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111화 (111/346)

111화

꿈에도 생각 못 한 윤 피디의 등장에 모두 얼이 빠져 있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박재봉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았다.

“다들 놀란 모양이네요?”

“아니…….”

‘그럼 안 놀랐겠냐?’

뻔뻔한 태도는 놀랍지도 않았다. 현장에서 웃는 사람은 오직 윤 피디뿐이었다. 흥미진진하다는 듯 턱을 괴고 가증스럽게 웃어 보이는데, 절로 찌푸려지는 인상을 겨우 컨트롤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

“우리 또 재밌는 거 하나 만들어 보자고요.”

“허…….”

컷 소리와 함께 촬영이 끝났다. 모두 아직 어리둥절한 듯했다.

‘도대체 왜? 투마월 시즌 2가 대박이 났는데, 고작 리얼리티 피디를 자처했다고?’

모두 꺼림칙한 표정으로 윤 피디와 정식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크리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다들 반가워요. 제가 만든 그룹의 리얼리티까지 맡게 돼서 참 영광입니다, 하하.”

‘만든’과 ‘영광’이라는 단어에 묘한 강세가 들어갔다. 크리드가 윤 피디가 만든 그룹이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만 괜히 기분이 나빴다. 한 명씩 악수를 하는데 한 번 흔들고 말았다. 소심한 복수였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촬영 때 보자, 얘들아!”

“네!”

숙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모두들 윤 피디 앞이라서 참은 말을 쏟아 냈다. 관찰 카메라는 모두 꺼둔 것을 확인한 후였다.

“이거 꿈 아니죠, 선우 형?”

“재봉아, 내가 이미 뺨을 열 대는 때려 봤는데 꿈 아닌 거 같다…….”

“하, 이제 좀 탈출한다 싶었는데.”

“승빈아, 윤 피디라면 리얼리티에서도 악편에 어그로 끌겠지?”

당연한 소리였다. 투마월 내내 시달리다가 이제야 방송다운 방송을 하는구나- 기대에 가득 차 있었는데 이게 무슨 봉변인가. 데뷔만 하면 투마월, 정확히 말하면 윤 피디와의 악연도 끊어 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리얼리티 촬영은 마음 편히 즐기면서 하고 싶었는데 살얼음판 예약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발을 걸친 거지?’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리얼리티 관련 회의를 할 때도 메인 피디는 공개되지 않았다. 설마 그때부터 윤 피디가 개입했던 걸까, 그렇다면 씨넷치고 이상하리만치 평화로웠던 리얼리티는 오늘을 위한 빌드 업이었다는 것인가.

‘골치 아프게 됐네.’

이제 고용 불안정에서 벗어났으니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쉽게 끝날 리가 없지. 역시 인생은 하드코어였다.

* * *

“잡지 송장 떴다.”

“벌써?”

“응, 그리고 공식 계정에도 올라왔네.”

모연의 말에 보현은 곧장 공식 계정을 확인하곤 입을 틀어막았다.

“애들 너무 잘 나왔다!”

크리드의 첫 잡지 화보 콘셉은 ‘꿈을 꾸는 소년들’이었다. 신인인 만큼 청량한 느낌이 가득한 화보였다. 투마월의 전체 콘셉이었던 ‘마린룩’을 입은 7명의 멤버들이 깃발을 든 문승빈을 선두로 같은 곳을 응시하는 사진이 메인에 올라왔다.

“보정 누가 한 거지? 네가 좋아할 스타일이네.”

“유정이 기억나?”

“아, 스튜디오 인턴이었던 친구?”

“응, 이번에 안 그래도 연락 왔었어. 나랑 누나가 좋아하는 애들 아니냐고.”

“그런 건 진작 말해 줬어야지!”

총 5장의 사진이 선공개되었는데 뭐 하나 버릴 사진이 없었다. 첫 번째 사진은 강도현, 차지운, 문승빈의 유닛 사진이었다. 세 명이 원으로 머리를 맞대어 눈을 감은 채 누워 있고, 얼굴 위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1, 2, 3등이네?”

“설마 유닛 사진도 순위 순서대로 한 거야? 징하다…….”

모연의 예상대로 다음 페이지는 윤빈과 박재봉의 사진이었다. 박재봉이 윤빈의 등에 업히듯 올라가 있었다. 둘 다 이가 다 보이고 눈이 사라질 정도로 환하게 웃는 사진이었다.

