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상태창이 제멋대로 반짝거리기 시작하더니 또 다른 창이 하나 떠올랐다.
[!퀘스트: 음악 방송 1위 달성!]
남은 기간) D-100
▶성공 시: 동료의 비밀 확인 +1
▶실패 시: 예기치 못한 논란 +1
퀘스트?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타임 어택 미션처럼 시간과 달성 목표가 적혀 있었지만, 특이한 건 ‘실패 시’라는 포인트였다. 타임 어택 미션은 성공 시에는 포인트를 줬지만, 실패하면 그냥 아무것도 변화가 없었다. 근데 이건 실패하면 벌칙처럼 마이너스되는 게 생긴다고?
‘이게 뭔 X같은 소리야.’
주변에서는 손혜연이 멤버들에게 덕담해 주는 소리와 멤버들의 화답이 들렸지만, 그 모든 소리가 이명처럼 들렸다.
“오재성?”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작게 이름을 불러 봤더니, 그 익숙한 얼굴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같은 사람 맞네.
“네! 혹시 저 부르셨습니까?”
“어머, 승빈아. 너도 재성이 아니?”
“아…….”
“회사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나도 며칠 전에 처음 봤는데.”
‘작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손혜연이 자기가 다 감동받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오재성을 왜 아냐고 의아해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간 회사 연습생 이름까지 기억하는 줄 아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 얼핏 이름을 들었던 거 같아서요. 배우 하셔도 되겠어요. 잘생기셨네요.”
“감사합니다! 선배님이 더 멋지십니다!”
“쟤가 오재성이야?”
분위기를 보아하니 강도현마저도 아직 잘 모르는 연습생인 것 같았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연습생을 데뷔조에 끼워 넣다니. 더 이상 미련 없는 자리임에도 황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물론 오재성이 내 과거와 관련된 인물이긴 하지. 과거와 관련된 인물이 등장하면 상태창에 변화가 생긴다는 건 이미 파악한 사실이었다. 근데 얘가 왜 여기서 등장하는 건데? 그리고 상태창 이건 사라지기는커녕 왜 뜬금없이 미션을 던져 주는 건데? 머릿속이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의문으로 가득 찼다.
“어머, 승빈이는 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니?”
“…….”
“승빈아?”
“…아, 죄송합니다. 제가 데뷔한다고 긴장했더니 좀 체한 것 같습니다.”
“어머, 얼른 가서 좀 쉬어라. 상태가 안 좋아 보이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선배님. 지금까지 크리드였습니다!”
“그래, 생방송도 잘하고. 데뷔 축하한다.”
어떻게 다시 우리 대기실로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당장이라도 오재성을 붙잡고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졌다. 회귀하고 나서 처음 겪어 보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뭐야, 너 왜 그래?”
“형, 진짜 체했어요?”
“김병대 봐서 그런 거야?”
“쟤가 그 이후로도 너 괴롭혔어?”
가뜩이나 머리가 아픈데 쏟아지는 질문 폭탄에 정신이 없었다.
“쉿, 승빈이 지금 정신없는 거 안 보이니. 다들 조용.”
역시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건 정유현밖에 없었다. 리더 한번 잘 뽑았네. 어지러운 와중에 우습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나치게 이른 사녹 시간 덕분에 생방송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한동안 내 옆에서 전전긍긍하던 멤버들도 이미 다들 반쯤 기절하듯 잠이 든 상태였다. 원래라면 나도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 대기실 한구석에서라도 눈을 붙였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상황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오재성은 내가 회귀 전 속해 있던 그룹 티벡스의 멤버였다. 지운이 형과 동갑으로,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했음에도 재보다는 잿밥에만 관심 팔렸던 대표적인 멤버였다. 데뷔 초부터 연기하고 싶다고 그렇게 염불을 하더니 회사 몰래 연기 오디션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욕심은 또 얼마나 많은지. 모든 게 자기 위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그룹의 특성상 모든 관심이 지운이 형에게 쏠려 있었는데, 그걸 누구보다 못 참는 멤버였다. 내가 백발 머리를 하고 잠깐 관심을 받았을 때도 어찌나 질투했는지, 머리색이 할아버지 같다고 얼른 다른 색으로 바꾸자고 했던 것도 이 인간이었다.
고작 2년 같이 활동한 건데도 오재성, 아니, 오재수에 대한 에피소드를 풀려면 2박 3일도 부족했다.
심지어 나의 데뷔작이었던 ‘어쩌면 그날’ 오디션도 같이 봤다. 동아줄이라도 잡아 보려고 시도한 오디션이었는데, 얘기를 들은 오재성이 자기도 해 보겠다면서 오디션장에 쫓아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사실 나보다는 오재성이 흔히 말하는 배우상으로 생긴지라, 오디션에 떨어질까 조마조마해하기도 했었다. 결국 내가 주인공으로 발탁되고 난 후에는 히스테리가 더 심해져서, 거의 반쯤은 숙소를 나가서 지내기도 했다.
‘근데 그 형이 저렇게 순하다고?’
위험할 걸 알면서도 작게나마 이름을 불러 봤던 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분명 얼굴은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는데, 행동이나 눈빛이 너무 달랐다. 과거에는 늘 나를 째려보고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만, 빈말이라도 좋은 인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근데 지금은 데뷔를 앞둔 다른 연습생들처럼 설레지만 떨려 하는 눈빛이었다. 게다가 나한테 존댓말까지? 저 형이 아마 기억이 남아 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나 때문에 저 형도 미래가 바뀐 건가?’
