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데뷔 이후 정신없이 스케줄이 이어졌다. 상태창에 대해 더 고민해 볼 시간도, 정신도 없을 지경이었다.
“네, 오늘 주인공은 바로바로 크리드입니다!”
“본 투 샤인! 안녕하세요, 크리드입니다!”
데뷔하고 첫 단체 예능은 신인 아이돌이라면 한 번쯤 출연한다는 ‘아이돌쇼’였다. 티벡스 시절에는 다른 신인 아이돌 그룹과 끼워팔기식으로 10분 나온 게 전부였는데 이번에는 단독 출연이었다. 게다가 무려 2회차로 나눠서 방영될 예정이란다.
“아유, 요즘 크리드 인기가 장난 아니라면서요?”
“오늘 크리드 온다고 하니까 작가진들이 아주 난리가 났다니까?”
“나 우리 막내 작가가 저렇게 눈이 빛나는 거 오늘 처음 봤잖아.”
역시 엠시 둘 다 베테랑 방송인이어서 그런지 오프닝부터 한시도 오디오가 비는 틈이 없었다. 간단하게 자기 소개를 하고 본격적으로 코너에 들어갔다.
“이번 코너는! 내가 쓰는 프로필입니다-”
“와아-!”
“다들 어떤 코너인지 아시죠?”
“당연하죠! 저희 모두 평소에 엄청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어서 웬만한 코너들은 다 알아요!”
“역시~ 준비된 아이돌 크리드입니다.”
‘내가 쓰는 프로필’은 아이돌이 인터넷상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정보들에 대해서 스스로 채워 넣을 수 있는 시간이다. 팬들과 대중들은 잘 모르는 자신의 TMI를 마음껏 표출할 수 있어서 팬들도 기대하는 코너였다.
“그럼 누구 먼저 할까요?”
“저희 리더인 유현이 형부터…….”
선우 형이 두 손으로 공손히 정유현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했다. 정유현은 피식 웃더니 빼지 않고 보드 앞으로 갔다.
“오, 역시 장유유서다 이거죠?”
“리더는 나이순으로 정했나 보죠?”
“아뇨? 저희는 투표로 정했어요.”
“공정하네- 그럼 장유유서가 아닐 수도 있네! J 씨, 유현 군한테 사과하세요!”
“아유, 아닙니다. 장유유서 맞아요.”
“맞다잖아!”
“하하하!”
틈새를 놓치지 않고 콩트를 하는 엠시 덕에 현장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이거 수정도 가능한 거죠?”
“물론이죠! 뭐 바꿔야 할 거 있나요? 우리 아이돌쇼 작가진들 정보력 하나는 믿을 만한데?”
“음, 엄청 대단한 건 아니고… 제 키가 183으로 나와 있는데, 185입니다.”
“그새 키가 더 큰 건가요?”
“투마월 때는 잰 지가 꽤 돼서 대충 저랑 비슷해 보이는 연습생 키 적은 거였거든요. 이번에 다시 재 보니까 185 나왔습니다.”
정유현의 말을 듣던 엠시 Y가 실망이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모두 일순간 긴장했다. 정유현도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진짜 유현 군, 벽이 느껴지네요. 알면 알수록.”
“그게 무슨…….”
“완벽이요. 아니, 무슨 키까지 커? 다 가져야 속이 후련합니까?”
“아, 뭐예요-!”
긴장한 게 허탈했는지 멤버들의 목소리에 억울함과 안도감이 있었다.
“팬분들이 꼭 아셨으면 하는 TMI가 있나요?”
“요즘… 슬라임에 빠졌습니다.”
“슬라임이요?”
정유현의 폭탄 발언에 멤버들과 현장 스태프들도 술렁였다.
“어쩐지 슬라임이 한두 개씩 사라진다 했어!”
“뭐야, 말도 없이 가져간 거예요?”
“승빈이가 하고 싶으면 가져가도 된다고 했어요.”
“아, 안 넘어가네.”
“와- 승빈 군 무서운 사람이었네!”
오랜만의 예능 촬영에 그동안 숨겨 뒀던 예능 자아를 약간 꺼내 봤다. 티벡스 시절 예능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리를 따내거나, 추가 출연을 해 왔기 때문에 예능 울렁증 따위는 없었다.
“다음 코너는 ‘안대 댄스’입니다!”
“아, 우리 아이돌쇼의 시그니처 콘텐츠죠? 안대를 쓰고 얼마나 팀워크를 발휘할 수 있을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크리드분들, 자신 있나요?”
