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오랜만에 연습실을 벗어나 숍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다들 가벼웠다. 반쯤 졸면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고 바로 인근에 위치한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소속사가 좋은 곳에 위치하니 이것도 장점이었다. 숍이나 촬영장이 대부분 소속사 인근에 위치해 있어서 편했다.
“안녕하십니까, 크리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크리드 여러분, 반갑습니다.”
역시 대기업이라 돈 좀 썼구나. 프로필 사진 촬영임에도 유명 작가를 섭외해 왔다.
“들으셨겠지만 오늘은 포털이나 기사에 올라갈 첫 프로필 사진을 찍을 겁니다.”
다들 바뀐 머리로 처음 찍는 사진이었다. 사실 뮤비 촬영이 아직 남았는데 왜 벌써 염색을 했을까 의아하긴 했다. 근데 들어 보니 지금 이것도 촉박한 일정이란다. 티벡스 시절에는 체계라는 게 없었기 때문에, 프로필 사진? 뮤비 찍는 날 한쪽에서 앨범 재킷 사진 찍고, 그거 그냥 그대로 잘라서 프로필 사진으로 썼다.
‘이쯤 되면 티벡스는 대체 뭐 하는 그룹이지?’
아이돌로의 두 번째 데뷔가 아니라 그냥 처음 데뷔하는 것만 같았다.
“의상은 두 벌을 입게 될 거예요.”
시안으로 보여 준 콘셉 역시 두 가지로 상반된 느낌이었다.
“우선 첫 번째는 클래식이죠. 흰 티에 청바지입니다.”
역시 고전은 어디 안 간다. 흰색 반팔 티셔츠에 연청색 청바지를 매칭해서 깔끔하면서도 깨끗한 이미지를 연출했다. 배우 프로필을 찍을 때도 딱 이 착장이었다.
“두 번째는 성숙함을 보여 줄 수 있는 수트입니다.”
“우와, 수트!”
“재봉이는 수트 입은 적이 없었나?”
“네, 경연 의상 중에도 없었어요.”
박재봉이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하긴 열여섯이 수트를 입을 일이 있겠는가. 그나마 비슷한 옷으로는 교복밖에 입은 적이 없을 거란 걸 생각하니 조금 귀여웠다.
“크리드 멤버분들 잠시 모여 주세요-”
“네!”
세팅을 모두 마치고 촬영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팬 매니저의 부름이 있었다. 가 보니 작은 셀프 캠코더를 내밀었다.
“가위바위보로 오늘 셀프캠 촬영자를 뽑을게요.”
일곱 명이어서 가위바위보를 한 번 해도 두 그룹으로 나눠야 했다. 각 그룹에서 한 명씩 선발했는데 나와 윤빈 형이 뽑혔다.
“촬영 중간중간 모습 찍어 주시면 돼요. 작동법은 투마월 때 써 봐서 알죠?”
“네!”
마침 정유현을 시작으로 촬영이 시작됐다.
“와, 진짜 잘생겼네-”
촬영 현장의 스태프들과 감독도 정유현의 비주얼에 감탄했다. 연습생 때 프로필 사진을 찍어 본 적이 있나? 정유현의 촬영 과정을 보는데 역시 능숙했다. 찰랑거리는 흑발이 잘 어울렸다.
“앉아서도 찍어 볼게요!”
“네.”
다양한 포즈를 요구하는데 모두 정석적으로 소화했다.
‘아이돌 안 했으면 배우해도 손색이 없었겠다.’
비주얼적인 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돌과 배우가 가지는 분위기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정유현은 두 가지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사이 나는 셀프캠으로 촬영 현장을 담았다.
“첫 순서로 유현이 형이 촬영하고 있어요.”
‘정유현보고 형이라고 하려니까 어색하네.’
“역시 첫째답게 너무 잘하네요.”
“유현이 형 진짜 잘생겼죠?”
“그니까요. 부러워”
“왜- 승빈이도 잘생겼는데.”
‘그래도 잘생긴 사람한테 잘생겼다는 말 들으니까 기분은 좋네.’
“어? 근데 지운이 형, 곧 촬영 아니에요?”
말하기 무섭게 형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차지운 군, 촬영 시작할게요!”
“저는 그럼 촬영하러 갈게요! 안녕~”
지운이 형은 초반에는 어색해 보였지만, 스태프분들과 감독님이 분위기를 풀어 주면서 점점 적응해 갔다. 중간중간 모니터링을 하는 타이밍에 맞춰 지운이 형에게 몇 가지 포즈와 팁을 알려 줬는데 이 모습도 셀프캠에 담았다.
