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크리드의 첫 음악 방송은 당연하게도 씨넷의 뮤직쇼였다. 신인답지 않은 푸시로 타이틀곡 무대와 오프닝 모두 사전 녹화가 예정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2, 3백 명인 입장 인원도 예외적으로 5백 명까지 신청을 받았다는데, 그 얘기를 듣고 지운이 형은 과연 5백 명이나 신청할까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순간 이 형이 티벡스 시절을 기억하나 싶을 정도로 황당한 소리였다.
‘된 사람보다 안 된 사람이 훨씬 많을 건데-’
드라이리허설을 하느라 꼭두새벽부터 방송국에 출근했는데, 이 이른 시간부터 씨넷 출입구 근처에 팬들과 기자들이 가득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출근길을 보기 위해 언제부터 기다린 걸까. 문득 겨울에는 컴백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 대박. 밖에 사람 왜 이렇게 많아요?”
“설마 전부 우리 기다리신 건가?”
“언제 올 줄 알고 밖에서 계속 기다리신 거래. 힘들었겠다.”
멤버들도 다들 상기된 얼굴이었다. 월요일에 했던 쇼케이스의 여파가 상당한 듯했다. 매일 3, 4시간도 제대로 못 자는 강행군이 지속되고 있음에도 아직까지는 다들 즐거워 보였다. 육체적 피로를 잊게 할 만큼 행복했던 거다.
아직 리허설 시간 남았으니 잠깐 눈 좀 붙이라는 매니저 형의 말에도 다들 창가에 붙어서 바깥에 서 있는 팬들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직 어두워서 잘 안 보인다.”
“계속 저렇게 서서 기다리시는 건가?”
“저희 입장 언제부터 해요?”
“5시 반 시작이니까 한 5시 10분부터 입장 시작할 듯?”
“헐, 아직도 세 시간이나 남았는데!”
“5백 명은 어떻게 뽑은 거예요? 뽑기로?”
“아냐, 선착순일걸?”
“한번 온 사람은 또 못 오는 거예요?”
“아니, 매번 새로 신청할 수 있어.”
“저희 팬인지는 어떻게 알아요?”
“공식 가입되어 있어야만 신청할 수 있으니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쏟아지는 질문 폭탄에 매니저 형이 오늘만큼은 유치원 선생님이 된 것만 같았다. 나도 한동안 멍하니 창문 밖을 구경하다가 눈을 붙였다. 쟤네 저러다 나중에 후회한다. 잠은 잘 수 있을 때 자둬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겠지.
1차 리허설 때는 아직 짓고 있던 세트가 중간에 헤어 메이크업을 받고 다시 오니까 어느새 완성되어 있었다.
“세트 미쳤다.”
“와, 연기까지 나는 거 봐.”
“대박! 저거 한번 만져 봐도 될까요?”
“재봉아, 참아.”
“힝입니다.”
누가 씨넷의 아들 아니랄까 봐 데뷔 무대 세트 스케일이 어마어마했다. 마치 프로모션 때처럼 무대 한쪽에 운석모형이 세팅되어 있었고 희미한 연기가 운석모형을 감싸고 있었다. 각자 한 명씩 연기 속에서 오프닝 영상을 촬영하기로 해서 먼저 무대에 올랐다.
오랜만에 다시 선 무대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티벡스 때는 무대에 이런 세트가 아예 없었으니까. 다른 가수들을 보면서 부러워했던 그런 세트가 바로 우리 무대라니. 데뷔가 결정된 후 시도 때도 없이 벅차서 문제였지만, 이번에는 정말 가슴이 벅차올랐다.
클로즈업으로 오프닝 영상을 촬영하고, 최종 리허설이 진행되었다. 아이디와 이드 버전으로 교차 편집을 할 예정이라고 하기에, 어색하지 않게 각 녹화마다 모든 안무가 똑같이 진행되어야 했다. 물론 자신 있었다.
[제목: 신세계(New World)]
-노래: ■■■■■
-안무: ■■■■■
눈앞에 보이는 노래창은 완벽 그 자체를 의미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보는 상태창의 모습이 이거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늘 무대를 끝내고 나면 모든 게 사라지겠지. ‘진짜_진진짜_이게진짜_최종’ 같은 느낌이지만, 몇 번인지 모를 상태창과의 마지막 인사를 한 번 더 해 봤다.
그동안 고마웠다.
