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시트콤 촬영이요?”
뜻밖의 소식에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나도 마시고 있던 물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연기는 아이돌의 단골 코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언젠가 연기를 할 순간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응, 별난 가족들 알지? 거기에 카메오로 출연할 거야.”
“와! 그거 요즘 완전 인기 있는 시트콤이잖아요?”
“맞아. 나도 위튜브에서 클립 영상으로 여러 번 봤어.”
‘별난 가족들’을 듣고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정 감독님을 만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되다니! 회귀 전 배우 생활을 하면서 얻은 인연 중 가장 값진 사람이었다.
‘별난 가족들’은 당시 최고 시청률 30%에 달하는 국민 시트콤으로, 인기에 힘입어 시즌 3까지 나온 작품이었다. 그리고 해당 작품을 담당한 정 감독은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메인을 꿰찬 천재로 유명했다. 그런 정 감독과는 내가 ‘별난 가족들 2’의 조연으로 등장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 ‘어쩌면 그날’의 촬영을 마쳤지만, 아직 영화가 개봉하기 전이라 영화의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역할을 가리지 않고 오디션을 보러 다녔고, ‘별난 가족들 2’에서 주인공의 친구 역으로 짧게나마 출연하게 되었다.
작은 역할이지만 매 촬영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좋게 봤는지 정 감독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말도 잘 통했고, 촬영이 끝나면 같이 술 한잔씩 하는 사이였다. 나중에 들어 보니 정 감독은 내가 아이돌 출신인 것을 전혀 몰랐다고 했다. 아이돌 출신 연기자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내가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는 나의 이런 점을 높이 평가했고, 나 역시 그의 재능과 능력을 동경했다.
그때의 인연은 다음 작품까지 이어졌다. 그의 첫 스크린 데뷔작 ‘신호등 연애’의 서브 남자 주인공으로 낙점되었는데, 이 작품으로 ‘신예 로코 강자’라는 별명도 얻었다. 내 연기에도 많은 조언과 도움을 준 인물이었다.
“넌 진짜, 더 잘될 거야. 형이 장담한다!”
“형은 이미 잘돼서… 더 훌륭한 감독이 될 거야.”
“그럼그럼. 그때는 꼭 너 주인공으로 쓸게.”
회귀 전 마지막 만남에서도 그렇게 희망찬 미래를 약속했는데, 뜻밖의 재회에 벌써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저, 연기는 처음인데 어떻게 하죠?”
“완전 뚝딱대다가 오는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그렇게 비중 있는 건 아니니까. 여기 대본.”
우리가 맡은 역할은 ‘별난 가족들’의 둘째 딸이 좋아하는 아이돌 역할이었다. 딸의 상상 속 장면을 촬영하면 되는 거여서 큰 비중은 아니지만, 전 연령대에 인기가 있는 시트콤이기 때문에 그룹 홍보에 충분히 도움이 되는 기회였다.
“연습을 좀 해 가야겠지?”
“너 대사 있어?”
“한 줄?”
“전 자기 소개만 하고 끝인데요?”
“그나마 승빈이가 대사가 좀 있네.”
“다행이다. 그래도 우리 중에서는 연기파잖아.”
급하게 잡힌 스케줄인지 당장 내일이 촬영이어서 연기 레슨을 받을 시간은 당연히 없었다. 짧은 대사였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기로 했다. 모든 기회가 소중한 건 회귀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승빈아, 나 대사 좀 봐주라.”
“그래.”
강도현이 맡은 대사는… 상상 속에서 강도현이 둘째 딸에게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내 눈엔 너밖에 안 보여. 연두야, 네가 내 우주다.]
참고로 둘째 딸인 연두는 아직 중학생이었다.
“와우…….”
“미리 얘기하는데 웃지 마라.”
“응, 노력해 볼게.”
이 대사를 하는 강도현을 보며 웃음을 참으라니, 2회차 인생 중 가장 힘든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내. 눈에는. 크흠, 너밖에… 아오, 못 하겠네!”
