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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136화 (136/346)

136화

숙소 안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졸지에 가해자가 된 강도현은 당혹스러운 듯 입도 제대로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뭐야?”

“음식 먹을 때까지는 괜찮지 않았어?”

“사춘기인가…….”

강도현 역시 박재봉의 급발진에 빈정이 상한 듯 보였다. 쟤도 꽤나 감정에 솔직한 타입이기 때문에 표정에서 열받음이 느껴졌다. 파이널 연습할 때 이후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내가 말실수라도 한 거야? 아니, 자기 좋으라고 엔딩 요정 하라고 한 건데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냐고!”

“일단 진정해.”

점차 언성이 높아지는 강도현을 진정시키는 건 역시 정유현이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재봉이랑은 얘기해 볼게. 오늘 여러 일도 있었고, 뭔가 쌓인 게 있었겠지.”

강도현의 미간이 찌푸려짐을 발견한 정유현이 덧붙였다.

“아, 물론 너나 멤버들 때문은 아닐 거야.”

“얘기해 보고 왜 화났는지 들으면 저한테도 꼭 말해 줘요.”

“그래, 늦었다. 빨리 정리하고 자자. 내일 스케줄 가야지.”

“네.”

“…알았어요.”

다행히 정유현 덕분에 분위기가 빠르게 정리됐다. 지운이 형의 손에 잡혀서 방으로 들어가면서도 강도현은 박재봉의 방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괜찮아?”

“네. 하여간 어리긴 어리다니까요. 저렇게 자기 감정 하나 컨트롤 못 하면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아이고, 엄청 걱정되나 보네?”

“응?”

내 말에 강도현이 잠시 말을 잃은 듯 조용하다가, 아니라고 열심히 부인했다. 그러다가 결국 인정했다.

“멤버 하나가 흔들리면 전체한테 영향을 줄 수 있잖아.”

“그건 그렇지.”

“에휴, 오늘 여러 가지 일이 있긴 했지. 쟤도 지금 엄청 긴장되고, 불안할 거라고 생각하니… 좀 안쓰럽네.”

애초에 정이 많은 애였다, 사람 미워하는 방법 모르고. 그러니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와 VM에서 연습한 시간을 더 중요하게 여겼겠지.

“내가 볼 땐 지금 재봉이 분명 후회하고 있을 거야.”

“…….”

강도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침대 옆 스탠드를 껐다. 지운이 형은 이미 잠이 들었고, 나는 조용히 박재봉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 보니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박재봉이 보였다. 그 앞에 정유현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네가 말을 안 하면 우리가 알 수 없잖아.”

“…죄송해요.”

“하… 이건 죄송할 문제가 아니라니까?”

조금 격양된 정유현의 목소리에 박재봉의 어깨가 흠칫하고 떨렸다. 여기서 더 몰아붙여 봤자 좋을 게 하나 없다는 생각에 정유현을 불렀다.

“형.”

정유현도 박재봉의 상태를 봤고, 내 의도를 파악한 듯 방을 나섰다. 그러면서도 명확히 할 부분은 놓치지 않았다.

“내일 꼭 도현이한테 사과해. 알겠지?”

“…네.”

“그래. 잘 자고, 거기서 더 울면 내일 붓는다, 재봉아.”

박재봉은 눈가를 벅벅 닦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유현이 나가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제가 너무 어려서 싫어요.”

“뭐?”

“형들처럼 어른스러워지고 싶은데…….”

그 뒤로도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라도 준비가 되면 얘기해 줘.”

“아니에요.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거예요.”

“…그래.”

거실 소파에 그 큰 몸을 접어 넣고 졸고 있는 윤빈을 깨워서 방으로 보냈다.

“재봉이 괜찮대? 하암.”

“아까 전보다는 진정됐어요. 형도 피곤하겠네, 얼른 들어가서 자요.”

“그래, 너도 굿 나잇.”

결국 이렇다 할 수확 없이 방으로 돌아왔다. 김준홍의 막말 이후 급속도로 상태가 나빠진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김준홍이 한 막말이 한둘이 아니어서 정확히 어느 말이 박재봉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아침이 되고 그 어느 때보다 어색한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이렇게 조용한 아침은 숙소 입성 이후 처음이었다. 그나마 선우 형과 윤빈 형이 분위기 전환을 위해 열심히 대화 주제를 던졌지만, 강도현과 박재봉의 텐션이 죽으니 분위기가 오래가지 않았다.

