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그 후로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들 기절하듯 잠들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었던 작업실에 마침내 도착했다.
“여러분, 다들 잘 지냈어요?”
“안녕하세요, 크리드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미래가 불투명한 연습생에 불과했는데, 크리드라고 우리를 소개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와, 그새 더 잘생겨졌네. 이제 다들 진짜 연예인 같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반가운 얼굴, 작곡가 팀 스노우튠이었다.
“저희가 진짜 조르고 졸라서 여러분 타이틀을 맡게 되었어요.”
“헐, 정말요?”
“왜, 재봉이 맘에 안 들어?”
“그럴 리가요!”
진짜 박재봉은 뭐 하는 애일까. 모두가 박재봉을 놀리고 싶어 안달 난 느낌이었다. 언제 또 저렇게 친해진 건지 작곡가 형 누나 모두 막내동생처럼 재봉이를 대하고 있었다.
“재봉이 맘에 들려면 우리 열심히 해야겠다.”
“그러게. 분발하자 우리.”
“아, 형!”
“알겠어, 알겠어. 그만할게.”
덕분에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편해졌다. 타이틀곡을 처음 듣는 자리라서 다들 긴장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노래는 두 가지를 준비해 봤어. 우리는 둘 다 좋아서 멤버들이 골라 보면 어떨까 싶어서.”
“두 곡이나요?”
“와, 영광이에요.”
두 곡이나 우리를 위해 준비하다니, 솔직히 좀 감동이었다. 게다가 타이틀곡을 직접 골라 볼 수 있다는 건 신인에게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스노우튠이 투마월, 그리고 크리드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첫 번째는 ‘더 샤인’이라는 노래야.”
역시나 같은 노래인가. 제목만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작은 희망을 걸어 봤지만-
[상상만 했던 이야기
그 이야기 속 주인공
이제는 현실이 돼
빛날 시간이야 Shine Shine]
투샤인의 데뷔곡이었던 그 노래가 맞았다. 다시 들어도 정말 명곡이었다. 단순히 투샤인의 노래라서 부러워했던 게 아니라 노래 자체가 좋은 게 맞았다.
“작곡가님, 천재세요?”
“노래 진짜 대박인데요?”
“미쳤다.”
다른 멤버들의 감상도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였다. 도입부부터 리듬을 타더니 노래가 끝나자마자 다들 앞다투어 노래에 대한 감상을 내뱉었다.
“이 노래로 가시죠!”
“뭐 하러 둘이나 준비했어요? 이거면 끝났는데.”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좀 더 있으면 아주 작곡가를 가마라도 태울 기세였다.
“그 정도야? 그럼 너희 두 번째 들으면 아주 기절하겠는데?”
“뭐야, 이거보다 더 좋을 수가 있다구요?”
“에이 설마-”
“저 벌써부터 김칫국 드링킹 합니다?”
멤버들의 장난에도 변함없이 당당한 스노우튠을 보니 두 번째 노래가 벌써 기대됐다. 사실 ‘더 샤인’과 비슷하게 좋기만 해도 무조건 그 노래를 밀어붙일 거였다.
“두 번째 노래는 ‘신세계’, 부제는 ‘눈부셔’랑 똑같이 ‘New World’야.”
“오, 제목부터 벌써 비장한걸요?”
[마침내 만들어 낸
새로운 세계
아니 어쩌면
이제야 발견한]
[어텐션 주목해
이곳의 판도를 바꿔
느껴 봐 어서 올라타
이 새로운 흐름에]
“돌았다.”
도입부터 말 그대로 찢었다. 노래가 다 끝날 때까지 겨우 참고 있던 첫 번째 노래와는 다르게 다들 첫 소절부터 감탄사를 내뱉었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거였다. 그 정도로 좋았다.
‘더 샤인’보다 좋은 곡이 나올 수 있을까? 의심했던 것이 무색했다. ‘더 샤인’이 청량을 강조했다면, ‘신세계’는 청량함은 기본 베이스로 하고 리드미컬함이 더 강조된 곡이었다. 약간 애니메이션 OST 느낌이 드는데, 듣는 내내 어깨가 들썩이는 걸 참을 수 없었다.
