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재킷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숙소 앞에 익숙한 무리가 보였다.
‘또 있네.’
사생들이다. 처음 크리드가 되고 사생이 생겼을 때는 부끄럽지만 사실 신기한 마음이 먼저였다. 그야 티벡스 시절에는 사생이 없었으니까. 아, 지운이 형은 있었다. 하지만 형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에게는 정말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 무관심해서 지운이 형 뒤에 선 나머지 멤버들이 민망할 정도였다.
“애들아, 안녕?”
익숙하다는 듯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다. 매니저와 정유현은 익숙하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고 다른 멤버들이 먼저 들어가게 했다. 그때 전혀 예상도 못 한 돌발 상황이 터졌다.
“안녕하세요!”
윤빈의 해맑은 대답에 다들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윤빈이 볼살 다 빠진 것 봐- 밥 잘 먹고 다니는 거지?”
“네, 저 오늘 두 그릇…….”
가까이 다가온 사생이 윤빈의 볼에 손을 대려는 순간 매니저가 저지했다. 순식간에 냉랭해진 분위기에 매니저는 멤버들을 먼저 들여보냈다. 박재봉이 윤빈의 옆구리를 찌르고 끌고 왔다. 끌려가면서도 형은 신경 쓰였는지 계속 뒤를 돌아봤다. 저 큰 덩치로 제일 작은 애한테 휘둘리는 게 볼 때마다 적응 안 되네.
“아, 팔 놓으라고요.”
“오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기다리다가 사리 나오는 줄 알았잖아.”
“잘 가~”
“야, 정유현 방금 표정 봤냐? X나 누구 하나 죽일 듯?”
“유현이는 그 맛에 덕질하는 거 아니냐고-”
“얘 X나 변태 새X라니까?”
사진과 영상을 찍으며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끊이지 않았다. 다들 속으로 열을 받았겠지만 표정이나 말로 티 내지는 않았다. 괜히 꼬투리 잡히면 피곤해진다. 저 인간들은 자기 최애가 망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경쟁자가 줄어들고 독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할 거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강도현이 진절머리 난다는 듯 불평했다.
“진짜 징하다. 너, 그 빨간 머리 한 애 알지?”
“응.”
사생 무리 중에는 강도현을 연습생 시절부터 따라다닌 사생이 있었다. 그때도 출근, 퇴근 시간마다 사옥 앞에 죽치고 앉아 기다리면서 멋대로 사진을 찍고 성가시게 했었다.
“윤빈아, 넌 들어가서 얘기 좀 하자.”
정유현의 목소리가 사뭇 가라앉아 있었다. 윤빈 형은 박재봉에게 옆구리를 찔릴 때부터 이미 풀이 죽어 있었다.
“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선우 형이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시도했다.
“아이, 이번이 처음이기도 하고…….”
“무슨 소리야, 지난번에도 인사 받아 주고 사진도 찍어서 얼마나 놀랐는데.”
“아… 혼날 만하네.”
사실 윤빈 형의 사생에 대한 거리 조절 실패는 전부터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가 숙소에 입주한 바로 다음 날부터 사생이 있었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멤버들은 시종일관 ‘먹금’으로 대응했지만, 윤빈 형은 스스럼없이 대화를 하거나 사인 요청에 응하는 거 아닌가. 다들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형의 행동에는 악의가 없었다. 너무 순수해서 문제였지. 당연히 소속사에서 사생과 관련된 행동 지침을 교육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하긴, 정유현과 나, 강도현 빼고는 다들 중소 혹은 좆소 소속사였으니까.
코어 엔터도 당연히 원소속사에서 관련된 교육을 받았으리라 생각했는지, 사생과 관련된 자세한 지침이 없었다. 이미 서바이벌로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지라 일반 연습생과는 다른 위치인 점도 한몫했고 말이다.
윤빈 형은 잔뜩 쫀 고슴도치가 되어 거실에서 정유현과 나에게 면담을 받았다.
“내가 지금 너하고 이러는 건 일방적으로 혼내려고 하는 거 아니야.”
“네.”
“하지만 혼내는 건 맞아.”
“네… 네?”
