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데뷔 전 마지막 휴가라는 말이 사실이었다. 언제 휴가를 보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매일매일이 정신없이 바쁜 일정의 연속이었다. 피부과며 헬스장이며 온갖 관리가 그 시작이었다. 그나마 머리는 콘셉에 맞춰서 바꿀 예정이라 다들 일단 기르면서 영양만 받기로 했다.
씨넷 산하의 ‘코어 엔터테인먼트’로 크리드의 정식 소속사까지 정해지면서 보컬 및 댄스 수업도 추가되었다. 사실 서바이벌로 만들어진 그룹이라 이런 트레이닝까지 잡아 줄 줄은 몰랐는데, 투마월 시즌 2의 인기가 정말 대단하기는 했나 보다.
그렇게 하나씩 일정이 추가되던 와중에 드디어 회의 일정이 잡혔다. 데뷔 앨범을 기획하는 첫 회의였다. 티는 안 냈지만 전날부터 잠을 설칠 만큼 설렜다. 과연 어떤 노래가 타이틀곡이 될까, 어떤 콘셉일까.
특히 세계관이라고 해야 하나, 크리드라는 그룹 자체를 관통하는 콘셉이 제일 궁금했다. 티벡스 시절 야매로 지운이 형과 머리 싸매고 만들었던 허접한 세계관과는 차원이 다르겠지.
다들 하나씩 부여받은 사원증을 찍고 씨넷 건물로 들어오는데 기분이 남달랐다. 투마월 녹화장과는 다른 건물이라 아직은 낯설기만 했다. 그래도 연습실은 몇 번 와 봤다고 그나마 익숙했지만, 회의실이 있는 층은 아직 가 본 적 없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뭔가 긴장된다.”
“되게 떨리네?”
처음 들어와 본 회의실에 둘러앉아 있으니 다들 이제 정말 데뷔 준비가 눈앞에 왔구나를 실감한 것 같았다. 일곱 명이 모여 있는데도 이렇게 사뭇 진지한 분위기는 처음이었으니까. 적응이 안 되는 침묵을 깬 건, 회의실 문이 열리는 묵직한 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줄줄이 임원진을 비롯한 직원들이 들어왔다. 그중에는 뜻밖의, 그러나 아주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오해나?’
오해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회귀 전 투샤인의 유일한 대항마였던 남자 아이돌 ‘포커스’의 전담 디렉터이자, 엔터 업계 내에서 소문난 능력자였다.
‘저 사람이 원래 씨넷 소속이었나?’
VM 엔터테인먼트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의문이 들 무렵 머리 위로 기사 하나가 떠올랐다.
[투샤인의 시작, 오해나가 씨넷을 떠난 이유]
기사에 따르면 오해나는 원래 씨넷 소속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다. 투마월 시즌 2가 끝나고 씨넷은 투샤인의 데뷔 앨범과 관련된 권한을 모두 오해나에게 주었다. 사실 떠넘겼다고 하는 게 맞겠다. 데뷔도 전에 이미 유명한 그룹이니까 뭘 해도 잘되지 않겠냐는 게 임원진의 안일한 생각이었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익을 얻으려는 경영자들의 뻔하디뻔한 레퍼토리였다.
그렇게 무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척박한 환경이었지만, 그녀는 전설로 남은 ‘투샤인’의 데뷔 프로젝트인 ‘학교 3부작’을 기획해 낸 거다. 학교 3부작은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이미 서바이벌의 흥행으로 인해 기대치가 높아진 팬과 대중 모두를 만족시키는 충격적인 데뷔였다. 신인 그룹 최대 초동을 기록한 것은 물론이고, 마지막 3부작 앨범에서는 데뷔한 지 1년이 겨우 지났음에도 대상 후보로 거론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투샤인이 기록할 만한 성과를 내자 그제야 너도나도 숟가락을 얹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녀의 창작물은 다른 사람의 성과가 되었고, 분노보다도 상실감과 회의감이 앞선 그녀는 결국 1년 동안의 고민을 끝내고 VM으로 이직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 후 그녀가 기획에 참여한 ‘포커스’는 국민적 인기를 얻었고, 투마월 시즌 4를 할 무렵에는 투샤인보다 팬덤이 더 큰 그룹이 되었다. 포커스의 기획자로 이름을 알리고 나서야 뒤늦게 그녀가 투샤인의 기획자였다는 게 알려질 정도로 씨넷은 그녀의 이름을 숨겼던 거다.