“뭐야 부끄러워하면 어떻게 해? 프로처럼 해야지-”
“후… 내 눈에는! 너.밖.에 안.보.여, 연두야 네가 내 우, 우욱!”
“너 내일 이거 할 수 있겠어?”
강도현은 대본을 얼굴에 뒤집어쓴 채 바닥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나 역시 만만치 않았다. 중학생의 상상 속 상황이기 때문에 맥락이 없고, 대사부터가 오그라듦의 절정이었다.
“연두는 내꺼야! 너 같은 놈에게는 아까운 여자라고!”
“아니, 무슨 중학생 상상인데 치정극을 만들어 놨어?”
“도현이 형이랑 승빈이 형의 치정극을 다 보고…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재봉아, 너 열여섯이야.”
‘대사 외우는 데에 만족해야겠네.’
초단기 속성 연기 과외를 하면서 오랜만에 멤버들과 춤, 노래 연습이 아닌 걸로 밤을 새운 것 같다.
* * *
“본 투 샤인! 안녕하세요, 크리드입니다!”
“크리드분들 오셨구나! 어서 오세요, 보조 작가 이은지입니다. 감독님과는 지금 촬영하는 장면 끝나고 인사하시면 돼요.”
촬영 준비를 마치고 촬영 과정을 지켜보는데, 회귀 전보다 어린 나이었지만 여전히 열정이 가득한 정 감독이었다.
‘지금은 이십 대 후반이겠네.’
“컷! 다음 씬 촬영할게요!”
“이제 우리 차례인가?”
“응.”
“긴장된다…….”
“정 감독님! 크리드 분들 오셨어요.”
드디어 만나는구나, 반가운 마음에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회귀한 이후 몇 달 만에 처음 얼굴을 보는 거였다.
하지만 지나친 반가움에 현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지금은 회귀 전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나는 배우 문승빈이 아닌 아이돌 문승빈이라는 것.
“아, 윗분들이 무조건 넣어야 한다고 하신 그분들이신가?”
냉소적인 표정과 무미건조하지만 은근한 비아냥이 담긴 말투. 내가 알던 정 감독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가장 정 감독다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이돌 출신 배우는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람이라 그랬으니까. 다른 멤버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하… 신 30부터 촬영하면 될까요?”
냉랭한 분위기를 풀려고 이은지 작가가 나섰다. 감독은 정말 예의만 차렸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만 인사를 받고 곧장 촬영을 시작했다.
촬영이 시작되고 역시나 뚝딱이는 멤버들이 속출했다. 점점 표정이 굳어 가던 정 감독은 결국 촬영을 중지했다.
“내가 이래서 아이돌 출신들을 안 좋아해. 본업 할 때도 이렇게 하나?”
“…아닙니다.”
감독의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배우 지망생들이 부단한 노력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우리는 거저 얻은 것이니까. 멤버들도 억울했지만 변명할 수는 없었다. 감독은 우리가 하루도 안 되는 연습 시간을 가지고 여기 온 것을 모를 테니까. 연예계가 그렇다. 결과만이 판단의 지표였다.
그리고 드디어 강도현과 나의 치정극 신 촬영 순서가 왔다. 강도현은 시작 전부터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절대 눈 마주치지 말자, 보려면 차라리 인중을 봐.”
“그래.”
촬영이 시작되고 강도현은 평생 쓸 항마력을 쥐어짜 내며 연기를 이어 갔다. 나 역시 강도현과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몇 번 웃음이 터질 고비가 있었지만, 악으로 깡으로 참아 냈다.
‘주인공 친구 역할을 하면서 코미디 연기를 해 본 경험이 이럴 때 쓰이는구나…….’
“둘이 꽁트하세요?”
감독의 웃음 섞인 말에 속으로 울컥했다.
‘대놓고 꽁트하라고 만든 대본이면서……!’