“손이 어정쩡한 거 같으면 허리춤이나 주머니에 손가락 몇 개 정도만 얹어 두는 것도 좋아요. 아니면 아예 앉아서 무릎 껴안는 자세도 괜찮고.”
“이렇게?”
“네!”
역시 피지컬이 좋아서 그런가, 대충 포즈를 잡아도 모양이 나왔다.
“그리고 형은 눈이 무쌍에 길게 뻗었으니까… 약간 웃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무표정으로 있으면 너무 세 보이지?”
“조금……?”
“하하, 아무튼 고마워. 이번에도 승빈 스쿨 도움받았네.”
“되게 오랜만에 듣네요?”
형이 닮은 동물로 여우가 손꼽히는 가장 큰 이유다. 일반인보다 1.5배 정도 긴 눈을 가졌는데 앞뒤로 시원하게 트인 게 부러웠다.
“지운 군, 촬영 다시 시작할게요!”
“네-”
“잘하고 와요.”
말로만 한 조언이어서 잘 소화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내 예상보다 더 잘 해냈다. 지운이 형의 장점 중 하나인데 습득력이 무척 빠르다는 것이다. 특히 무릎을 안고 살짝 곁눈질로 웃는 사진은 베스트 컷이었다.
“오, 지운 씨 첫 번째 촬영보다 더 늘어서 왔는데? 족집게 과외라도 받았나?”
“하하, 감사합니다. 승빈이라는 친구가 많이 도와줬어요.”
“사진을 여러 번 찍어 본 친구인가 보네- 아, 해빈 작가 동생이지?”
이미 업계 내에서도 문해빈 동생이라는 것이 퍼졌나 보다. 하긴, 대한민국 국민 반의반쯤은 럽스타그램 사건을 알고도 남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선우 형의 촬영까지 끝나고 내 차례가 왔다. 셀프캠은 박재봉에게 맡기고 촬영을 시작했다.
“이 친구는 이미 프로네-”
정자세와 측면을 강조한 포즈, 앉은 자세까지 다양하게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조명을 최대한 활용했다. 각도를 잘 맞추면 자연광을 받는 듯한 사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명 활용하는 친구는 처음인데, 프로필 촬영 해 봤어요?”
“아니요, 이번이 처음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 왔나 보네, 아니면 이런 것도 유전인가?”
‘내가 찍은 사진 보면 기겁하겠네.’
다행히 누나와 같이 작업을 해 봤던 분이었다.
“누나 닮아서 촬영장에서 긴장 안 하네요?”
“하하, 저희 누나도 그런가요?”
“보통 톱스타들이랑 촬영하면 알게 모르게 기 싸움이 있는데 한 번을 안 지더라고. 그렇다고 기분 나쁘게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잘 구워삶는다는 거구만.’
나도 그렇지만 누나가 한 수 위였다. 어쨌든 덕분에 인맥 하나 만들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중에 만나면 고기라도 사야겠다.
“너무 잘 찍어서 그런데 나중에 내 스튜디오 와서 사진 찍고 갈래요?”
“아유, 저는 너무 영광이죠.”
“승빈 군도 촬영 끝났어요. 수고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 * *
점심시간을 가진 후 두 번째 콘셉트 촬영이 시작됐다.
“와…….”
윤빈 형이 나오자마자 모두 입이 떡 벌어졌다. 흰 티에 청바지에서도 빛나는 피지컬이었지만 수트를 입으니 확실히 더 태가 났다.
“왜, 왜? 나 뭐 잘못했어?”
갑작스러운 반응에 윤빈 형은 자신이 뭐 잘못한 게 있냐며 어리둥절했다.
깔끔하게 톤 다운된 네이비색 수트를 입었는데 어깨가 넓고 골반이 좁은 어넓골좁의 정석이었다. 바뀐 머리 때문에 묘하게 날티가 나는 것도 잘 어울렸다.
“선우 씨부터 촬영 시작할게요!”
“네-”
촬영은 무대 위 배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원형의 조명 사이에 들어와서 찍는 콘셉트였다. 금발로 바꾼 머리색이 조명을 받으니 반짝였다. 촬영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진지한 콘셉트는 처음이라서 잘 못하면 어쩌냐고 호들갑을 떨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무대 위와 아래의 갭 차이가 사진을 찍을 때도 나오는 것이다.