포커스, 그게 바로 강도현과 김병대의 그룹이었다. 그때는 포커스를 성공하게 만든 그녀가 원망스러웠는데,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이로써 완벽한 미래를 위해 잃지 말아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생겼다.
‘이번에는 절대 이직하지 못하게 해야겠군.’
“크리드 여러분 반가워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오해나입니다. 여러분의 데뷔 앨범 전반을 기획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앞으로 저랑 제일 많이 만날 거니까 잘 부탁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어후, 패기 좋다. 역시 신인 때가 제일 활기차다니까.”
듣던 대로 사람 자체가 가진 아우라가 남달랐다. 최소 1-20살 이상은 차이 나는 임원진들 앞에서도 전혀 뒤지지 않는 기세가 느껴졌다. 저런 사람을 겨우 자기 실적 챙기겠다고 진절머리 나게 해서 회사를 떠나게 하다니, 씨넷이 새삼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자, 그럼 다들 모였으니 회의 시작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대략적으로 크리드 여러분의 데뷔곡 콘셉과 세계관에 대해서 브리핑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제가 직원분들께는 이미 자료를 메일로 보내 드렸기에 이 내용을 처음 보는 멤버들에게 설명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오해나는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고, 모두들 홀린 듯 그녀의 설명에 귀 기울였다.
“먼저 크리드의 데뷔 프로젝트는 ‘크리드의 자아 찾기’를 주제로, 총 4부작으로 진행됩니다.”
‘자아 찾기?’
무수히 많은 아이돌들이 자아 찾기를 콘셉으로 내세웠지만, 대부분 수박 겉핥기식의 세계관과 스토리텔링이었다. 그래서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녀의 발표를 들을수록 걱정은 기대로 완벽하게 바뀌었다.
스크린에는 크리드의 철자를 딴 단어 4개가 나왔다.
1. Create: 탄생
2. Ready : 준비
3. Ideal : 이상
4. Definition : 정의
“보시는 것처럼 각 앨범의 타이틀은 그룹명을 활용해 보면 어떨까 싶은데요.”
자연스럽게 넘어간 다음 페이지에는 각 단어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크리드라는 그룹으로 새롭게 탄생해서 많은 걸 준비하고 이상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결국 내가 하는 게 곧 답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크리드 멤버들.
*정해진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정의 내리고 만들어 가는 게 곧 정답이다. 내 길은 내가 찾는다는 메시지를 전달.
*4부작 이후의 앨범은 확신을 가지고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크리드의 행보를 보여 줄 것임.
*서바이벌에 의해 만들어진 아이돌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크리드만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목표.
“와…….”
“그리고 이 자아 찾기 세계관의 시작은 바로, 학교입니다.”
“학교?”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 놓인 세계관 속 크리드 여러분들은 시작부터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데뷔 앨범을 아이디 버전과, 이드 버전으로 나뉘어 전혀 다른 두 가지 자아를 가지고 있음을 표현할 것입니다.”
“대박…….”
아이디와 이드 두 가지 의미를 담는 그룹명을 앨범 버전으로 확장한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리고 세 번째 물음표 버전의 앨범에서는 아이디와 이드가 혼재된 모습을 보여 줄 것입니다.”
그녀의 말과 함께 넘어간 PPT 다음 화면에서는 각 버전에 대한 간략한 소개까지 담겨 있었다.