[Welcome to my New World
우리의 속도를 따라 뛰어
그 어떤 어둠이 뒤쫓아 와도
절대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아
그 어떤 상식과 이론도
이곳 신세계에선 쓸모없지]
아이디와 이드, 새로운 자아를 가지는 크리드의 세계관과도 잘 어울리는 가사였다. 세계관을 가진 그룹에게 첫 곡은 그룹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신세계’에 대한 애정이 더 커졌다.
[To My World
To To My New World]
투마월로 시작해서 뉴월드로 마무리되는 마지막 소절까지 완벽했다. 오로지 투마월 데뷔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노래였다.
“어때?”
“지금 어떠냐고 물어보신 거예요?”
“그걸 물어봐야 아세요? 이거 저희 겁니다. 무조건 저희 주세요!”
“저 진짜 너무 좋아서 소름 돋았어요.”
‘왜 이 노래 대신 더 샤인을 골랐던 거지?’
쏟아지는 극찬을 들으며 머릿속에 의문이 차오를 때쯤, 바로 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건 사실 도현이랑 선우가 했던 ‘항해의 시대’ 무대 보고 만들었던 노래야.”
“네? 저희 무대를 보고요?”
“어, 그 무대에서 너희 둘의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바로 영감받고 비트를 짰는데, 데뷔조에 너희 둘이 다 있어서 바로 가사 붙이고 이걸 데뷔곡으로 추천했지.”
“대박이다.”
그 말을 듣고 노래를 곱씹어 보니, 작곡가님들의 말대로 ‘항해의 시대’의 느낌이 나는 것만 같았다. 특히 랩 파트에 빠른 비트와 느린 비트가 섞여 있는 게 박선우와 강도현에게 딱이었다. 가이드 버전이었지만 이미 머릿속에서는 저 둘이 어떻게 소화해 낼지가 그려졌다.
“게다가 이거 비트만 먼저 찍어 두고, 탑라인 멜로디가 안 나와서 버릴까 했는데-”
“헐, 어떻게 이런 노래를 버려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재봉아. 그러다가 파이널에서 승빈이가 페이스 체인에 긁혀서 피가 났잖아. 거기에 꽃을 반창고로 붙인 거 보고 삘 와서 멜로디 짰잖아. 그 장면 이후로는 파이널 더 보지도 못하고 바로 녹음까지 다 했어.”
…예?
“뭔가 좀 이상한데요?”
“영감을 특이한 곳에서 받으시네요.”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는 나를 대신해서 다른 멤버들이 내 감상을 그대로 말해 줬다.
‘삘 받을 게 따로 있지.’
“아니, 잘 들어 봐. 이거 가사가 위기를 이겨 내고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는 얘기잖아. 승빈이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든 거 같아서 거기에 영감을 받은 것 같아.”
“역시 작곡가 겸 작사가시네요. 그렇게 말하니까 또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선우야, 파트가 사라지고 싶니?”
“그럴 리가요. 역시 예술가다우십니다.”
재빠르게 태세 전환 하는 선우 형의 모습에 다들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이 노래야말로 정말 너희를 보고 만든 노래라서 감회가 새롭다. 그래서 일부러 부제도 뉴월드라고 붙였어. ‘눈부셔’랑 똑같은 부제지만, 이제는 진짜 너희만의 세계를 만들어 갈 거니까.”
“저는 없잖아요!”
삐졌다는 듯이 장난치는 박재봉이었다.
“이제 재봉이랑 다른 멤버들이 이 노래를 완성시켜 줘야지.”
“형, 이쯤 되면 작곡하실 게 아니라 영업을 하셔야…….”
“작곡가가 얼마나 영업직인지 모르는구나.”
지금까지 예술가 같았던 그의 얼굴에 순간 직장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과거에는 이 노래가 아예 없었겠구나.’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나는 그냥 과거로 돌아온 게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겪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일단 너희는 신세계가 더 마음에 든다는 거지?”
“네!”