회귀한 이후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까지도 포함하는 얘기였다. 박재봉은 서바이벌을 하차하지 않았고, 지운이 형도 결국 투마월 데뷔조로 뽑혔다. 강도현과 김병대 역시 과거와 달리 서바이벌에 참여하게 되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맘이 조금 편해졌다. 아마 내가 회귀하면서 오재성의 미래도 바뀐 것 같았다. 티벡스 때도 얼굴만 보고 뽑혔으니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당했나 보지, 뭐.
아니, 그래도 성격이 저렇게 다를 수 있나 싶긴 하지만, 티벡스 시절을 생각하면 그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그 난장판에서 제정신일 수가 있어야지.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깨닫게 됐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오재성이 아니다. 걔가 VM에서 데뷔를 하건 말건, 걔로 인해 나타난 상태창이 문제였다.
아까는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모든 사고 회로가 일순간 멈춘 기분이었다. 내가 세웠던 모든 가설이 무효화가 된 거다. 분명 오늘이 상태창과의 마지막 날이라고 확신했다. 지운이 형과 데뷔를 하고 나면 모든 게 끝나는 거 아니었나? 대체 뭐가 더 남은 거지. 얘는 대체 나한테 뭘 바라고 나타난 거지?
지금까지 조력자이자 마음의 안정을 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상태창이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 건가? 지금은 실패 시에 ‘예기치 못한 논란’ 정도가 적혀 있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강도가 심해지는 거 아닌가? 끝도 없는 상상이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하게 만들었다.
‘X발.’
모든 게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상태창이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 * *
“와, 뮤직쇼 백만 년 만에 보는 듯?”
“백만 년? 처음 아니고?”
“네 구오빠들 무대는 저녁 먹으면서 같이 본 적 있었지.”
“내 구오빠면… 확실히 오래되긴 했네.”
수진의 구오빠는 3년 전 그룹의 센터였는데, 어느 날 2차원의 존재에게 덕통사고를 당하면서 잠깐 탈케(탈케이팝)한 적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다시 케이팝의 길로 이끈 것이 바로 윤빈인 거다.
“사실 티비로 본방 사수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데뷔 무대는 또 다르지.”
“우린 아직 1위 후보 아님?”
“응, 다음 주부터 1위 후보 가능해.”
“근데 데뷔곡부터 1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아무래도 그렇지?”
수진의 말을 듣고 수정은 스밍이 끊기진 않았는지 괜히 한 번 더 확인했다. 안 그래도 첫날 진입 성적은 좋았지만 다들 진입 순위에 안심한 건지 순위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가, 새벽만 되면 다시 1위를 탈환하고 있었다. 그래도 1위는 좋은 거 아니냐는 수정의 질문에 수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새벽까지 스밍하는 건 아이돌 팬뿐이니까.”
“응?”
“생각해 봐. 누가 그 시간까지 노래를 듣고 있겠어.”
“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크리드만 아니었으면 수정 역시 죽을 때까지 24시간 동안 노래 켜 놓고 스밍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초동 추이도 좋고 음원 순위도 괜찮아서 지상파는 어려워도 뮤직쇼나 쇼히어로는 가능할걸?”
수진의 말에 수정은 말없이 총공 팀에게 음원 선물을 보냈다. 선물로 보낸 음원은 7번 스밍한 것과 같다고 하니까.
“다음은 뮤직쇼에서 아주 특별한 시작을 하게 된 그룹이죠?!”
“맞아요, 인혁 씨. 올해 대한민국 최고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던 투마이월드 시즌 2의 크리드가! 오늘 뮤직쇼에서 데뷔 무대를 최초 공개한다고 합니다!”
“와, 벌써부터 팬분들의 함성 소리가 엄청난데요?”
“그럼 바로 만나 볼까요?”
“오, 시작하나 보다.”
슬슬 언제 나오나 지루해질 때쯤 크리드의 차례가 왔다. 역시 씨넷 산하의 음악 프로그램인 만큼 크리드에 대한 대우도 남달랐다. 인트로 VCR에도 돈 냄새가 났다. ‘신세계’ 뮤직비디오 컨셉과 동일하게 멤버들이 운석 자국을 쳐다보는 장면에서 무대로 화면이 전환됐다. 실시간 게시판도 기대감으로 폭주했다.
-ㅁㅊVCR ㅈㄴ 돈많이 썼나봄
-애들 교복 이뻐ㅠㅠㅠㅠㅠㅠ
-씨넷출신이라고 힘 좀 들어갔네ㅋ
┕아 대기업수저 달달하다
수록곡인 ‘더 샤인’ 무대가 먼저 나왔다. 내심 더 샤인이 타이틀이 아닌 것을 아쉬워하던 클로버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으아아ㅏ앙아아ㅏㅏ
-ㅁㅊ더샤인도 직캠 나오겠다ㅠㅠㅠㅠㅠ
-애들 라이브 실화야?
┕밥대신 씨디먹나봄
┕진심. 먹은게 다 실력으로 가나봐.
-사녹 갔었는데 현장에서도 숨소리랑 다 들릴정도였어
역시 현재 아이돌 판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인의 데뷔 무대다웠다. 자본의 향기가 느껴지는 세트와 조명, 공들인 카메라 워킹까지 삼위일체를 이루는 무대였다. 엔딩 요정으로 차지운, 강도현, 박선우, 윤빈이 순서대로 잡혔다. 수많은 사녹 후기와 같이 기대 이상의 무대였다. 수진과 수정 모두 눈을 뗄 수 없는 무대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신세계 엔딩 요정은 나머지 셋인가 보네.”
“재봉이 엔딩 너무 기대돼!”
그리고 대망의 타이틀, ‘신세계’ 무대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