“형, 사생한테는 최대한 반응 안 하는 게 제일 좋아요.”
“그치만, 저를 응원하는 사람이잖아요.”
“뭐?”
“네?”
윤빈 형의 대답에 정유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리고 동시에 회귀 전 사건이 떠올랐다.
[투샤인 윤빈, 사생과의 열애?]
투샤인 윤빈이 열애설에 휩싸였다. 상대는 윤빈의 사생팬으로 알려져 더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글에는 어두운 밤거리에서 윤빈이 한 여성과 다정하게 사진을 찍는 모습과 둘의 대화를 담은 음성이 공개되었다. 누리꾼들은 ‘사생과의 연애라니 신선하다. 제정신은 아닌 듯?’ 등의 반응을 보였다. 투샤인은 현재 2집 ‘Everything’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윤빈의 열애설이 투샤인의 성공 가도에 영향을 줄지 귀추가 주목된다.
형이 사생의 사진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찍어 준 것을 전후 상황은 잘라먹고 올린 것이었다. 대화 녹음 내용 역시 사생이 물어본 것에 평소처럼 답한 게 전부였다. 이때 포털 사이트 검색어는 하루 종일 윤빈 형의 이름으로 가득했다. 팬덤은 하루 종일 윤빈을 품겠다는 입장과 탈퇴하라는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한마디로 쑥대밭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온 기사의 헤드라인은 더 충격적이었지.
[비뚤어진 팬심이 빚어낸 비극… 투샤인 윤빈 응급실행]
투샤인의 멤버 윤빈이 금일 사생팬의 습격으로 인해 부상을 입고 응급실에 입원한 상태이다. 현장에서 체포된 가해자는 최근 불거진 윤빈의 열애설로 인한 질투심으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내가 이 사건을 왜 기억하느냐, 당시 윤빈의 인터뷰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방식은 다를 뿐, 저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마음은 똑같다고 생각했어요.]
[의심하고 싶지 않았어요. 의심하기 시작하면 저를 정말 좋아해 주시는 팬들한테도 ‘설마?’ 하는 마음이 생길 테니까요.]
당시 망돌 생활에 비관하며 살던 중 읽은 인터뷰였다. 정말 보기 드물게 순수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정을 의심하고 싶지 않아서 모든 팬심을 포용하겠다니. 저런 케이스를 이미 여럿 봐서 더 안타까웠다. 데뷔 초에는 누구보다 반짝이는 눈을 가져서 큰 사랑을 받았던 아이돌이 온갖 사생의 만행에 멘탈이 갈리고, 일반 팬들까지 경계하면서 ‘빠혐 논란’까지 발생한 일이 이 판에는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윤빈 형의 진심이 너무 아까웠다. 그 진심을 비웃고 파괴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하등의 타격이 되지 않는 정직함이었다.
[그래도 건강한 마음으로 절 좋아해 주는 분들이 더 많다는 걸 알아요. 아직 이곳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팬분들께 걱정을 끼쳐서 너무 죄송해요.]
그때는 그냥 특이한 사람이다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지극히 윤빈 형다운 대답이었다.
‘앞으로 전담 마크 해야겠네.’
크리드가 되면서 달라진 미래 중 하나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충분히 반복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사이 정유현은 무슨 초등학생에게 사칙연산 설명하듯 하나하나 설명해 주고 있었다.
“윤빈아, 아무리 팬이라고 해도 널 건전하게 사랑해 주는 사람이랑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해.”
“하지만 그러면 차별하게 되잖아요.”
“사생들과 일반 팬분들의 사랑을 동일하게 생각하면 그게 진짜 차별이지, 윤빈아.”
“…….”
간단명료하고도 명쾌한 해답이었다. 다른 팬이라고 좋아하는 가수의 일거수일투족이 안 궁금할까? 하지만 적어도 지켜야 하는 선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생짓을 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동일하게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기만이었다.
그리고 이런 거창한 이유 말고도 더 있다. 사생과 엮인다? 아이돌 생활 내내 꼬리표로 달리고 그룹 자체에도 악영향이다. 솔직히 이게 제일 큰 이유긴 했다.
