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125화 (125/346)

125화

“컷! 바로 다음 장면 넘어갈게요!”

컷 소리가 들리자마자 스탭들이 나에게 몰려들었다. 메이크업 수정에 머리 정리, 옷매무새를 다듬고 선풍기 바람까지 나 하나에 몇 명이나 붙는 건지. 웃긴 얘기지만, 오랜만에 겪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다음은 빛을 향해 질주하다가 넘어지는 장면이다. 머릿속으로 가사를 되새기며 촬영에 들어갔다. 강풍기가 앞에 있어서 제대로 눈을 뜨기도 힘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달렸다. 다치고 구르는 연기야 내 주종목이니 문제없었다.

데뷔작부터 사기당한 역할이었으니 인생의 고난을 표현하는 것 역시 식은 죽 먹기였다. 게다가 액션 영화 준비를 위해 액션스쿨을 다니면서 실감 나지만 다치지 않게 넘어지는 방법도 배웠다.

“아니, 승빈 씨. 연기는 또 언제 배웠어?”

“연습생일 때 잠깐 수업 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웬만한 연기자들보다도 나은데?”

“어휴, 감독님이 디렉을 잘 봐주셔서 그런 거죠.”

“그런가? 그래도 이렇게 척하면 척하기 쉽지 않은데. 신인답지 않네.”

회귀 전에도 나는 스텝들에게 평이 꽤나 좋은 편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거의 모든 장면이 NG 없이 바로바로 오케이를 받았거든. 오죽하면 내 별명이 ‘칼퇴 메이커’였을까.

그때는 내게 주어진 모든 기회가 너무나도 간절했다. 그래서 내가 나오는 모든 장면을 최대한 분석하고 상대방의 대사까지 달달 외울 정도였다. 2년 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말도 안 되게 많은 작품을 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연예X 티비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크리드 문승빈입니다.”

세트 구조를 바꾸기 위해 잠깐 주어진 쉬는 시간에는 연예 프로그램 인터뷰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촬영장 한편에 마련된 인터뷰 장소에 도착하니, 예상치 못한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승빈 씨. 오늘 인터뷰를 진행하게 될 리포터 솔지입니다.”

리포터 솔지, 본명 이솔지. 티벡스 시절 망돌이었던 우리에게 제대로 된 인터뷰를 진행해 준 유일한 리포터였다. 티벡스 때는 인터뷰 자체도 드물었지만, 그 몇 안 되는 인터뷰도 죄다 투마월에서 아쉽게 떨어진 지운이 형의 얘기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떨어졌을 때 심정은 어땠냐, 투샤인을 보면 어떤 기분이냐 같은 수준 이하의 질문들만 가득했다.

그런 와중에 솔지 리포터의 존재는 한 줄기 빛이었다. 자주 마주한 건 아니지만, 인터뷰마다 각 멤버의 TMI까지 알아 와서 질문하는 거였다. 아마 티벡스 소속사 사장도 그렇게 우리를 잘 알지는 못했을 거라고 장담한다.

내가 배우로 성공하고 나서 다시 마주했을 때도 자신이 더 뿌듯해하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사람이었다.

“솔지 씨, 조금 더 왼쪽으로 몸 틀어야 화면에 보여요.”

“앗, 넵! 알겠습니다!”

그때는 세상 능숙한 리포터였는데, 아직은 짬이 덜 찬 것 같았다. 다른 스탭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흠칫하는 모습이 티벡스로 갓 데뷔했을 때의 내 모습 같았다.

“제가 오늘 첫 인터뷰라… 최선을 다할게요!”

“네!”

완벽하진 않았지만 역시나 나에 대한 조사를 많이 한 것이 느껴지는 인터뷰였다. 티벡스 시절에도 다른 인터뷰어들은 ‘티벡스’를 검색하면 나오는 1페이지 기사 정도만 읽고 질문을 준비한 게 티가 났었다. 준비라도 했으면 감지덕지인 수준이었지. 그런데 내 유년 시절, 누나와의 일화, 투마월 때 이야기 등 질문에 공을 들인 게 느껴졌다. 몇 가지 질문은 나조차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일이어서 놀랐다.