[아이디 ver : 학교 안에서 정해진 멤버들의 모습. 단정하고 얌전한 모습
이드 ver : 학교 밖에서 밝혀지는 멤버들의 진짜 모습. 학교를 벗어나 자유분방한 모습
물음표 ver: 아이디와 이드 두 가지 모습의 혼재]
“우선 아이디 버전에는 포토 카드 대신 학생증 형태의 ID카드를 앨범 구성품으로 만들 예정입니다. 멤버들을 처음 소개하는 앨범인 만큼, 각 멤버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거죠.”
“하지만 이드 버전에서는 단정했던 ID카드와는 다르게 각자 셀카로 자유롭게 찍은 포토 카드가 들어갈 겁니다. 멤버들의 오프 더 레코드를 보여 주는 느낌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음표 버전에는 홀로그램 카드를 넣을 생각입니다. 아이디 버전과 이드 버전 사진이 각각 담겨서 카드 각도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이 보이는 거죠.”
“와…….”
대략적인 틀만 보여 줬는데도 탄탄한 세계관과 기획에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좋아 보이는 건 다 때려 박아야 한다고 세계관에 손을 댔던 티벡스 회사 사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첫 회의인데 콘셉을 보여 줄 앨범 구성품까지 계획하고 있다니. 완성된 앨범은 얼마나 대단할지가 벌써 기대될 정도였다.
아직 데뷔곡도 안 들어 봤지만 이미 모두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정유현은 열심히 필기하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박재봉은 들뜬 마음을 숨기기 힘든 듯 광대가 계속 움찔거리고 있었다.
“일단 지금까지 나온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혹시 질문 있나요? 아니면, 추가적으로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면 얘기해 주세요.”
“저희가요?”
“네, 크리드 멤버분들이 존재할 세계관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의견도 중요하죠.”
“그럼 저희 막 슈퍼 히어로 이런 것도 해도 될까요?”
박재봉의 조금은 엉뚱한 질문에 앉아 있던 임원진과 다른 멤버들까지 모두 웃음이 터졌다. 그런데 오해나 디렉터는 꽤 진지하게 대답했다.
“음, 안 그래도 그런 설정을 넣을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온 오프가 다른 콘셉이니까 각자 다른 능력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일단 자신의 의견이 수렴됐다는 것에서 이미 박재봉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리고 이 모든 건 결국 여러분들 개인의 특성을 담을 거라서, 멤버들 각자 한 분씩 저와 인터뷰 시간을 가지게 될 겁니다.”
“인터뷰요?”
“네, 여러분은 유명 서바이벌을 통해서 노출되었기에 대중 인지도가 높은 상태에요. 그렇기에 다른 신인 그룹들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콘셉을 짜 버리면, 대중들이 이미 알고 있던 여러분의 이미지와 괴리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어요.”
정확한 분석이었다. 내가 세계관이라는 말에 기대하면서도 걱정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아이돌이라는 건, 특히 남자 아이돌은 모름지기 묘한 신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대중성이라는 건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모든 스토리텔링은 여러분들로부터 시작될 거예요. 예를 들어 윤빈 씨처럼 운동을 잘하는 분은 농구부나 축구부 같은 동아리 소속인데, 알고 보면 그게 숨겨진 초능력 때문에 잘했던 거였을 수도 있고요.”
“뭐, 선우 씨는 학교에서는 친화력도 좋고 말도 많은 친구인데, 학교 밖을 나가면 이미지가 싹 바뀐다든지.”
조용히 듣고 있던 선우 형의 눈이 말 그대로 반짝였다.
“헐, 디렉터님. 저 그거 완전 좋은데요? 이중생활 같은 그런 느낌인 거죠?”
“그렇죠. 이건 말 그대로 예시고, 최대한 여러분들의 모습을 담으면서도 원하는 캐릭터를 만들어 드릴 거예요.”
“하지만 절대 무거워지지는 않을 거예요. 아이돌은 즐거움을 줘야 하니까요.”
완벽 그 자체였다. 아니 어디서 저런 능력자가 나타난 거지. 다시 한번 다짐했다. 크리드가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 저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