“그리고 네 안전을 위해서도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건 위험해.”
“네.”
“앞으로 크리드로 데뷔하면 지금보다 더 심해질 거야. 그러면 네가 더 이상 감당 못 할 상황이 올 거고.”
밤이 새도록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다행히 윤빈 형도 우리가 걱정하는 바를 잘 이해했다.
이후 숙소나 소속사 근처에서는 멤버들이 돌아가며 윤빈 형을 지켜봤다. 사생이 말을 걸거나 가까이 오려고 하면 먼저 형을 안쪽으로 밀어 넣거나, 오디오가 물리게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내가 밉보이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짹짹이 실트 때문이었다.
[문승빈 목소리]
[문승빈 셀카]
[문승빈 강아지]
‘연검이 개판 났나 보군.’
실트에 이름과 함께 온갖 단어가 붙어서 올라온다면 연검 정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고, 필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검색창에 문승빈을 쳐 보니 별게 다 나왔다.
[문승빈 빠혐]
[문승빈 정색]
[문승빈 인성]
“이게 무슨…….”
안티들과 견제 팬덤에서 악의적으로 연관 검색어를 오염시키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대부분 외모에 대한 비하나 성희롱이었다. 빠혐이나 인성과 관련해서 올라온 건 처음이었다.
호기심 반 어이없음 반, 무슨 일인지 한번 보기나 하자라는 마음으로 [문승빈 빠혐]을 검색했다. 그리고 보게 된 글에 헛웃음이 나왔다. 보통 관종 사생이 아니었다. 대놓고 에스크에서 써방(써치 방지)도 없이 사생 관련 질문에 답을 하고 있었다.
@fxxxxu_m
[엄마, 근데 클이드 중에 누가 제일 빠혐 심해?]
-문승빈ㅋㅋㅋㅋㅋ지 보러 간것도 아닌데 견제 지리게 함... 윤빈이 옆에 ㅈㄴ붙어있음ㅋ 정색하고 째려보는데 지릴 뻔했잖아ㅠ
[승빈이 빠혐 진짜 심해? 나 애 인성으로 입덕했는데ㅠㅠㅠ]
-문승빈을 인성으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정병먹고 망령되기 전에 탈빠하길 추천함.
[법규웅니, 크리드 연애 하는 애들있어? 나 이거 답변 받기전까지 잠 못자ㅠㅠ]
-없겠냐? 일단 문승빈 여미새임ㅇㅇ
“이거 완전 악질이네.”
계정에 올린 숙소 앞 사진이 찍힌 구도를 보니 그 무리가 확실했다. 연애와 인성이라는 민감한 주제로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니 더 괘씸했다.
저런 말을 누가 믿을까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많은 팬들이 사생의 말에 흔들리고 있었다. 하긴, 못 보던 사진을 들이미니 혹할 수밖에.
* * *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안무 연습을 마친 후 숙소로 향했다. 그새 비가 왔는지 바닥에 물이 고여 있었다. 오랜만에 매니저 없이 다니는 길이었다. 나와 지운이 형, 윤빈 형은 숙소 근처 공원에서 잠시 산책하기로 하고, 나머지 넷은 먼저 숙소로 돌아갔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모자와 마스크 없이 밖에서 얘기를 나눴던 것 같다.
“우리 셋이서 새벽 산책은 거의 처음이지?”
“그쵸. 제가 워낙 운동 안 좋아하니까.”
“하하, 앞으로 자주 같이 하자. 기분 전환도 되고 좋아.”
1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웬일로 사생 무리가 보이지 않았다.
“하긴, 거의 2시가 돼 가는데 있는 게 이상한 거겠죠?”
경계심을 풀고 숙소에 거의 도착할 무렵, 1층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평범한 의상, 하지만 독특한 무늬의 초록색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여자는 우산 앞코를 바닥에 툭툭, 두드리며 1층 로비 입구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웃 주민인 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던 찰나, 머릿속에 사진 하나가 떠올랐고 나는 곧바로 윤빈을 뒤로 숨겼다.
윤빈 습격 사건의 용의자가 체포된 날 찍힌 기사 사진 속 초록 우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