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방금까지 방송국 복도였는데 갑자기 학교 복도라니요? 거기다가 왁자지껄한 학생들의 뜀박질 소리, 수다 소리까지 합쳐지니 더 정신이 없었다.
‘이게 뭐지?’
유령이 된 양 이곳의 그 누구도 내가 안 보이는 것만 같았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 눈앞에는 새로운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야, 박재봉 온다!”
“저 새끼 또 여자애들이랑 붙어 있는 거 봐.”
“여자애들은 쟤가 뭐가 좋다고-”
“남자애가 예쁘게 생겨서 어디다 써먹냐.”
조그마한 녀석들이 참 입이 걸었다. 6-3, 사복 입고 있는 것도 그렇고 교실에 적힌 반을 보니 초등학생인 거 같은데 무섭네.
복도 끝에서 여자애들이 우르르 걸어오고 있었는데, 잘 보니까 그 한가운데에 박재봉이 있었다. 과거 사진으로 봤던 빡빡이 시절보다도 더 어릴 때라 그런지 아직은 퐁실한 바가지 머리였다.
‘박재봉 말이 맞았네.’
가끔 박재봉이 자긴 모태 미남이라고 주장했는데, 지금도 귀엽게 생겼지만 초딩 박재봉은 정말 살벌하게 귀여웠다. 그냥 길을 걷기만 해도 소속사 명함이 쏟아질 거 같은 비주얼이었다.
그 모습을 고깝게 쳐다보면 남자애들이 결국 사고를 쳤다. 지나가던 박재봉에게 발을 건 거다. 다행히 옆에 있던 여자애들이 잡아 줘서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놀라서 땡그래진 눈이 상처받은 표정으로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김준호, 너 미쳤냐!”
“너희 재봉이한테 왜 자꾸 시비 거는데!”
“내가 뭘~”
“어휴, 저 초딩 새끼.”
“야, 그러는 너네도 초딩이고 박재봉도 초딩이거든?”
애들은 맞네. 답지 않게 살벌했던 모습들은 어디 가고 유치한 말싸움이 영락없는 초딩들이었다.
“지희야, 나 괜찮아! 준호도 모르고 그런 거야.”
“야! 너 내가 그렇게 착하게 굴지 말랬지! 바보냐?”
“아냐, 나 진짜 괜찮아. 준호한테 그러지 마.”
시끄러워질 뻔한 상황을 중재한 건 바로 박재봉이었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삐끗한 발이 제법 아팠을 텐데도, 싸우는 둘을 달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더 안쓰러운 건 이미 익숙한 상황인 듯 체념한 그 눈이었다.
“너네 한 번만 더 재봉이 괴롭히면 진짜 가만 안 둔다.”
‘그래도 좋은 친구들을 뒀네.’
그나마 맘이 좀 따스워지려는 순간, 장면이 전환됐다. 이번에는 가정집 거실이었다.
“엄마, 나 학교 안 갈래.”
“그게 무슨 소리야?”
“이게 다 엄마 아빠 때문이야! 왜 내 얼굴을 이렇게 낳아 준 거야!”
“재봉아, 일단 진정하고-”
“김준호가 나보고 남자 맞냐고 자꾸 옷 벗어 보라 그러잖아. 나 학교 가기 싫어.”
꾹꾹 참아 왔던 감정이 폭발한 듯 서럽게 우는 박재봉과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재봉이를 달래기만 하는 어머님. 파이널 무대가 끝나고 대기실에서 눈물을 훔치시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머리가 아파졌다. 그리고 다시 이뤄진 장면 전환.
“재봉아, 여기로 패스!”
