하게 흘러갔다.
회귀 전 아이돌 운동회에서 다친 건 선우 형뿐만이 아니었다. 시크릿 싱어에 나왔던 케이와 같은 그룹인 ‘오드’의 멤버 ‘제이’ 역시 여기서 신발 끈이 풀려 크게 넘어지면서 부상을 당했었다. 다른 팀의 출전까지 막을 수는 없으니 계주 시작 전에 가서 슬쩍 말을 던졌다. 상대적으로 작은 키 때문에 달리기하는 신발인데도 깔창을 살짝 깔았던 것 같았거든.
초면이라 나도 말을 걸기 민망했는데,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다가왔으니 본인도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는가. 신발 끈이 느슨한 것 같으니 한 번 더 묶으라는 말에 의아한 듯 보였지만, 카메라를 의식해서인지 군말 없이 끈을 꽉 묶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시작된 계주에서 그는 같은 구간에서 잠깐 휘청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넘어지지 않고 완주할 수 있었다. 오지랖이라면 오지랖이었지만 아이돌에게 부상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누구라도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계주를 마친 제이가 나한테 와서 고맙다고 할 때는 뿌듯함이 온몸을 휘감았던 것 같다.
“첫 운동회 출연이어서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많았지만 나름 재밌게 하고 온 거 같아.”
“맞아, 이제 시크릿 싱어 할 시간인가? 몇 번에서 해?”
“4번이요. 곧 시작하겠다.”
운동회가 끝나자마자 시크릿 싱어 방영 채널로 향했다. 그날도 느꼈지만 날씨가 정말 좋아서 풍경이 최고였다. 그런데 방송국에서 공들여 보정까지 하니 단순한 노래 경연보다는 버스킹을 보는 기분이었다.
“출연진은 우리한테도 안 알려 줬었지?”
“네, 방송 전까지는 비밀이라고 하셔서… 지금은 괜찮을 텐데 말해 줄까요?”
“아니? 나도 보면서 누가 누구인지 한번 맞춰 볼래.”
“나도, 나도!”
윤빈 형은 확실히 아는 한국 가수나 연예인이 적었기 때문에 거의 맞추지 못했지만, 정유현은 예리하게 케이와 G, F를 알아챘다. 하지만 역시나 오재성의 목소리는 알아채지 못했다.
“누구지?”
“상상도 못 할 인물일걸요?”
“설마 우리 멤버 중에 또 나온 건 아니지?”
“에이, 그때 다 같이 숙소에 있었으면서.”
드디어 내 무대 차례가 되고, 둘 다 말없이 무대를 지켜봤다. 내가 보는 내 무대는 이제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솔로 무대는 확실히 달랐다. 저 때 어떤 감정으로 노래했는지가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뭔가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무대가 끝나고 윤빈 형은 할 수 있는 모든 감탄사를 하며 칭찬을 했다.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서 말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진짜 승빈아, 나는 너 천재라고 생각해, 무대가 너무너무 완벽해”
정유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더했다.
“연습 열심히 한 보람이 있었네. 긴장됐을 텐데 잘했어.”
“고마워요. 방송에도 잘 나와서 다행이에요.”
“우리 메보 자랑스러워!”
본가에 가 있던 멤버들에게도 전화가 쏟아졌다.
“가족들한테 우리 팀 형이라고 자랑하니까 엄청 뿌듯해하셨어요!”
“부모님이 너 노래 진짜 잘한다고 하시더라- 할머니도 마음에 들어 하심.”
“부모님이 추석이라고 숙소에서 먹으라고 음식 보내셨다는데 받았어? 맞다, 방송 잘 봤어! 가족들이 저 친구하고 같은 그룹인 거냐고 엄청 좋아하시더라-”
크리드의 대표로 나가는 만큼 그룹에 누가 되지 않고, 자랑이 되기를 바랐던 마음의 짐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룹에 힘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다짐했다.
* * *
‘청학동 도령님’의 무대가 끝이 나고, 문스트럭은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건 반드시 승빈이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1위는 당연히 도령님인 거 같고.”
“나는 솔직히 1위 안 궁금해. 그냥 도령님이 승빈이인지만 확인하고 싶음.”
모든 무대가 끝나고 문스트럭과 K, A는 최종 1위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종 1위는! 청학동 도령님입니다!”
“오케이, 이제 탈 좀 벗어 봐요, 도령님.”