“오늘 설거지 당번 누구지?”

“도현이랑…….”

“재봉이.”

지운이 형이 재빠르게 말했고, 의아한 표정을 짓던 선우 형도 눈치채고 동의했다.

“그… 맞네!”

그도 그럴 게 원래 당번은 강도현과 나였기 때문이다. 졸지에 설거지 면제받은 사람이 되어 버렸지만, 저 둘의 원활한 화해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이야. 절대 설거지하기 싫었던 건 아니다. 아마 아닐걸? 그런데 지운이 형이 먼저 나선 건 조금 의외였다.

강도현과 박재봉이 잠시 서로를 보더니 곧장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나는 설거지를 면했지만 식탁 정리는 피하지 못했다. 뭐, 덕분에 둘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지만.

“…괜찮냐?”

“…네.”

“…….”

‘내가 다 숨 막히네.’

겨우 몇 마디 하고는 다시 물소리랑 그릇 덜그럭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같이 식탁을 정리하던 정유현도 매의 눈으로 둘을 스캔하고 있었다.

“사과…….”

“…풉.”

“쉿.”

얼마나 화해시키고 싶었으면 식탁을 정리하는 내내 ‘사과’거리고 있었냔 말이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겨우 참고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 어제는.”

“내가 뭔가 잘못했겠지?”

“네?”

“사실 뭘 잘못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네 기분이 나쁠 만한 말을 했었다면 미안해.”

그래도 재봉이가 용기 내서 말을 꺼내자, 의외로 강도현이 먼저 사과를 했다. 예상치 못한 사과에 놀랐는지 잠시 정적이 흐르고 물 쏟아지는 소리만 들렸다.

“아니에요. 어제는 그냥 제 잘못이었어요. 형은 사과 안 해도 돼요. 죄송해요.”

의외의 대화에 정유현도 나도 놀랐다. 분명 울고불고 싸우다가 화해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점잖은 화해라니?

“왜 화났었는지 물어봐도 돼?”

“…….”

다시 브레이크가 걸린 대화에 둘 다 탄식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숨겨져 있는 걸까, 퀘스트에 성공한다면 곧장 박재봉의 비밀부터 알아내야겠다. 결국 설거지 화해 작전은 애매하게 실패했다. 둘 다 대놓고 싸운 티를 내지 않았지만, 은은하게 어색함이 맴돌았다.

* * *

재봉의 홈마이자 ‘레빗드림’의 계정주인 J는 팬튜버이기도 했다. 주된 콘텐츠는 앨범깡과 덕질 브이로그였다. 덕친이자 승빈 최애인 B와 카페를 찾은 J는 오랜만에 앨범깡 영상을 촬영하기로 했다.

레빗드림은 미리 준비한 재봉의 부적 포카를 앨범 위에 이리저리 비비며 빌었다.

“제발 재봉이 베레모… 베레모 나오게 해 주세요!”

그녀가 이렇게 민간요법까지 사용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지독한 비최애잡이이기 때문이다. 앨범깡을 하기만 하면 최애를 제외한 모든 멤버들의 포토 카드를 뽑는, 그것도 같이 온 덕메의 최애만 뽑는 아주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의 최애는 덕메들의 앨범에서만 나왔다. 그래서 그녀의 덕메이트들은 일부러 레빗드림과 앨범깡을 하고는 했다. 어찌 됐건 서로 윈윈하는 장사니까.

기대감과 함께 뜯은 첫 번째 앨범에서는 역시 재봉의 포토 카드가 나오지 않았다.

“헐, 브이 승빈이네? 나 이거 갈망인데 이따가 내 거에서 재봉이 나오면 교환하자.”

“그래, 이제 첫 번째 앨범이니까~ 우리 재봉이는 효자니까 제발 이번에는……!”

하지만 이번에도 박재봉은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기대로 가득 찼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오디오가 빌 일이 없이 높았던 텐션도 축 가라앉았다. 그녀는 최대한 아쉬움을 숨기며 억지로 텐션을 끌어 올렸다.