“오케이, 잘 받아라-”
결국 전학을 갔는지 새로운 학교에서 빡빡머리를 하고는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열심히 축구하는 박재봉. 그 표정이 너무 해맑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예쁘게 생겼다는 말에 흠칫하고, 일부러 얼굴을 태우려고 몰래 태닝 크림을 사서 바르고, 작가 누나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던 모습과 다르게 또래 여자애들에게는 벽을 세우고 제대로 말도 안 섞는, 박재봉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문득문득 사라지지 않는 트라우마의 잔재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거기서 끝이 나는가 싶더니, 익숙한 장소의 박재봉이 보였다. 투마월 숙소 침대에 누워서 댓글을 하나하나 읽고 있었다. 귀여운 거 빼면 남는 게 없다, 남성미가 하나도 안 느껴진다 등과 같이 박재봉의 예쁘장한 외모에 대한 태클이 대부분이었다. 옆에 놓인 가사지를 보니 ‘기다릴게’ 경연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하트창이 바닥이던 시기잖아…….’
결국 박재봉이 그 트라우마에서 완전하게 벗어난 시간은 없었다. 그저 견뎌 왔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지.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다시 어두워졌다.
“승빈아! 너 그새 졸았냐?”
“엄청 피곤했나 보네.”
“우리 이제 인사드리러 나가야 해.”
눈을 떠 보니 다시 대기실이었다. 방금 그게 뭐지 싶다가도 감이 잡혔다. 박재봉의 비밀을 보여 준 거구나. 풀리지 않던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
* * *
그래도 밖에서는 잘 참는 듯했더니, 차에 타자마자 박재봉은 이어폰을 끼고 눈을 감았다. 자는지 자는 척인지는 모르겠다만, 덕분에 숙소로 향하는 내내 정적이 가득했다. 게다가 오래지 않아 숙소에 도착해서는 바로 방으로 직행이었다.
“아무래도 재봉이 더 이상은 안 될 거 같다.”
멤버들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큰 소리가 나거나 한 적은 없지만, 거의 일주일째 박재봉 눈치 보면서 이런 상태였으니 오래 참았다 싶긴 했다. 다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곤한 상태기도 해서 더 예민해지기도 했으니까.
“오늘은 내가 좀 얘기해 볼게.”
두드려도 답이 없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있는 박재봉이 보였다. 아무리 지가 아직 작아도 그렇지, 그런다고 가려질 턱이 있냐. 문도 안 잠갔으면서 이불만 덮고 있는 게 숨바꼭질한다고 얼굴만 가리는 애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재봉아.”
“…….”
“박이든 씨-”
“…….”
“봉봉아-”
“이씨-”
“어쭈? 아이씨?”
“아이씨라고 안 했거든요?”
“그래, 이씨. 이제 좀 얘기할 기분이 들어?”
이불부터 걷어 냈다. 저거 아주 그냥 이불 채로 돌돌 말아 버릴까도 고민했지만, 대화가 우선이었다. 말로 안 되면 그다음에는 힘을 써 봐야지.
‘이럴 때는 한잔 먹이고 시작해야 하는데-’
박재봉이랑은 4년 후에나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새삼 눈앞에 있는 이놈 나이가 실감이 됐다.
“저 혼자 있고 싶어요.”
“왜, 윤빈이 형도 방에 못 들어오게 하게?”
“…….”
“어구, 불쌍한 윤빈이 형. 거실 바닥에서 자야겠네-”
묵언 시위를 하겠다는 건지, 다시 입을 꾹 다문 박재봉에게 방향을 좀 바꿔서 변화구를 던졌다.
“너, 강도현 무서워하지?”
“…….”
“그래서 서바이벌 처음부터 도현이한테 틱틱거린 거지?”
내내 고개를 숙이고 나랑 눈도 안 마주치려던 박재봉이 드디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흔들리는 동공이 지금 박재봉이 받은 충격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뭘? 네가 강도현 무서워한 거? 지운이 형도 처음에는 얼굴만 보고 양아친 줄 알고 안 좋아했던 거?”
“아니, 그건-”
“그것도 아니면, 지운이 형 학폭 논란 때 네가 과민 반응한 이유?”
“미친.”