“음, 저희가 해 본 적은 없지만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어도 어제 한번 맞춰 보긴 했다. 연습 시간이 빠듯해서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선방은 했다.
“다들 안 보이는 거 확실하죠?”
“네! 하나도 안 보여서 좀 무서울 정도예요…….”
박재봉이 옆자리 윤빈 형의 바지 주머니를 꾹 잡으며 말했다.
“그럼, 노래 주세요!”
노래가 시작되고 역시나 처음에는 충돌이 있었다.
“으악?”
“누, 누구야.”
“나야, 강도현!”
“넌 여기 말고 좀 더 뒤쪽에 있어야지!”
중심점을 잡기가 힘들기 때문에 처음에 잡은 자리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래서 사소하게 부딪히는 것은 크게 개의치 않고 자리를 잡는 것에 집중했다.
“여, 여기인가?”
“지운이 형은 왼쪽으로 가야 해요. 여기쯤.”
“고마워-”
그렇게 내 주변에서 방황하는 멤버들을 목소리로 구분해서 동선을 정리해 줬다. 뒤로 갈수록 익숙해졌는지, 부딪히거나 접촉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와, 이게 되네요?”
“대박. 다들 안대 제대로 쓴 거 맞죠?”
“전 눈 뜨고도 저렇게 못 할 거 같은데요?”
무사히 1절을 마쳤다. 미션 클리어가 떴고, 멤버들은 상품으로 받을 음식들에 환호했다.
“크리드, 안대 댄스 성공!”
“와!”
“크리드 멤버들이 적어 온 메뉴가… 아이고, 많기도 하네.”
“치킨, 피자, 떡볶이, 족발, 초밥… 저기, 회사에서 굶기는 거 아니죠?”
“아, 아니에요! 하하-”
“아니 진짜 혹시 다이어트 때문에 안 주거나, 그냥 굶기는 거면 저한테 연락해요. 밥이라도 사 주게.”
“우와, 감사합니다.”
“선배님 짱!”
역시 붙임성 좋은 박재봉과 강도현이었다. 다들 감사 인사를 하는 와중에 애교 있는 목소리로 ‘선배님 짱’을 외쳤다.
“저희가 그 음식을 다 드릴 순 없고, 게임을 통해서 남은 메뉴를 드리겠습니다.”
“게임이요?”
“네, 바로 ‘엠시를 이겨라!’입니다.”
“총 네 가지 음식을 살릴 수 있고, 게임에서 이기면 제외할 음식을 직접 고를 수 있습니다. 저희가 이기면 제작진들이 랜덤으로 음식을 제외할 거고요.”
“어쨌든 다 못 먹는다는 거네요?”
“세 번의 게임을 모두 이길 시에는 음식 하나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다 이겨야겠네!”
‘엠시를 이겨라!’는 게임 하나를 두고 엠시와 대결을 하는 코너다. 이번에도 뭐, ‘레몬 빨리 먹기’나 ‘탕수육 게임’ 같은 거 하려나?
“첫 번째 게임은 ‘레몬 빨리 먹기’입니다!”
‘역시…….’
대표로 윤빈 형이 출전했다. 워낙 모든 음식을 잘 먹는 능력자였기 때문에 믿음이 있었다.
“하나, 둘, 셋!”
“와아아! 윤빈 형 파이팅!”
“잘 먹는다!”
“끝!”
엄청난 속도로 레몬을 먹은 윤빈이 우렁차게 외쳤다. 그런 윤빈을 옆에서 보며 경악하던 엠시 J는 결국 레몬을 뱉어 내고 말았다.
이후로도 밝은 분위기와 함께 촬영이 이어졌다. 정식 데뷔를 한 후에 다들 방송에 있어서 조금씩 긴장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처럼 맘 편히 촬영한 시간이었다.
“오늘 소감 어떠셨나요!”
“엠시 선배님들이 너무 잘 챙겨 주시고, 너무 많이 웃어서 배가 아픈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대표로 소감을 말하는 것으로 촬영이 끝났다. 컷 사인과 함께 엠시 둘이 다가왔다.
“역시 신인분들이어서 그런가, 간만에 에너지 넘치는 촬영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수고들 많았고, 다음 컴백 때 더 재밌게 촬영합시다!”
“네! 다음에도 꼭 불러 주세요!”
티벡스 때도 적은 분량이지만 잘 챙겨 줬던 선배들이었다. 카메라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이 비일비재한 연예계에서 보기 드문 좋은 사람들이었지.