* * *
“분명 나 너무 떨렸는데 이제 그냥 빨리 무대하고 싶다.”
“형도 그래요? 저도요.”
“방송국 출근한 지 벌써 4시간째야.”
무한대기 끝에 500여 명의 팬이 입장을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으며 우리도 마지막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마침내 녹화장에 들어서자 객석을 가득 채운 팬들이 풍선을 흔들고 있었다. 클로버를 닮은 예쁜 연두색이었다.
‘아직 응원봉이 없어서 임시로 배부했나 보군.’
아마 제작진 측에서 녹화 시작 전에는 소리를 못 내게 했는지 다들 반가운 얼굴이었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풍선이 푸드덕거리는 소리만 가득할 정도로 놀라운 단합력이었다.
“크리드 멤버들, 스탠바이 하겠습니다.”
“네!”
눈치 보며 팬들을 향해 살짝씩 손인사를 하던 멤버들이 일제히 무대 위로 올라갔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본 투 샤인! 안녕하세요, 크리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유현의 구호에 맞춰 다 같이 인사하자, 그제야 몇 시간 전부터 우리를 기다려준 팬들의 엄청난 환호를 마주할 수 있었다. 다행히 녹화 전 10분 정도 대화 시간을 부여받아서 간단히라도 팬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크리드의 데뷔 무대에 오신 여러분, 모두 환영합니다!”
“클로버! 저희 보고 싶었어요?”
“네!”
“저도 여러분 얼른 다시 보고 싶었어요!”
박재봉의 귀여운 인사를 시작으로 다들 순서대로 마이크를 잡았다.
“오래 기다렸죠?”
“아니!”
“에이~ 클로버 거짓말쟁이! 오래 기다렸으면서~”
“힘들지 않았어요?”
“하나도 안 힘들어!”
“유현이 얼굴 보니까 싹 나았어!”
“크리드 얼굴이 복지다!”
우리가 무대에 올라올 때까지 어떻게 참고 있었던 건지 모를 정도로 다들 한 목청씩 하셨다. 마주하는 시선마다 애정이 가득해 괜히 부끄러워졌다. 어떻게 저런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지. 아직 무대는 시작도 안 했는데 심장이 자기 혼자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럼 다들 밥은 먹었어요?”
“아니!”
“밥도 안 먹고 다니면 어떡해요!”
“선우야, 지금 새벽 5시 반인데…….”
“저는 클로버 여러분들 그렇게 약하게 키우지 않았어요.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죠. 내가 먹는 바로 그 시간이 식사시간인 겁니다.”
당당한 표정으로 얘기하는 박선우를 강도현이 놓칠 리가 없었다.
“오~ 선우 형~ 진짜 아무 말 하는데~”
“어쭈? 여러분. 도현이가 여러분을 위해 애교를 준비해 왔는데 궁금하시죠?”
“내가 언제!”
“보여 줘! 보여 줘!”
역시 그렇다고 질 선우 형도 아니고.
“자꾸 그렇게 애교시키면, 도현이 뚁!땅!해!”
강도현의 애교를 보고 우리가 더 속상해졌다.
“네, 도현 씨 속상하지 않게 바로 녹화 가겠습니다. 스탠바이-”
뮤직쇼 피디까지 합심해서 강도현을 놀리면서 드디어 데뷔 무대 사전 녹화가 시작되었다.
* * *
“진짜 너무 재밌었다.”
“빨리 또 무대하고 싶어요!”
“아니, 나 아까 응원법 듣고 소름 돋았잖아.”
“도현아, 나도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
녹화를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대에 대한 감상이 쏟아졌다. 항상 침착하던 정유현마저도 귓가가 발그레해질 정도니 다른 멤버들이 얼마나 흥분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직도 무대 위에 서 있는 듯한 짜릿함이 온몸에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내 감상을 멈추게 한 건 바로 상태창의 존재였다. 분명 데뷔 무대를 하고 내려왔는데도 왜 아직 머리 위를 둥둥 떠다니는 거지.
‘무대가 방송에 나가야 진짜 끝나는 건가?’
데뷔의 기준이 음원 공개도 쇼케이스도 아니면 남은 건 데뷔 무대밖에 없었다. 그래도 뭐 생방 시작하고 지금 찍어 둔 무대가 송출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겠지. 아쉽지만 이제 진짜 상태창과의 작별이 얼마 안 남았다.