“내가 더 말할까? 너 중학교 때 왜 빡빡이였는지-까지?”
우습게도 처음으로 박재봉이 왜 토끼라고 불리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저 큰 눈을 땡그랗게 뜨고 벌벌 떠는 모습이 영락없는 토깽이라서.
“형, 뭐 하는 사람이에요?”
“시켜 줘, 박재봉 명예 소방관-”
“뭐야, 그게.”
“이거 몰라? 아, 나 진짜 우리 봉봉이랑 세대 차이 느끼네.”
“형, 문승빈 아니죠? 박선우죠?”
하도 긴장하고 있길래 농담 좀 했더니 박선우라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재봉아.”
“선우 형이랑 영혼 바뀐 거 아니에요?”
그래도 농담이 효과가 있긴 했나 보다. 왈왈거리는 게 내가 알던 박재봉으로 조금 돌아온 거 같기는 한데.
“재봉아, 너는 어리지만 약하지 않아.”
“저도 알아요.”
“근데 모든 걸 혼자 이겨 내는 게 어른스러운 건 아냐.”
“…….”
“누군가에게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질 때가 있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었다. 만약 내가 지운이 형과 회귀 전 과거에 대해 누구에게라도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강도현한테도 내가 왜 말도 없이 회사를 나갔는지 말할 수 있을 테고, 서바이벌에서도 왜 지운이 형만 싸고돌았는지, 형이 다치는 거에 왜 형보다도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다 말할 수 있겠지.
지금도 가끔 형을 잃을 뻔한 그날의 악몽을 꾸고는 하는데, 그러면 얼마나 맘이 편해질까.
솔직히 나도 하지 못하고 있는 걸 재봉이한테 하라고 하는 꼴이라 좀 민망했지만, 이건 좀 다른 문제니까. 혼자만 품고 있는 비밀이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를 알기 때문에 이 조그마한 녀석이 얼른 그걸 털어 내길 바랐다.
“어때, 형한테 말해 볼 기회를 줄게.”
“그게 뭐예요!”
“흔치 않다. 문승빈의 들어만 드려요~ 오늘이 첫방이자 막방이야.”
영혼 끝까지 끌어모은 능글맞음에 얼른 박재봉이 넘어오길 바랐다. 이보다 더한 건 나도 괴로울 거 같았거든. 이 정도면 육아다, 육아.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박재봉은 이쯤에서 넘어와 줬다.
“사실 제가 애기 때부터 잘생겼거든요?”
“와- 그거 진짜 놀라운 얘긴데?”
“아니, 자랑이 아니라 진짜로.”
“알지, 알지.”
‘어떻게 생겼는지 이미 보고 왔는걸.’
“형, 지금 저 놀리는 거죠?”
“아냐. 계속 말해 봐.”
“…하, 암튼 그래서 애기 때부터 예쁘단 소리를 지겹게 들었어요.”
이어지는 얘기는 내가 봤던 모습과 똑같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시작된 남자애들의 질투와 은은한 괴롭힘. 전학 간 덕분에 괴롭힘이 더 심해지기 전에 탈출했지만, 어릴 적 일이라 트라우마처럼 남았다고.
“전학 간 학교 선생님이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
“선생님이?”
“네, 잘 챙겨 주시기도 했고, 제가 왜 전학 왔는지를 들으시더니 그럼 넌 연예인을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거든요. 그때 제 얼굴이 장점이 될 수도 있구나- 생각이 좀 바뀌었던 거 같아요.”
“다행이네.”
이건 비밀이 아니라서 그런가, 아까는 보지 못했던 얘기였다.
“그렇게 아이돌 준비하면서는 저도 욕심도 생기고 관리도 하면서 괜찮아졌는데-”
“그래서 자꾸 멋있어 보이고 싶었구나?”
“네. 귀엽거나 예쁜 건 그때 걔네처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멋있는 건 그렇지 않고 다 좋아하잖아요.”