“와- 지운이 잘 나왔다~ 초커 도현이도 나왔네? 나 이거 나름 갈망이었는데.”

“아쉽게도 재봉이는 없네요…….”

심기일전으로 열어 본 다음 앨범, 그다음 앨범, 심지어 10장 연속 재봉이 나오지 않자 슬슬 그녀의 인내심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와… 유현이네?”

얼굴은 촬영하지 않아서 나올 일이 없지만 이미 생기를 잃은 눈이었다. 목소리에서부터 영혼이 사라진 그녀에 결국 B가 촬영을 멈췄다.

“야, 너무 영혼 없는 거 아니야? 이러다가 멤버 배척하냐고 욕먹을 듯.”

레빗드림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너무 실망한 티가 나? 근데 지금 10장째 최애가 안 나왔는데 제정신이겠냐고- 진짜 열받네? 중복도 심하고.”

그녀는 테이블 위에 나열한 포토 카드를 보며 한탄했다. 거의 30장 가까운 포카들 사이에 그녀의 최애만 없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오늘 짹짹이에서 본 별자리 운세에서 12위를 한 것 때문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녀였다.

“이 정도면 포카 넣는 알바가 정유현 팬 아니냐? 무슨 정유현 윙크 포카만 10장이 나와.”

“하… 재봉이 베레모 포카 시세 돌았던데, 매입해야 하나.”

“얼마인데? 3 정도?”

“3? 장난하니, 오늘 오전에 확인했을 때 7까지 올라 있었음.”

“미쳤네… 앨범 몇 장 남았지?”

“5장 정도?”

“저기에도 없으면 걍 매입하라는 신의 계시네.”

남은 앨범 포장 비닐을 뜯으면서 레빗드림은 거의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그런 그녀를 위로하겠다며 B가 말했다. 승빈 최애인 그녀는 이미 옆에 있으면서 어부지리로 승빈이 포카를 3장이나 얻은 상태였다.

“야, 슬퍼하지 마. 앞으로 5장 연속 재봉이 안 나오면? 완전 위튜브각 나오는 거 아니냐고.”

“이게 지금 그걸 위로라고……!”

“왜~ 위튜브 채널 떡상하고 좋잖아!”

그리고 B의 말이 씨가 되어 4장 연속 재봉의 포토 카드는 나오지 않았다.

“네가 괜한 말을 해 가지고 이러잖아아아-”

레빗드림의 핀잔에 B는 앨범을 두드리며 말했다.

“알았어- 똑똑. 재봉아, 거기 있으세요?”

“이쯤 되면 그냥 네가 사서 나 주고, 내가 사서 너 주는 게 현명한 선택일 거 같아.”

“걱정 마. 이번에는 무조건 재봉이 나온다. 촉이 왔어.”

래빗드림이 모든 희망을 버리고 이제는 당근 칼도 아니고 손톱으로 앨범에 자국이 생기건 말건 포장을 뜯었다.

“응- 기대도 안 했음. 자, 강도현 나왔고요- 아 근데 진짜 잘생겼네. 이거 시세 얼마냐? 개비쌀 듯.”

“이제 촬영은 아예 포기한 거냐고.”

“몰라, 몰라. 자! 이번에는 또 찾아온 볼하트 유현이~ 유현이 이제 또유현이라고 부를 거임.”

“저 눈에 은은한 광기 봐.”

“마지막이요? 기대도 안 해요~ 보나 마나 또 지운이 나오겠죠~ 여러분 먼저 확인하… 이런 미친!”

드디어 나타난 베레모 재봉에 레빗드림은 장소가 카페인 것을 망각한 듯 단말마의 함성을 질렀다. 급하게 B가 손으로 막긴 했지만 이미 그녀는 포카에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너무 예뻐, 미쳤나 봐! 이걸 7 주고 판다고? 반포자이 줘도 안 팔 거임.”

“거짓말.”

“티 났나?”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는 대화의 흐름에 그녀는 내심 걱정했다.

‘오늘 찍은 영상 반의반은 써먹을 수 있을까…….’

그래도 위튜브가 대수냐, 베레모 재봉을 얻은 그녀에게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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