“그러게, 다음 페이지가 윤빈이랑 재봉이인 거 보면.”

팬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서바이벌도 끝났는데 왜 굳이 또 순위순서대로 하는 거임;;

┕ㅇㅇ지겨워

-ㅋㅋㅋㅋ그 고생해서 저 등수 만들어줬는데 당연히 중요하짘ㅋㅋㅋㅋㅋㅋㅋ

┕꼬우면 지들이 투표 했어야지^^

┕벌써부터 이렇게 악개들 활개하고 다니는데 판 망했네;;

┕악개라는 말 배운지 일주일도 안됐나봄

“그럼, 선우랑 유현이 같이 찍었겠네?”

“…그렇게 되네?”

각자 최애가 나온 페이지로 방을 꾸미려고 했던 부부에게 난관이 닥쳤다.

“아, 사진 너무 예쁜데…….”

등을 맞대고 정유현은 배 모형을, 박선우는 모래시계 오브제를 손에 쥐고 정면을 보는 사진이었다. 얼굴에 붙인 파츠가 청량한 사진 분위기와 찰떡이었다. 그렇다고 사진을 반으로 자르는 건 둘 다 반대였다.

잡지를 몇백 권은 더 살 수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이미 모든 잡지가 품절 상태였다. 이것도 대기 타다가 한 권 겨우 구한 거였다. 오프라인 서점에서라도 살까 했지만 오픈 런 해야 한다는 소식에 이미 학을 뗀 부부였다.

“누나 방에 붙이기엔 너무 상큼한 사진이지 않아? 아무리 생각해도…….”

“원래 그런 언밸런스함이 예술적으로 더 가치 있는 거 아니겠니? 귀여운 방에 또 상큼한 사진? 재미없지.”

“누나 방에 검은색밖에 없잖아.”

“그래, 칙칙한 누나 방에 밝은 사진 하나 붙이겠다는데 불만이 많다?”

“미감을 중시하는 거지~”

모연이 생각해도 톤 앤 매너가 생명인 자신의 작업실에 이 청량한 색감으로 범벅인 사진이 붙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첫 화보이고 사진의 구도, 색감, 유현의 얼굴까지 너무 완벽한 사진이다. 쉽게 포기가 안 됐다. 결국 모연은 최후의 카드를 내밀었다.

“나 곧 생일인데.”

“헐.”

보현은 희한하게 모연의 생일에 약했다. 연애하던 시절에 단 한 번 생일을 챙기지 못한 날이 있었는데 덤덤했던 모연과 달리 자기가 더 전전긍긍해했다. 그다음부터는 모연의 생일은 일 년 중 가장 성대하게 보내는 날 중 하나였다. 그런데 생일을 인질로 삼다니. 보현은 울며 겨자 먹기로 화보집을 내밀었다.

“대신 누나 작업실 엄청 자주 놀러 갈 거예요.”

“땡큐-”

사진의 거취가 정해진 후에야 인터뷰를 읽기 시작했다.

Q1. 아직 데뷔가 실감 안 나죠?

승빈 : 네. 지금도 꿈꾸고 있는 거 같습니다.

선우 : 하루아침에 연습생에서 진짜 아이돌이 됐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유현 : 데뷔 무대를 하게 되면 실감이 날 것 같습니다.

Q2. To My World, 특히 이번 시즌 2는 전례가 없을 만큼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어요. 투마월에서 무엇을 얻었고, 잃었다고 생각하나요?

지운 : 같이 울고 웃는 동료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잃은 것은… 아침잠? (지운의 답에 여섯 멤버를 포함한 현장의 스태프들도 웃음이 터졌다.)

승빈 : 데뷔라는 꿈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얻음 아닐까요? 잃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고 도전한 곳이었으니까요.

“승빈이가 말을 참 잘하네.”

“맞아. 열여덟이 어떻게 저러나 싶어.”

“너 열여덟 때에는…….”

“왜 내 열여덟을 말해? 원래 이럴 땐 본인 열여덟을 떠올려야 하는 거 아니야?”

“그야 난 열여덟 때 저랬으니까.”

보현은 억울했다. 모연은 정말 그랬을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Q10. 크리드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요?

도현 : 시간이 지나도 정말 레전드인 그룹이었다고 기억되고 싶어요.

윤빈 : 제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운 그룹이었으면 좋겠어요.

재봉 : 대상 받고 싶어요!