‘얘가 아직 뭘 모르네. 귀여움이 가장 강력하다는 걸.’
“그러다 결정적으로 김준홍이 얘기한 거에 타격을 받은 거고?”
“…네.”
“웃기게도 그때 걔네가 했던 말이랑 똑같은 거예요.”
“뭐가?”
“여자냐 남자냐, 저렇게 생겨서 남자구실 하겠냐.”
나이 먹을 대로 먹고 초딩과 똑같은 수준이라니. 새삼 김준홍이 더 찌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사실 그때 저 제일 괴롭혔던 애 이름이 김준호거든요?”
“김준호?”
“네, 그래서 저희 엄마가 김준홍 선배님 엄청 팬이었다가 그 이후로는 얘기도 안 꺼내셨어요.”
“이름이 비슷해서?”
“네, 괜히 비슷한 이름 들리면 제가 힘들어할까 봐 그러셨던 거 같아요.”
우연의 일치지만, 새삼 재봉이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어하셨을지가 예상됐다.
“그래서 더 김준홍 선배님 만나는 걸 기대했거든요. 사인 받아 가서 엄마 주면서, 진짜로 나 이제 다 괜찮다고 얘기해 주려고 했는데-”
“…….”
“저런 사람일 줄이야.”
그동안 박재봉이 혼자 얼마나 생각이 많았을지 이해가 됐다. 단순히 어린 마음에 김준홍의 막말에 상처받았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기대했던 모든 상황이 어그러지면서 느꼈을 좌절감이란. 모든 얘기를 다 듣고 나니 오히려 지금까지 참은 박재봉의 행동이 기특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근데 네 성격에 그런 유치한 말에 계속 마음이 쓰인 게 더 자존심 상했을 거 같은데.”
“…네.”
“어쩔 수 없어. 우린 모두 어렸을 때 기억으로 사는 거잖아.”
찰나의 기억으로 우리는 평생을 산다. 티벡스에서의 기억만으로 내가 지운이 형을 살리기 위해 모든 걸 잃은 상태로 그 말도 안 되는 서바이벌을 겪어 낸 것처럼.
“하지만 그 기억을 더 밝고, 좋은 색으로 칠할 수는 있지.”
“…….”
“그 기억을 싹 다 지울 순 없겠지만, 앞으로 크리드 활동하면서 우리랑 클로버랑 여러 가지 색으로 예쁘게 덮어 버리자. 형들도 노력할게.”
가만히 내 말을 듣던 박재봉이 심호흡을 하고 큰 결심을 한 듯 말했다.
“…저, 형들한테 사과하고 싶어요.”
“그래?”
“어떻게 보면 저도 형들한테 안 좋은 기억을 만들어 준 거잖아요. 더 늦기 전에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요.”
‘똘똘한 녀석, 기특해라.’
“잘 생각했어. 멤버들한테도 얘기해 보자. 다들 너 엄청 걱정하고 있어.”
“네, 형 말대로 말하고 나니까 되게 편하네요!”
오랜만에 보는 개구쟁이 웃음이었다. 그날 결국 밤이 늦도록 박재봉의 토크쇼를 진행했다. 무거운 분위기일까 걱정했는데, 다들 진지하지만 편하게 박재봉의 얘기를 경청했다. 어쨌든 팀을 위해서라도 하나의 갈등을 오래 가지고 가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도현이 형한테 제일 미안해요. 그냥 저 대신 누군가가 김준홍 선배한테 화내 주길 바랐나 봐요. 사회생활이 그렇게 말처럼 되는 게 아닌데.”
“아니야, 나도 너무 가볍게 넘기려고만 했던 거 같네.”
그렇게 일주일 넘게 애먹은 재봉이 문제를 겨우 해결했고, 다들 한결 가벼워진 맘으로 잠이 들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보상을 수령한 후 새롭게 떠오른 퀘스트창이 나를 반기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