“다시 해 보겠습니다!”
“뭘 다시 해? 꽁트 같아서 잘~했다고.”
“아…….”
“거기 머리 검은 친구는 그나마 괜찮네, 연기 좀 배웠나 봐?”
“감사합니다!”
비꼬는 건가 했는데 재촬영 없이 넘어간 것을 보면 감독의 의도대로 연기한 것 같았다. 살벌했던 촬영을 마친 후 정 감독은 바로 현장을 떠났다. 정 감독이 아예 촬영 현장에서 나간 후에야 멤버들은 참아 왔던 긴장감을 풀어 냈다.
“완전 무서웠어요…….”
“체하는 줄 알았어.”
“그래도 너무해. 이렇게까지 차갑게 대할 필요는 없었잖아.”
그가 아이돌 출신 배우를 싫어하는 것을 알 리가 없는 이들의 대화에는 끝이 없었다. 이렇게 그와의 인연이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복도에서 우연히 그의 전화 내용을 듣고는 더 울적해졌다.
“한 번만 더 내 작품에 배우 아닌 애들 끼워 넣기만 해 봐, 그땐 나도 이판사판이야!”
“그 시간에 실력 있는 애들 한 명이라도 더 얼굴 비추게 해 줘야지. 저런 간절함도 없이 설치는 애들 딱 질색이야.”
뭔가 서글펐다. 형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으니까.
숙소로 향하는 차 안은 조용했다. 다들 생각이 많아 보였다. 나 역시 형의 표정과 마지막 전화 통화가 잊히지 않았다. 처음으로 내가 잃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지금까지는 지운이 형과 데뷔하겠다는 하나의 목표만 보고 달려왔다. 회귀 전 내가 쌓아 왔던 것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오늘 정 감독과의 재회는 꽤 타격이 컸다.
망돌이지만 연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과거, 배우로서 성공하기 위해 쏟아부었던 노력들은 이 세계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는 그와 회귀 전과 같은 사이가 될 수 없겠지. 아이돌 출신 배우에 대한 그의 편견을 깨트릴 기회 역시 없겠고.
회귀한 것을 후회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뒤늦게 찾아온 듯했다. 데뷔라는 목표만 이루면 전부 끝날 거라고 생각한 탓도 있다. 생각에 잠긴 내 상태가 평소와 다른 걸 눈치챘는지, 지운이 형이 말을 걸어왔다.
“그래도 어제 네가 조언해 준 대로 해서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난 거 같아.”
민망한 듯 웃는 형의 얼굴을 보는데 생각이 많아졌다. 이제 와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우스운 일이지만, 돌이켜 보면 정말 정신없이 달려왔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맞아. 어제오늘 수고 많았어.”
“네가 그나마 코치해 줘서 이 정도였지, 아니었으면 난 그 대사 말하다가 쓰러졌을 거야.”
“승빈이가 있어서 다행이야.”
멤버들의 응원을 들으니 뭔가 민망해졌다. 연예계에서 살길을 찾아 혼자 고군분투하던 때에 가장 그리웠고, 소망했던 것이 바로 이런 따스함이었다. 나를 응원해 주고 지지해 줄 동료가 필요했었다.
그래, 회귀 전의 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의 경험과 노하우가 있었기에 치열한 서바이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평생의 미련으로 남았을 아이돌로서의 새 삶을 얻지 않았는가?
“다들 고마워.”
요란하지만 누구보다 섬세하게 나를 지지해 주는 멤버들이었다. 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제 이 세계가 진짜 내 삶이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하는 것도, 누군가의 삶을 위한 것도 아닌 온전히 나를 위해 개척해야 할 세계다. 회귀 전에는 서툴렀고, 성급해서 망쳐 버렸던 것들도 전부 바로잡을 것이다.
만약 회귀 전 그때로 돌아간다면 주저 없이 나는 또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세계로 올 것이다. 이곳에는 내가 잃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