그리고 며칠 뒤 ‘아이돌쇼’가 방영되고 팬들의 반응을 확인했다. 역시 안대 댄스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문승빈뭐얔ㅋㅋㅋㅋㅋㅋㅋㅋ
-승빈이만 다른 안대쓴거아님?
-저거 보이는 안대 아니야?
-문승빈 이제 투시능력도 생긴거냐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러다 승빈이 히어로영화나오겠음
-아니 어떻게 앞에 있는 애들을 알아보고 동선을 맞춰주냐곸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애들 곧잘해내는거보면 연습량이 엄청난가봐
-초반에만 좀 우당탕탕이고 뒤는 잘하넼ㅋㅋㅋㅋ
모두의 동선을 외운 건 다른 이유가 없다. 투마월 동선 실수 이후 사실 약간 트라우마가 됐는지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 거까지 스캔하는 게 습관이 됐다. 처음에는 안심하려고 시작한 거였는데, 이렇게 제 역할을 해낼 줄이야. 역시 뭐든 쓸모없는 건 없나 보네.
* * *
“크리드분들, 오늘은 김준홍 씨와 같은 대기실 쓰실 거예요.”
“김준홍 선배님이요?”
대기실이 적기로 유명한 방송국이긴 했지만 같이 쓰는 인물이 의외였다. 보통은 연차에 맞춰서 배정을 해 주는데, 확실히 다들 우리를 평범한 신인으로는 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사이 방송국에서 몇 번 더 마주칠 때도 찜찜한 반응이었지만, 이번에는 좀 더 좋은 분위기이길 기대했다. 물론 호락호락하지 않은 게 인생이지만.
“본 투 샤인! 안녕하세요, 크리드입니다!”
“아, 우리 또 보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역시 신인이라서 군기가 잡혀 있나 봐?”
묘하게 비아냥거리는 말투는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모두 머쓱했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물론 저 짬바에 신인 아이돌이랑 같은 대기실 쓰는 게 자존심 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8월은 유난히 출연진이 많은 시기이기 때문에 방송국 측에서도 불가피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중간에 칸막이가 있기 때문에 서로 터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준홍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신인이라서 뭐든 다~ 신기한 건 알겠지만, 너무 시끄러운 거 아닌가?”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혼자 쓰는 대기실도 아닌데,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대기실에서 목 상태를 점검하거나 가볍게 안무를 맞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일부러 평소보다 데시벨을 낮췄음에도 지적을 받으니 다들 눈치 보기 바빴다. 하지만 살인적인 스케줄을 하고 예민해져 있을 테니 그럴 수 있겠다- 억지로 이해를 하려고 했다. 선 넘는 발언을 하기 전까지는.
“너희들도 잠 좀 자. 거기 제일 쪼끄만 애. 쟨… 좀 더 키워서 데뷔시켜야 했던 거 아닌가?”
“…네?”
김준홍이 갑자기 박재봉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조롱하는 눈빛과 말투였다.
“뭐, 예쁘장하게는 생겼네. 요즘은 저렇게 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 구분도 안 가는 애들이 인기더라고? 그치, 은정아?”
“아, 네. 뭐…….”
김준홍의 무식한 발언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옆자리의 은정이라는 스태프도 말끝을 흐리며 자리를 피했다.
“난 요즘 애들 취향을 잘 모르겠더라-”
“하하… 그래도 선배님은 전 세대가 다 선호하는 비주얼이시잖아요.”
강도현은 상황을 무마하려는 듯 웃으며 맞받아쳤고, 김준홍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일장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하긴 10년 전 내가 데뷔했을 때, 나 때는 말이야…….”
꼰대 기질까지 있다니, 최악이었다. 리허설 들어가야 하니 나오라는 스태프의 말이 없었다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연설했을 인간이었다. 김준홍이 나가고 대기실은 한동안 고요했다. 정적을 깬 건 윤빈 형이었다.
“나, 저 선배 싫어.”
“와, 윤빈이가 누구 싫어한다는 말 처음 들어.”
“방송이랑 이렇게 이미지가 다를 수 있는 거야?”
“재봉아, 괜찮아?”
지운이 형의 말에 다들 시선이 박재봉을 향했다.
“아… 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뭔가 평소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어린애 같은 모습도 있지만 멘탈은 우리 중에 상위권이라고 생각이 들 만큼 강한데, 타격이 큰 모양이었다. 오른손으로 쥐고 있던 물컵이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그걸 발견하고 눈을 마주치자, 왼손으로 오른손을 꾹 눌러 잡았다. 급히 자리를 떠나는 박재봉의 뒷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저 정도로 충격받을 애가 아닌데?’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