마지막으로 멤버들의 상태창을 한번씩 확인하고 남들 몰래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해 뒀다.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 정보니까.
“얘들아, 너희 이따 생방 무대도 올라갈 거니까 머리 안 눌리게 조심하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잠깐 대기실 돌면서 인사드릴 거니까 다들 준비하자.”
신인에게는 빠질 수 없는 필수 관문, 바로 앨범 돌리기였다. 구시대 관습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문화 1순위였다. 연차 순으로 선배들의 대기실을 돌면서 사인시디와 함께 인사를 드리는 건데, 어제 앨범마다 맞춤형 멘트를 적느라 손이 빠질 뻔했다.
‘멤버가 7명이라 그나마 다행이었지.’
5명이던 티벡스 시절에 비하면 손이 둘이나 늘었으니 조금 나아지긴 한 셈이다. 원로가수 수준의 선배님 두 분께 먼저 인사드렸는데, 자녀분들이 크리드 팬이라며 반겨 주신 덕에 훈훈한 분위기였다. 심지어 각 멤버들의 이름을 다 알고 계셔서 더 신기했다.
어쩔 수 없이 티벡스 시절이 계속 떠올랐다. 대기실마다 인사를 돌릴 때면, 우리를 알아보는 가수들은 거의 없었다. 티멕스? 티벡시?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것은 물론이고, 대놓고 무시를 당하는 일도 수두룩했다.
한 번은 어쩌다 강도현네 그룹과 같이 대기실을 쓴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인사 온 후배 가수가 우리는 무시하고 포커스한테만 앨범을 전달할 적도 있었다. 심지어 티벡스가 먼저 데뷔한 선배임에도 말이다.
우리가 민망함과 분노로 가득 찼던 그 순간에도 강도현과 김병대는 보란 듯이 웃으며 후배 가수에게 덕담을 하고 있었다. 아마 그날 이후로 강도현과의 사이가 더 어색해지다 결국 연락이 끊겼지. 괜히 얄미워서 앞에 가는 강도현 뒤통수를 살짝 째려봤다.
그리고 다음이 바로 손혜연의 대기실이었다. 손혜연은 VM 소속의 솔로 가수로 나도 연습생 시절에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가끔 회사에 들를 때면 연습생들을 위한 간식을 쏴서 연습생들 사이에서는 그저 빛으로 불리고는 했다.
“와, 진짜 신기하다. 이렇게 인사드릴 날이 오네.”
“그러게, 그것도 너랑 같이.”
“전에 사주셨던 샌드위치가 진짜 맛있었는데-”
“대박, 샌드위치 하니까 바로 기억난다.”
마침내 데뷔했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그래도 이제는 강도현과 웃으면서 예전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반가움과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손혜연의 대기실에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인사드리겠습니다. 본 투 샤인! 크리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다들 반가워요. 특히 도현이랑 승빈이는 오랜만이네?”
“네, 선배님. 데뷔하고 인사드릴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나도 투마월 챙겨 봤는데, 승빈이는 그새 또 컸나 보네.”
“감사합니다!”
역시 한결같이 따듯한 선배였다. 사실 내 이름을 기억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처음 연습생을 시작할 때도 손혜연은 이미 탑가수였으니까. 항상 연습생들을 챙기기는 했지만, 개개인을 기억해 주다니 새삼 마음이 훈훈해졌다.
“아, 여기도 소개해 줘야지. 얘들아, 이리 좀 와볼래?”
‘얘들아? 누가 있는 거지?’
손혜연의 부름에 대기실 안쪽에서 서너 명의 남자가 나왔고, 다들 순간 말을 잃었다. 모두에게 익숙한 얼굴인 김병대의 등장 때문이었다.
“김병대?”
“안녕하세요, 유현이 형. 다들 오랜만이네요.”
“맞네, 병대는 너희도 다 알겠구나. 곧 우리 회사에서 데뷔할 친구들인데, 데뷔 전에 연습 겸 얼굴 알릴 겸 백업 댄서로 오늘 무대 한번 세우려고.”
하지만 내가 놀란 건 김병대 때문이 아니었다.
‘오재성?’
분명 저 사람은 이곳에 있을 수가 없는 티벡스의 전 멤버 오재성이었다. 네가 어떻게?
그리고 오재성과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상태창에 처음 보는 화면이 떠올랐다.
[!!!퀘스트 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