“와, 그런 건 어떻게 아셨어요?”

“저 삼 일 밤새서 승빈 군 인터뷰만 준비했어요.”

“우와, 감사합니다.”

나의 반응에 이솔지는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인터뷰를 주도했다. 이렇게 재회한 것도 인연인데 그때의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 고민하다가, 다른 인터뷰에서는 얘기하지 않았던 과거 일화나 멤버들과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공개했다. 이렇게 하면 팬들 반응도 좋을 거고, 리포터 분의 업계 평판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게 분명했다. 물론 이런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자수성가해서 유명 리포터가 된 사람이었지만, 이렇게나마 그때의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훈훈한 분위기로 인터뷰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 한 스태프가 나에게 다가왔다. 후드티에 모자에 마스크까지 꽁꽁 싸맨 사람이었다. 조카가 정말 팬이라며 사인을 하나 부탁하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사인을 하고 다시 전달했다. 근데 갑자기 감사의 의미로 춤을 추겠다는 것이다 .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지?’

“아, 괜찮습니다. 이 정도… 저기요?”

아예 옆에 자리를 잡은 스태프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반인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뭐야, 춤을 왜 이렇게 잘 추시지?”

그러더니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다른 스태프들도 하나둘 나타났다. 그러더니 단체로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 안무, 너무 익숙하다. 신세계의 안무 중 일부였다.

“뭐, 뭐야?”

“서프라이즈!!!”

“으악!”

“완전 성공했다!”

너무 놀라 어버버하고 있는 나에게 멤버들이 달려들었다. 옆에 있던 리포터도 이 상황이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뭐야?”

“뭐긴, 뭐예요! 응원하러 왔죠~”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야?”

“너보다 우리가 먼저 와 있었을걸?”

이게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매니저 형을 보니, 옆자리의 다른 매니저를 가리키며 웃었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이미 현장의 관계자들은 크리드 멤버들이 방문하는 것을 사전에 안내받았다는 거다. 나와 리포터만 모르게 진행된 이벤트였다.

“완전 연기자던데?”

“맞아! 완전 프로 같았어.”

“백룡 영화제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진짜 내가 거기서 신인상 받았던 게 거짓말 같다…….’

“커피차 앞에 메뉴판도 우리가 쓴 거야.”

지운이 형의 말에 떠올려보니 웃음이 터졌다. 어쩐지, 들쑥날쑥한 글씨체에 준비하시는 분들이 꽤나 바빴구나- 생각했었는데.

“맞다, 리포터님께 인사를 못 드렸네. 우리 구호도 완성됐으니까 해보자!”

“둘 셋! 본 투 샤인! 안녕하세요, 크리드입니다!”

자리에 있던 나도 엉거주춤 일어서서 구호를 외쳤다. 솔지 리포터도 자리를 일어나 인사했다.

“승빈이 인터뷰하는 거 지켜보고 있었는데 엄청 준비를 많이 하신 게 느껴졌어요.”

“맞아요. 나중에 저희 단체 인터뷰할 때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럴 수 있으면 저는 너무 영광이죠-”

짧은 인사를 마치고 마지막 질문을 끝으로 인터뷰가 끝났다.

“승빈 씨가 바라는 Eternity, 영원함은 무엇인가요?”

“사실 영원한 건 없다고 믿어요. 모든 게 시간이 지나면 변하겠죠. 하지만 그 변하는 시간 속에서도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저한텐 최선이 영원함이 될 거 같네요.”

“최선이 영원함이라…….”

“너무 추상적인 대답이었죠?”

“아니에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향의 답이어서 조금 놀랐어요. 저는…….”