선우 : 단독 콘서트를 꼭 해 보고 싶어요. 해외에 있는 팬분들과도 만나고 싶고요.

Q11. 벌써 마지막 질문이에요. 앞으로의 크리드는 어떤 모습일까요?

선우 : 팬분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지 않을까요?

재봉 : 진짜 진짜 최고로 멋진 아이돌이 되어 있을 겁니다!

유현 : 팬분들이 주신 사랑만큼 돌려드리는 팀이 되겠습니다.

승빈 : 크리드만의 색을 만들어 갈 것 같아요.

지운 : 무지개처럼 각자 다양한 색을 보여 주면서도, 함께했을 때 가장 멋진 팀이 되고 싶어요.

도현 : 후회 없이 저희 팀만의 음악을 선물하는, 그런 멋진 팀이 되어 있을 거라고 믿어요.

윤빈 : 멤버들과 즐겁고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을 거 같습니다.

“애들이 그새 또 성숙해졌네.”

“그러게. 애들 커 가는 거 보는 재미도 있는 거 같아.”

“누가 보면 진짜 네 아들인 줄 알겠어.”

“누나, 내가 백번은 말한 거 같은데.”

“박선우 네 아들이라고?”

“응.”

사실 모연은 자기랑 10살 정도밖에 차이 안 나는데 아들이라고 하는 보현이 웃길 따름이었다. 귀여운 놈 같으니라고.

* * *

“와… 사진 작가님 최고네요.”

공식 계정에 올라온 화보를 보던 박재봉이 감탄했다. 나도 생각보다 더 잘 나온 사진에 놀랐다. 배우로 성공한 후 화보는 여러 번 찍어 봤지만, 아이돌로서 찍는 화보는 처음이었다. 기껏해야 연예 뉴스 인터뷰 사진이 전부였지.

“클로버들도 좋아하겠다.”

“헐, 강도현 너는 팬클럽 이름 완전 익숙해졌나 보네?”

신기해하는 선우 형의 말에 강도현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아니, 나는 아직 뭔가 어색해… 맨날 팬분들 팔로워님들 하다가 클로버, 게다가 반말하려니까 괜히 쑥스러워.”

“맞아, 저 형 지난번 인터뷰 때 클로워님들이라고 했잖아.”

“재봉아, 조용히 해.”

“왜요- 클로워 아니고 클로버. 잊지 마세요!”

“그래, 클로워, 아니…….”

“풉! 뭐라고요? 따라해 보세요. 클.로.버”

“그래, 클로버! 클로버! 됐냐! 너 거기 그대로 있어라?”

“헐, 저 형이 저 때려요!”

“아무 짓도 안 했거든?”

투마월 내내 예상한 대로 둘이 붙어 있으면 피곤해진다. 선우 형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휘적거리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그때 윤빈 형이 물었다.

“근데 클로버들 반응이… 왜 싸우지?”

“응?”

확인해 보니 순위별로 조합을 짠 거냐며 진절머리 난다는 반응이 컸다. 생각해 보니 방 구성이 순위 순서대로였다. 게임을 통해서 정해진 것이어서 다들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거다.

그러고 보니 인터뷰 사진도 이 조합으로 한 것 같은데. 아직 데뷔 전이라 가장 만만한 조합이 룸메이트 조합이어서 이것저것 한 게 많았다. 연속적으로 룸메이트끼리의 조합이 나오면 순위로 팬덤 내 싸움이 커질 것이 분명했다.

“헐, 나 지금 알았어.”

“저도요. 어떻게 이렇게 짜였지?”

“이거 해명을 해야 하나?”

“방송 나가기 전까지는 비밀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음…….”

그리하여 기나긴 해명 에이앱을 기획하게 되었다. 우리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각자 한 명씩 방에서 에이앱을 켜고 대놓고 다른 멤버의 물건을 노출시키는 거다. 그렇게 되면 다들 순위별이 아니라 룸메이트끼리 조합을 짠 걸 알 것이다.

“누가 먼저 할래.”

“제가 할게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손을 들었다. 사실 에이앱은 문제가 아니다. 다만 자연스럽게 멤버들의 물건을 보여 줘야 하는 게 문제지.

“유현이 형은 뭐 보여 드릴 거예요?”

“선우야, 그렇게 말하니까 무슨 진품명품 나가는 거 같다.”

“딴소리하지 말고요.”

…저 형도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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