“그럼 타이틀곡 선정 회의에서 강력하게 밀어붙여 볼게.”
“감사해요!”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타이틀곡과 앞으로 활동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타이틀곡 확정되면 녹음할 때 또 만나자!”
“네! 다음에 봬요!”
작업실을 나오는데 오랜만에 상태창이 반짝였다.
‘설마 노래창인가?’
확인해 보니 정말 노래창이 등장했다. 이렇게 되면 타이틀곡을 미리 알 수 있는 건가 기대했지만,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태창이었다.
[제목: 더 샤인(The Shine)]
-노래: ■■□□□
-안무: □□□□□
[제목: 신세계(New World)]
-노래: ■□□□□
-안무: □□□□□
‘노래 두 개가 다 뜬다고?’
데뷔곡도 이렇게 빡빡하게 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데뷔하면 상태창은 사라질 텐데? 하여간 누가 설계한 상태창인지는 모르겠다만 마음에 안 드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조금 특이한 건 ‘더 샤인’이 이미 두 칸이 채워졌다는 거였다. 이미 알고 있는 노래여서 기본적으로 노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인가? 이런 거라면 ‘더 샤인’을 하는 게 나에겐 수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연습실에 돌아와 두 곡의 가이드 버전 음원을 여러 번 들었다. 아직 제대로 된 파트 분배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메인 보컬 파트에 대한 연습은 미리 해 두면 도움이 될 거였다. 정식으로 포지션이 나뉘지는 않았지만 다들 크리드의 메인 보컬은 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노래를 먼저 연습할지 고민이 됐다. 노래창에 두 곡이 다 떴다는 건 분명 둘 다 데뷔 앨범에 실린다는 소리였다. 아마도 타이틀곡으로 뽑히지 못한 곡은 수록곡으로 담기겠지.
‘신세계가 되어야 하는데-’
더 샤인이 내게 더 유리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노래창이야 연습해서 채우면 그만이었다. 그보다는 투샤인의 흔적을 최대한 지우는 게 나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였다.
신세계, 얼마나 좋은 제목인가. 투샤인의 세계를 뺏는 게 아니라 크리드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싶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노래에 대한 습득이 우선이었다. 신세계는 전체적으로 대중적인 노래였다. 스노우튠이 타이틀로 밀기 위해 작정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지리스닝의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로지 한 부분, 후반부 하이라이트만 3단 고음으로 이뤄져 있었다. 대중적이지만 퍼포먼스적으로도 임팩트를 주기 위해 일부러 노린 구간이 분명했다. 그러면 내가 확실하게 살려 드려야지.
‘애드리브 라인이 되게 특이하네.’
게다가 단순히 음이 높기만 한 게 아니라 악보에 적힌 음표가 많았다. 3단 고음을 향해 가는 바로 앞부분 멜로디가 여간 복잡한 게 아니었다.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걸 내가 제대로만 소화한다면 분명 이 노래가 타이틀이 될 거였다. 더 샤인은 분명 명곡이지만, 이 파트를 뛰어넘는 임팩트 있는 파트가 없었다.
그렇게 악보를 뜯어먹을 듯이 집중해서 봤다. 하지만 계속 악보만 보고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올 거 같아서 일단 가이드 버전 파일을 다시 재생시켜 봤다. 특이하게도 스노우튠은 매번 초안을 자기들이 직접 녹음해서 들려줬다. 솔직히 훌륭한 노래 실력은 아니지만, 노래를 만든 사람이 직접 부른 거라 확실히 이해도가 남달랐다.
소절별로 끊어서 연습을 시작했다. 모든 연습이 그러하듯 시작은 카피부터였다. 최대한 가이드 버전과 비슷하게 부르려고 했더니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노래창이 한 칸 더 채워졌다.
[제목: 신세계(New World)]
-노래: ■■□□□
-안무: □□□□□
‘역시 짬 좀 찼다 이건가-’
이대로만 하면 다섯 칸 채우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고 보니 상태창이 사라질 예정이라는 게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이제는 상태창을 거의 정복한 것 같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