특히 선우 형은 키가 큰 슬렌더 체형이어서 옷 핏이 좋은 멤버 중 하나다. 소위 ‘옷걸이가 좋다’는 표현과 가장 잘 어울리는 몸이다. 게다가 얼굴도 소멸 직전으로 작으니, 비율도 남달랐다.
“얼굴이 무슨… 면봉이야?”
“하하하!”
촬영 감독이 무의식적으로 한 말에 모두 웃음이 터졌다. 내내 냉한 표정으로 촬영을 하던 선우 형도 배를 쥐고 웃었다. 면봉이라니. 근데 그 말을 듣고 선우 형을 보니 정말 면봉이었다. 비정상적으로 작은 얼굴에 기다란 슬렌더 몸까지. 앞으로 놀릴 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아, 감독님! 감정 다 깨졌어요-”
“미안해요. 근데 얼굴이 진짜 너무 작잖아!”
“나 선우 형 오늘부터 면봉으로 저장할래.”
강도현은 눈물을 닦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박면봉]
“원래는 뭐라고 저장했었는데?”
“나? 크리드 박선우”
“헐, 형 완전 정 없어요.”
“왜? 안 헷갈리고 좋잖아.”
“설마 저는 뭐라고 저장했어요?”
“너? 크리드 박재봉.”
“헐.”
뭐가 문제냐는 강도현의 반응에 박재봉이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왜 정 없게 성 붙여요! 그리고 이름도 바뀌었는데.”
“아, 맞네. 그럼 크리드 이든 박 어때.”
“아, 뒷골 땡겨.”
“넌 아직 어린 애가…….”
이 장면도 다 녹화되고 있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둘이 아웅다웅거리는 사이 선우 형의 촬영도 끝나고 윤빈 형의 차례가 왔다. 카메라 앞에 서자 촬영 감독도 감탄사를 외쳤다.
“이 친구는 피지컬이 진짜 좋네! 모델해도 되겠어.”
촬영 감독의 칭찬에 윤빈 형은 역시 특유의 친화력으로 받아쳤다. 첫 번째 촬영에서는 소년미를 보여줬다면 이번 콘셉트에서는 시크하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프로필 공개되면 클로버들이 진짜 좋아할 거 같아요. 그죠, 재봉 씨?”
“맞아요. 새로운 모습 보여 드릴 생각에 너무 기대가 됩니다!”
녹화 중지 버튼을 누른 박재봉이 물었다.
“근데 너무 어색하지 않아요? 아직 셀프캠 적응이 안 됐나?”
“그러게. 우리 너무 격식 있게 하는 거 같아.”
“말을 놓을까요?”
“형은 붙이고?”
“아, 당연하죠!”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였다. 하긴, 이렇게 셀프캠을 찍게 하는 건 리얼리티도 리얼리티지만 얼마나 서로 잘 지내는지 보여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
편하게 하되 긴장은 늦추면 안 되는 게 셀프캠의 묘미였다.
“승빈 군 촬영할게요!”
“네!”
이번 촬영도 무난히 마쳤다. 특히 그림자를 활용할 수 있어서 더 재밌게 촬영에 임했다. 일단 이 포즈 저 포즈 다 해 보니 촬영 감독님도 더 열정적으로 촬영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재봉 군 촬영할게요!”
촬영 전부터 포즈 연구를 하던 박재봉이 카메라 앞에 섰다.
“막내라 아직 애기티가 남아 있네.”
그 말을 듣고 약간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열심히 인상을 쓰고 어른스러워 보이려는 게 눈에 보였다.
“재봉 씨, 너무 어른 같아 보이려고 하지 말고 몸에 힘 좀 풀고 찍어 볼까요?”
“네, 네!”
“아직 열여섯이니까 지금 나이에만 할 수 있는 모습이 있잖아요. 재봉 군 내면의 성숙함을 보여 줄 수 있는.”
업계에서 유명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평판이 좋으니 계속 일이 들어오는 거겠지. 감독의 조언에 박재봉도 긴장을 풀고 편하게 촬영에 임했다. 결과물도 만족스러웠다.
“재봉이 으른이네, 으른.”
“그니까. 이거만 보고 누가 재봉이 귀엽다고 하겠어?”
“너무 잘 나왔네-”
촬영이 끝나고 다들 일부러 조금 더 과장되게 칭찬을 했다. 그새 자신감이 생긴 건지 박재봉의 얼굴에도 웃음이 서서히 지어지고 있었다.
빵긋 올라간 광대가 박재봉의 기분을 알려 주는 레이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