그때 인터뷰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관계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솔지 님도 수고 많으셨어요. 덕분에 편하게 인터뷰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오늘 긴장했던 것보다 더 편한 분위기에서 인터뷰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남은 뮤직비디오 촬영도 잘 마치시길 바라요. 노래 나오면 꼭 들을게요!”

“아, 감사합니다! 저희 크리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인터뷰 내내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멤버들도 일동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솔지 리포터는 조금 당황한 듯 연거푸 인사를 했다. 제3자가 보면 인사 배틀이라도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촬영이 재개됐다. 마지막 장면 촬영만 남았다. 멤버들이 있는 곳에 도착하고 뒤를 돌아보며 미소를 짓는 장면이었다.

“잘하고 와!”

“화이팅!”

감독님의 큐 사인과 함께 촬영이 시작됐다. 눈앞에 멤버들이 있다고 상상하면서 손을 내미는 연기를 하는데, 몰입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세 번 이상 재촬영을 하는 장면은 거의 처음이었다.

“뭔가 더 베스트가 나올 거 같은데…….”

감독님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때 촬영을 지켜보던 정유현이 감독님에게 무언가 제안하는 듯했다.

“음, 좋은 생각이네. 손만 나오면 되는 장면이니까.”

‘뭐지?’

“크리드 멤버분들 잠깐 이쪽으로 와주세요.”

“네!”

‘지금?’

설마 했던 게 현실이 됐다.

“멤버들이 앞에 있으면 더 몰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어때요 승빈 씨?”

“아… 네! 다시 해 보겠습니다!”

세팅도 되지 않은 사복 차림의 멤버들이 눈앞에 서 있었다. 선우 형과 강도현은 여전히 장난을 치고 있었고, 박재봉은 나름 진지하게 연기에 몰입하여 손을 내밀고 있었다. 윤빈 형과 지운이 형은 할 수 있다며 응원의 말을 보냈고, 정유현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행동은 각기 달라도 모두 활짝 웃고 있다는 것은 똑같았다.

항상 완벽하게 세팅된 모습으로만 들어왔던 공간인데, 내추럴한 멤버들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굳이 참지 않았다. 드디어 멤버들을 만났다는 기쁨과 안도감, 기대감이 담겨야 하는 장면이니까. 리더인 정유현의 손을 잡는 장면과 뒤돌아 미소 짓는 장면까지 감정을 이어가며 순조롭게 촬영을 마쳤다.

“컷! 너무 잘 나왔다!”

촬영감독의 상기된 목소리와 함께 촬영이 종료됐다. 다 같이 모니터링을 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배우 일을 하면서 수도 없이 여러 번 모니터링을 했는데도 마치 처음 모니터링하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니터에 담긴 내 모습에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웃는 얼굴은 또 처음이었다.

“진짜 잘 나왔다!”

“너 진짜 어디서 연기 배우고 온 거 아니야?”

“형, 전생에 배우였던 거 아니에요?”

“자꾸 띄어주니까 진짜 그랬을 거 같잖아- 혹시 몰라, 백룡 영화제에서 신인상 받았을지?”

투마월 때 하도 배우 같다는 말에 흠칫해서 그런가. 이제는 능숙하게 맞받아치는 경지에 올랐다.

“우리 뮤직비디오 촬영할 때 승빈이가 연기 선생님 해 주면 되겠네!”

“승빈스쿨 이제 연기까지 섭렵하는 거냐고.”

“강의료 내놔, 이놈들아.”

이렇게 시답잖은 농담을 하는 시간이 문득 소중해졌다. 이제 단체곡 뮤직비디오를 찍고 나면 정말 데뷔가 코앞이다. 앞으로는 상상도 못할 만큼 바쁜 일상의 연속이겠지. 배우로도 바쁜 생활을 보낸 적 있지만, 아이돌로서는 처음이다. 게다가 단체 생활이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하고 서로 배려해야 하는 순간이 오겠지.

그럴 때마다 오늘을 잊지 않을 것이다.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던 멤버들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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