“1위의 주인공은! 다른 시크릿 싱어들의 정체가 공개된 이후 단독 무대를 통해 공개하겠습니다!”
“아오, 진짜!”
-진행이 왜이래?
-단독무대로 공개한다는게 뭔소리야
-다른애들 안궁금하고 도령님 좀 알려달라니까;;
이변 없이 케이와 F, G가 공개되고 선비가 오재성임이 공개되는 순간 세 명은 아이돌 운동회에서 느낀 충격을 다시 겪었다.
“이, 이거 데자뷔냐?”
“오재성이 여기서 왜 나와?”
“VM이 진짜… 와, 내가 졌다.”
-븨엠미친거아님?
-야 데뷔도 안한 쌩신인을 지금ㅋㅋㅋㅋㅋ
-포커스에서 쟤가 센터인가보네
└병대 팽당한거?
└센터 병대라고;;
└누가봐도 푸쉬멤 김병대가 아닌데 무슨ㅋㅋㅋ
-근데 잘생기긴했음ㅇㅇ
└저 와꾸에 저정도 노래실력이면 선녀지
“VM인데 롤 모델이 승빈이라고 한 거야?”
“쟤도 보통 아니다…….”
“VM에서는 금지어 아니야?”
“우리 승빈이가 왜-”
“너도 언급되는 거 별로잖아.”
“그건 그렇지.”
“앞으로 포커스 많이 많이 사랑해 주세요! 그리고 저 오재성, 꼭 기억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채널 고정! 화제의 도령님의 정체가 광고 후에 공개됩니다!]
“하여간 씨넷이 다 망쳐 놨어. 저놈의 선어그로 후광고”
광고 타임이 끝나고 드디어 단독 무대 영상이 나왔다.
“와, 영상미 봐. 거의 영화 아니야?”
“민속촌이어서 더 예뻐, 사극 보는 거 같음.”
“근데 왜 자꾸 뒷모습만 보여 주는 거냐?”
드디어 정면이 나오고 탈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문스트럭의 환호성이 집안을 가득 채웠다.
“내가! 뭐랬어! 우리 승빈이 맞다고 했잖아-”
“와… 진짜 문승빈이네?”
도령의 정체에 대해 추리하던 게시판도 불타올랐다.
-??
-뭐야 진짜 문승빈임?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승프들이 자의식과잉이라고 하던 ㅅㄲ들 어디갔냐
-도랐어 표정연기하는거봐ㅠㅠㅠㅠㅠㅠㅠㅠ
-언제 이렇게 또 성장한거임ㅠㅠㅠㅠㅠㅠ
-얘는 진짜 연기해야겠다
“미쳤다, 얘 감정 연기하는 것 봐.”
“탈 쓰고도 표정이 보이는 거 같았는데 확실히 얼굴 보이니까 더 몰입되고 좋네.”
문스트럭은 원래 아이돌이 연기하는 것에 결사반대를 외치던 쪽이었다. 구구오빠가 배우 병 걸려서 동태눈 돼서 탈덕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색의 한복을 입고, 도령 모자를 쓰고 애절한 목소리와 얼굴로 이별 노래를 부르는 승빈을 보며 문스트럭은 자신의 가치관을 재정립했다.
‘X발 내가 언젠가 브라운관으로 저 얼굴 보고 만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무대 세트 뒤에 매화나무가 있었다. 바람과 함께 매화 꽃잎이 떨어지면서 영상미를 더했다. 두 손으로 마이크를 쥐고 노래에 온 마음을 다하는 모습에 문스트럭은 처음 승빈을 만났던 그 날의 충격을 다시 느꼈다.
사실 교통사고에 빗대어 표현될 정도로 충격적인 첫 입덕의 순간을 이기기는 힘든데 그와 비슷한 떨림을 다시 줬다는 것에 또 한 번 입덕한 것 같은 그녀였다. 엔딩에는 울 듯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는데 문스트럭은 머릿속에서 끈이 하나 탁 하고 끊어지는 짜릿함을 느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일상 계정에 글 하나를 올렸다. 원래 감성 일상 계정을 표방했기 때문에 덕질과 관련된 글은 많이 올리지 않았는데 반쯤 정신을 놓고 올려 버렸다. 뒤늦게 확인한 문스트럭은 황급히 글을 삭제했다.
피피 @moonstruck_life 1분 전
[애들아(0명) 아ㅁㅜ래도 슴빈이 연기해야게다]
누가 봐도 한잔 거하게 걸친 상태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